<에필로그 4화>
“긴장했어?”
차가 신호에 잠시 정차하자 조수석을 슬쩍 돌아본 성현이 웃으며 물었다. 아연은 대답 대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경직된 얼굴은 옆을 바라볼 여유도 없다는 듯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런 아연이 귀여워서 그가 낮게 키득거렸다.
“고작 노인네 생일파티일 뿐인데 뭘 이렇게 바짝 얼어 있어.”
성현이 불쑥 몸을 기울이며 아연의 턱을 잡아 돌렸다. 끝이 휘어진 기다란 눈매가 단숨에 가까워졌다. 비스듬히 내리깐 시선이 아연을 담은 채로 입술이 겹쳐졌다.
아랫입술을 물고 부드럽게 할짝이다가 이내 입술을 열며 성현이 밀려 들어왔다. 달래듯 다정하고 요사스러운 움직임으로 그의 혀가 아연을 휘저어 댔다.
뒤통수에 눈이라도 달렸는지, 성현은 신호가 막 바뀌고 나서야 아연을 놓아주었다.
아연은 야트막하게 가빠진 숨을 색색 내쉬며 발개진 뺨을 손등으로 눌러 진정시켰다. 그러나 정작 그녀의 숨을 고스란히 앗아 간 사람은 숨소리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채 차를 부드럽게 출발시키고 있었다.
그런 성현이 얄밉기 짝이 없었지만, 그와의 키스 덕분인지 긴장이 다소 가라앉았다.
아연은 거울에 입술을 비추어 보며 화장이 번진 곳을 정리하고, 성현의 입술 끝에 묻은 립스틱을 손가락으로 닦아 주었다. 그 와중에도 성현은 혀를 내밀어 아연의 손가락을 핥는 짓궂은 장난질을 해 댔다. 결국 아연은 졌다는 듯이 피식 웃고 말았다.
두 사람이 탄 차는 태송현을 향해 미끄러지듯 달렸다. 태송현에는 오늘 권민환 회장의 생일을 기념하는 행사가 예정되어 있었다. 아연은 지금으로부터 일주일 전 행사의 초대장을 받았다.
한창 아연이 카페에서 주문을 받고 있을 때였다. 정장을 칼같이 갖춰 입은 중년의 남자가 주문한 커피를 받더니 깍듯한 태도로 봉투에 담긴 초대장을 아연에게 건넸다.
‘태송현에서 보내신 겁니다.’
‘아…….’
차마 넙죽 받지 못하고 이게 무엇이냐고 눈빛으로 묻자, 남자는 열어 보면 알 거라는 대답만 남긴 채 사라졌다.
초대장을 확인하는 아연의 옆에서 곁눈질로 안쪽을 훔쳐본 규영이 꺅꺅거리며 호들갑을 떨었다. 성현은 고작 노인네 생일파티일 뿐이라고 폄하했지만, 사실 태송현의 자선 행사는 그 화려한 규모가 종종 언론에서도 보도가 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관심이 높았다.
사전에 초대받은 손님들로만 이루어지는 비공개 행사이나, 워낙 거물급 정재계 인사들이 한데 모이는 자리이기 때문에 자선 행사 날이면 태송현의 높은 담벼락 건너편에 기자들이 진을 치곤 했다. 태송현 담 안으로 들어가는 VIP 손님들의 뒷모습이나마 찍어 보려는 시도였다.
가끔 그렇게 건진 보도 자료들이 언론을 탔고, 태강그룹 차원에서도 그날 모금된 자선 금액의 사용처를 밝히며 행사 내부 사진을 공개하기도 했다.
대대로 지역구에서 국회의원을 배출한 집안 출신답게 아연의 아버지인 강준도 태송현의 자선 행사에 종종 초대받았었다. 그곳에 강준이 본처를 동반하고 갔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된 희수가 길길이 날뛴 후로 그는 매번 혼자 참석했다고 들었다.
태송현에서 치르는 여러 행사 중 특히 권민환 회장의 생일을 기념하는 행사가 가장 규모가 크고 화려한데, 자칫 사치스럽다는 이미지로 비칠까 염려해서인지 매년 치러지지는 않았다. 이번 권 회장의 생일을 앞두고 언론에서도 작년에 행사가 있었기 때문에 올해는 생략할 거라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아마도 권 회장의 병세가 심각하다는 세간의 루머를 종식시키기 위해 올해도 행사를 여는 게 아닐까. 아연은 무릎 위에 둔 초대장을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아연이 자선 행사에 초대받은 것은 처음일뿐더러, 성현의 본가인 태송현에 가는 것도 엄청나게 오래간만이었다. 어렸을 적에는 철없이 자주 들락거렸지만, 언젠가 성현의 짓궂은 꼬드김에 넘어가 그의 아버지, 윤재의 서재에서 나쁜 짓을 하다 들키는 바람에 벼락같은 꾸중을 들었던 사건 이후로는 발길을 뚝 끊다시피 했으니까.
그날 성난 호랑이 같았던 윤재의 얼굴이 여전히 아연의 기억 속에 생생하게 떠다니고 있었다. 늘 자상한 분위기로 그녀를 맞아 주시던 분이었기에 아무래도 더 충격이 컸던 모양이었다.
크게 호통치던 모습이 인이 박이듯 뇌리에 깊게 남아서, 그를 떠올리면 저절로 가슴이 서늘해지곤 했다. 아연이 성현과 처음 몸을 섞은 후 죄책감, 그리고 배덕감에 시름시름 시달리는 데 일조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긴장할 거 없어.”
그러니 긴장을 안 할 수가 있나…….
십수 년 만에 성현의 아버지를 다시 뵐 생각을 하니 긴장으로 몸이 얼음처럼 굳어졌다. 옆에서 성현이 다정하게 다독이는 말도 귀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심지어 잔뜩 찔리는 것도 있지 않은가.
아연은 무언가 뾰족한 것으로 쿡쿡 찌르는 것처럼 따끔거리는 가슴 위에 가만히 손을 얹고 심호흡을 했다.
갑자기 아연에게 초대장을 전달한 것을 보면,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태송현에서도 훤히 알고 계신 게 분명했다. 하긴 모르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성현과 정식으로 사귀기 시작한 것도 벌써 반년이 지났다. 물론 그 전부터 이런 짓 저런 짓 다 하고 다닌 데다가, 진작 꼬리가 밟혀서 태준에게 협박을 당한 일도 있었으니, 태송현에서 모를 리가 없었다.
그동안 모든 것을 알고도 두 사람이 어울리는 것을 그냥 내버려 둔 채 조용히 지켜보았다는 게 더 무섭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아연은 차가워진 손끝을 만지작거렸다. 차가 태송현에 가까워질수록 직접 불구덩이에 걸어 들어가는 듯한 심정이 짙어졌다.
그녀의 복잡다단한 가정환경에 한동안 세간을 시끄럽게 한 강준의 사건까지 더해졌으니, 자신을 탐탁지 않아 하실 게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하지만 피한다고 해서 피해질 리 없는 일이다. 게다가 어른께 초대를 받았는데 응하지 않는 것도 예의가 아닐 테니.
아연은 마음을 단단히 다잡고 살그머니 손을 뻗어 성현의 손을 잡았다. 왼손을 운전대에 느슨하게 얹고 있던 성현이 그런 아연을 흘긋 보고는 아무렇지 않게 손을 당겨 갔다. 그러고는 그녀의 손등에 입을 쪽 맞추었다.
아연은 연하게 미소 지으며 그와 하나로 얽힌 손깍지에 꾸욱 힘을 주었다.
창 바깥으로 점점 낯선 듯 익숙한 풍경이 펼쳐졌다. 야트막한 오르막길의 끄트머리에 한옥의 처마를 연상케 하는 담벼락이 보이고, 그 너머로 사시사철 푸른 나무들이 너울진 태송현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연은 등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여린 눈매가 살며시 떨리며 숨길 수 없는 불안감이 서렸다.
“……우리 너무 늦게 온 건가? 왜 아무도 없지?”
태송현의 담벼락을 따라 차량 행렬이 줄줄이 이어져 있을 모습을 예상했는데, 한적한 주택가의 널찍한 골목은 지나다니는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고 잠잠하기만 했다.
“시간 딱 맞췄네.”
차량 중앙의 시계를 확인한 성현이 핸들을 틀어 때맞춰 열린 문 안으로 진입했다. 고즈넉하게 꾸며진 거대한 정원을 따라 부드럽게 달린 차는 이윽고 차고에 멈춰 섰다.
“들어가자.”
차에서 내린 성현이 아연을 향해 당연하다는 듯이 손을 내밀었다. 아연은 작은 클러치를 양손으로 잡으며 고개를 작게 저었다.
“손잡고 가는 건 아무래도 좀…….”
“손 안 잡아 주면 안고 들어갈 건데?”
손을 잡고 들어갈 것인가, 아니면 꼼짝없이 둘러 안긴 채 들어갈 것인가. 네가 선택하란 듯이 느긋하게 묻는 성현의 눈매에 요사스러운 기색이 넘실거렸다.
아연은 마지못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아연의 손을 낚아챈 성현이 기다렸다는 듯이 제 쪽으로 당기며 그녀의 머리카락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시도 때도 없이 입술을 붙여 오는 그에게 내성이 생긴 지는 오래였지만,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아연은 몸을 사리며 눈을 흘겼다. 장난기가 밴 웃음을 짓던 성현은 금세 점잖은 가면을 뒤집어쓰고는 아연의 손을 잡고 조용히 앞서 걸었다.
저택 내부는 기이하리만치 고요했다.
아연은 성현의 손에 이끌려 1층 응접실로 들어섰다. 입구에서 직원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은애가 보였다. 응접실로 들어선 성현과 아연을 발견한 은애는 세월의 흔적이 느리게 다녀간 고운 얼굴에 은은한 미소를 띤 채 우아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아연이 왔구나. 어서 오렴.”
두 사람이 하나로 맞잡은 손에 은애의 시선이 짧게 와닿는 게 느껴졌다.
아연은 저도 모르게 흠칫하며 손을 스르르 떼어 냈다. 그러나 아연의 손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낀 성현이 득달같이 다시 쥐어 왔다. 은애의 시선이 잠시 다른 곳을 향한 사이, 아연은 애원하는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의 절실한 부탁이 느껴졌는지 성현의 기세도 이내 얌전해졌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은애가 아연의 어깨를 빙글 돌리며 응접실 안으로 이끌었다.
“들어가자. 안에서 기다리고 계셔.”
응접실에 놓인 소파의 가장 상석에는 권민환 회장이, 건너편에는 윤재가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응접실 구석구석을 눈을 씻고 둘러보아도 세간을 떠들썩하게 하는 화려한 자선 파티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대문에 들어섰을 때부터 태송현을 둘러싸고 있는 기묘한 정적에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지만, 심장이 난데없이 쿵쾅거리기 시작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아연은 애써 침착하게 걸었다. 긴장하지 말라는 듯이 은애가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는 게 느껴졌다. 그녀의 다정한 손길이 가슴이 뭉클할 정도로 고마웠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잔뜩 얼어붙은 목구멍에서는 감사하다는 말조차 나오지가 않았다.
“아버님, 애들 도착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