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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2화 (69/96)

<에필로그 2화>

성현이 카운터 문을 열고 안쪽으로 들어오며 물었다. 무심하게 말하면서도, 그의 시선은 이미 그녀의 주변을 날카롭게 살피고 있었다.

싱크대 위로 불룩 솟아올랐을 정도로 쌓인 채 설거지를 기다리고 있는 컵과 그릇들이 보였다. 성현은 싱크대 앞에 선 아연을 자연스럽게 밀어내고 자리를 잡았다.

“이거 다 해야 가는 거지?”

산더미처럼 쌓인 설거짓거리들을 흘긋 눈짓하며 성현이 물었다.

집에서는 곧잘 성현이 집안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집안 살림을 도와주시는 이모님이 낮 시간마다 들르시지만, 원체 깔끔 떠는 성격이라 집에 무언가 쌓여 있는 꼴을 용납하지 못하는 성현이었다.

아연과 간단히 무언가를 해 먹거나 심지어 배달 음식을 시켜 먹는 경우에도, 식사를 마치기 무섭게 일어나 뒷정리와 설거지를 해치워 버리곤 했다.

엉덩이가 예쁜 줄만 알았는데, 가볍기도 하지.

그런 싱거운 생각이나 하면서 성현의 뒷모습을 감상하는 일에 익숙해진 아연이었다. 하지만 카페에서까지 그를 부려 먹는 건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아서 아연은 살그머니 그의 어깨를 밀었다.

“내가 할게. 그냥 앉아서 기다려. 옷에 물 다 튀어.”

출장길에서 바로 달려온 성현은 격식 있는 슈트 차림이었다. 설거지와는 영 어울리지 않는 그의 옷차림을 지적해 보았지만 그는 들은 체도 안 했다.

“됐어. 내가 더 금방 해. 대신 나 앞치마 묶어 줘.”

성현은 슈트 재킷을 벗어 카운터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으며 말했다. 성가시니 앞치마나 묶으라는 투였다.

이미 그가 무언가를 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바꾸기는 어렵다는 것을 아는 아연은 순순히 앞치마를 가져왔다. 그리고 성현의 뒤에서 그를 껴안듯이 팔을 넣어 앞치마를 둘러 주는데, 갑자기 양팔이 붙잡혔다.

“잘하라고 응원도 해 줘야지.”

고개를 비스듬히 돌린 성현이 아연만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작게 입술을 삐죽였다.

하여간 은근히 애교가 넘친다니까.

아연은 성현의 입술에 짧게 입술을 부딪치며, 자신이 이 덩치 커다란 남자의 애교에 지나치게 약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금세 마음이 녹진하게 녹아 흐물거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잘생긴 얼굴 탓인 것도 같지만.

그의 말처럼 아연이 했으면 최소 20분은 걸렸을 설거지를 성현은 10분 만에 해치웠다. 물기까지 깨끗이 닦여 가지런히 정리된 그릇들은 지금 당장 영업을 시작해도 좋을 만큼 완벽한 상태였다.

성현이 설거지를 하는 동안 매출 정산을 마친 아연은 카운터 안쪽에 있는 쓰레기통의 봉지를 꺼내 꼼꼼히 묶었다. 매장 내부의 쓰레기는 민재가 퇴근 전에 정리해 둔 덕분에 오늘의 마지막 할 일이었다.

재빨리 버리고 올 생각으로 허리를 펴는데 순식간에 손이 가벼워졌다. 아연의 손에서 쓰레기봉투를 뺏어 간 성현이 못마땅한 눈길로 그것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차마 그것까진 못 시키겠다. 이리 줘. 내가 할 테니까.”

“뒷문으로 나가서 버리고 오면 되지?”

눈썰미도 좋아서는, 이미 카페의 구조 파악을 모두 끝낸 성현은 알려 주지도 않았는데 쓰레기 수거함이 있는 곳을 향해 몸을 돌리고 있었다.

한아연이 이렇게 무거운 걸 든다고?

뒤쪽으로 걸어가던 그가 쓰레기봉투의 무게에 충격받은 듯 짧은 욕지기를 섞어 가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오늘 정도면 평소에 비해서 특별히 무거운 것도 아닌데…….

물론 아연의 팔이 바람만 스쳐도 똑 부러질 섬약한 나뭇가지라도 되는 것처럼 과보호를 일삼는 성현이기에 이제는 놀랍지도 않았다.

성현이 뒷문으로 사라지자 아연은 매장 내의 테이블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때, 또 한 번 카페 입구에서 종소리가 딸랑 울렸다.

아까 성현이 들어온 뒤 조명도 이미 어둑하게 바꿔 놓은 후였다. 술에 취해서 잘못 들어온 손님인가 생각하며, 아연은 손님맞이용 미소를 얼굴에 띠고 몸을 돌렸다.

“저희 마감……, 어?”

“너무 늦은 시간이라 벌써 끝내고 집에 갔으려나 싶었는데, 다행히 아직 있었네?”

준성이 손을 들어 아연에게 반갑게 인사하며 저벅저벅 걸어 들어왔다.

“웬일이야, 갑자기? 연락도 없이.”

반년 전쯤 있었던 진한의 결혼식에서 잠시 마주쳐서 짧게 이야기를 나눈 이후로 처음 보는 것이었다. 준성과는 동창 모임에서나 만나지 단둘이 보는 일이 없었기에 예상 밖의 방문이었다.

아연이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준성이 쑥스러운 듯 귓등을 긁으며 말했다.

“사실 나 한강준 의원님 소식 듣고 네 걱정 많이 했어. 괜찮은지 연락해 볼까 하다가, 괜히 호기심으로 들쑤시는 것 같아 보일까 봐 여태 꾹 참았거든.”

“아아.”

“이제 그 일도 어느 정도 마무리된 것 같고, 너도 마음 정리했겠다 싶어서. 얼굴 보고 위로도 해 줄 겸 왔다.”

괜찮지? 슬쩍 눈을 들어 시선을 마주치며 준성이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어둑하게 조도를 낮춘 조명을 받아 준성의 양 뺨이 불그스름하게 보였다. 그러고 보니 그에게서 아주 옅은 술 냄새가 느껴졌다.

얘 취했네.

아연은 괜찮다는 뜻의 미소를 옅게 지었다. 카페 마감을 숱하게 하다 보니, 준성과 같은 사람은 수도 없이 많이 볼 수 있었다. 술에 취하면 평소 잊고 있었던 사람이 문득 머릿속에 떠올라 술김에 충동적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들.

딱히 만취하지 않은 이상, 저 정도의 취객은 적당히 친절하게 응대해 주면 제풀에 지쳐 서성거리다가 조용히 돌아 나가곤 했다.

“집에 갈 준비 하고 있던 거지? 내가 도와줄게! 넌 그냥 앉아 있어. 하루 종일 힘들었을 텐데.”

“아니, 안 그래도 되는데…….”

준성이 어깨를 틀더니 얼른 슈트 재킷을 벗고 옆의 테이블 위로 아무렇게나 던졌다. 그러고는 박력 있는 몸짓으로 팔뚝을 걷어붙였다.

테이블의 흐트러진 대열만 맞추면 되는 터라 팔까지 걷어붙일 필요가 있을까 싶었지만, 술 취한 사람이 무슨 정신이 있겠나 하는 생각에 그냥 두었다.

준성은 어두운 매장 안을 슥 둘러보곤 혀를 쯧 찼다.

“너는 이런 힘든 건 그냥 직원들 시키지, 이 늦은 밤까지 왜 혼자서 일하고 그래. 신경 쓰이게.”

“마감은 직원들이랑 돌아가면서 해. 오늘은 내 차례라.”

흘끗 눈을 굴려 자신을 향한 아연의 시선을 의식한 준성이 의욕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그러나 어째 시간이 지날수록 테이블의 배열이 더욱 삐뚤삐뚤해지고 있었다.

“너 뭐 하냐.”

그때 낮은 음성이 등 뒤에서 들려왔다. 아연이 돌아보니 가게 뒤쪽에 나갔다가 돌아온 성현이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준성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 권, 권성현, 너도 있었어? 언제 왔어?”

넘치는 의욕으로 테이블을 엉망으로 만들고 있던 준성이 갑자기 나타난 성현의 등장에 펄쩍 뛰듯이 놀랐다.

“한참 전부터 와 있었는데.”

성현은 아연이 서 있는 곳까지 느긋한 발걸음으로 다가갔다. 그러다 삐뚤어진 테이블을 발견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너 미국 간 거 아니었어? 미국 공장 멈춰서 난리 났다면서.”

“오늘 왔어.”

“그래? 말 좀 하지. 한아연 혼자 있는 줄 알았는데.”

“한아연이 혼자 있었으면 뭘 어쩌려고.”

명백한 시비조의 말투였다. 찢어 죽일 듯이 직시하는 시퍼런 눈길에 준성은 조용히 주눅 든 시선을 내리깔았다.

“아니, 뭐 어쩌겠다는 건 아니고……. 넌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그냥 얼굴이나 볼까 해서 온 거 가지고 왜 확대 해석이야.”

저 새낀 또 왜 저렇게 유난이야. 간만에 친구 좀 만나러 온 사람을 노려보긴 왜 노려봐? 하여간 개떡 같은 성질머리하곤……. 내가 뭘 어쨌다고. 뭐 어떻게 해 보기라도 했음 억울하지라도 않지.

준성이 불만스럽게 궁시렁거렸다. 걷어붙인 팔뚝에 소름이 돋아났다. 아직 에어컨을 틀어 놨나? 전신에 끼쳐 오는 스산한 한기를 느낀 준성이 오들오들 떨며 소매를 서둘러 풀어 내렸다.

슬그머니 눈을 든 준성의 시야에 나란히 서 있는 성현과 아연이 보였다. 어색한 얼굴로 몸을 모로 튼 아연과 그런 아연을 내려다보는 성현의 얼굴에 때아닌 봄바람이 살랑거렸다. 우뚝 움직임을 멈춘 준성은 자신도 모르게 턱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저 간지러운 낯짝은 대체 뭐야.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이었다. 지겨우리만치 잘생기기나 했지, 늘 짜증이 한 스푼 가미된 얼굴을 기본으로 장착하고 있던 권성현이 아니던가.

서늘한 이목구비를 배반하듯 기다란 눈매와 매끈한 입가에 떠오른 달짝지근하기 짝이 없는 미소에 준성은 모골이 송연해졌다.

서, 설마…….

입술을 움찔거리는데, 성현이 시선을 비스듬히 틀었다.

그 꿀 바른 미소는 삽시간에 집어치우고 준성을 응시하는 눈에는 오뉴월의 서리 같은 냉기가 서려 있었다. 얼음으로 만든 꼬챙이에 찔린 것처럼 준성은 흠칫 허리를 곧추세웠다.

“너, 너네, 뭐야……?”

그러고 보니 뒤늦게 성현의 허리에 묶인 검은 앞치마가 준성의 눈에 들어왔다. 저 어울리지도 않는 꼴이 대체 뭐람. 못 볼 꼴을 봤다는 듯 준성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눈치 더럽게 없네.”

한심하다는 듯 성현이 읊조렸다. 그러곤 하찮은 날파리를 쳐다보는 것 같은 느긋한 시선으로 준성을 내려다보았다.

성현은 아연의 곁에 나란히 서서 어깨 끝만 살짝 겹치고 있는 것만으로도 흡사 자신의 영역을 과시하는 맹수처럼 보였다. 본의 아니게 호랑이굴에 발을 들인 토끼가 된 심정으로 준성이 더듬더듬 물었다.

“어, 언제부터?”

오래전부터 성현이 아연을 친구가 아닌 여자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은 당연히 눈치채고 있었다. 아니, 눈치라고 말하기도 뭐한 게, 이 바닥에선 알게 모르게 수군거리고 있는 사실이었다.

태강그룹 권성현이 한아연을 제 품에 아기처럼 끼고 다른 누구도 넘보지 못하게 한다더라.

그리고 그렇게 수군수군 떠드는 모두가 확신했다.

두 사람이 진짜로 잘될 리는 없을 거라고.

준성은 미묘한 시선으로 성현의 옆에 선 아연을 바라보았다.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다음 파티나 모임에서 가장 화두가 될 대화 주제는 ‘두 사람이 과연 언제, 얼마 만에 헤어지게 될 것이냐’일 것이다. 아마도 거액의 내기 돈까지 걸며 신나서 까댈 사람들이 눈에 빤히 그려졌다.

“알 거 없어.”

심드렁하게 대화를 일축한 성현이 손목을 비틀어 시계를 확인했다. 볼일 끝났으면 불청객은 이만 꺼지라는 뜻의 몸짓이었다.

성현에게 묻고 싶은 건 많았지만, 아무래도 아연의 앞에서 물을 말은 아니었다. 준성은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거리며 테이블에 던져두었던 슈트 재킷을 챙겨 들었다.

“그래. 그럼 방해꾼은 이만 꺼져 줄게. 다음 모임 때 보자, 한아연. 간다.”

준성은 바람처럼 사라졌다. 충격으로 물들었던 준성의 얼빠진 표정을 곱씹어 보는데, 누가 왔다 가기는 했냐는 듯 성현은 태연하기만 한 얼굴로 아연을 내려다보며 다정하게 물었다.

“이제 집에 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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