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본부장님, 그럼 서초 사옥으로 모시겠습니다.”
조수석에 올라탄 김 실장이 뒷좌석을 슬쩍 돌아보며 말했다. 성현은 팔을 비틀어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잠깐 일원동에 들렀다 가시죠.”
“아, 병원 말씀이십니까?”
지연의 병원에 들르려는 그의 의도를 금세 알아챈 김 실장이 운전기사를 향해 눈짓했다. 운전기사는 부드럽게 핸들을 돌렸다.
성현은 소매의 옷자락을 정리하며 무심한 시선을 창가로 옮겼다.
지금쯤이면 지연이 태준의 소식을 접하고도 남았을 터였다. 고발장 접수를 앞두고 성현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제 누나가 어떤 반응을 보이더라도 멈출 뜻은 없었으니까.
다만 임시 총회를 앞두고 예의상 지연에게 얼굴 정도는 비칠 생각이었다.
성현이 탄 차가 병원 로비 앞에 천천히 멈추어 섰다. 차에서 몸을 일으킨 성현은 너른 보폭으로 병원으로 들어섰다.
곧장 원장실로 향하던 성현의 눈썹이 일순 찌푸려졌다. 원장실 앞에 모여 선 직원들이 불안한 기색으로 쩔쩔매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색이 된 얼굴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 있던 직원 하나가 성현을 발견하고 얼굴빛을 밝혔다.
“아! 마침 잘 오셨어요! 안에 기 사장님이 들어가셨는데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서……. 저희가 차마 함부로 들어가지는 못하고…….”
직원이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성현이 서슴없이 원장실 문을 열어젖혔다.
책상 위의 서류를 내동댕이치고 발로 짓밟으며 패악질을 부리던 태준이 기척을 느끼고 홱 몸을 돌렸다.
“이…… 뻔뻔한 놈이 여기가 어디라고 얼굴을 들이밀어!”
태준은 턱 끝까지 차오른 분노를 쏟아 내며 악을 썼다. 성현은 그런 태준은 보이지도 않는 것처럼 무시하며 스쳐 지나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책상 앞으로 다가간 그는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있는 지연을 내려다보았다.
“성현이 너까지, 여긴 왜 왔어.”
남편의 한심한 패악질에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으로 짚고 있던 지연이 피로한 낯을 들어 올렸다.
원장실 안을 엉망으로 어지럽혀 놓았지만, 지연의 몸에는 손끝 하나 대지 않은 것을 확인한 성현이 몸을 돌려세웠다. 서리처럼 차가운 시선이 거친 숨을 씩씩거리는 태준을 굽어보았다.
“너, 내 눈앞에 잘 나타났다. 어떻게 가족 등에 칼을 꽂을 수가 있어! 이 천하의 빌어먹을 놈이…….”
태준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넘어질 듯이 성현에게 달려들었다. 언뜻 봐서는 성현에게 안길 기세로 불쑥 몸을 날리더니 그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너! 네가 어떻게 나한테! 까마득하게 어린놈이 위아래도 모르고, 기어이 나를! 이 싸가지 없는 놈……!”
“누가 위고 아래인지, 아직도 상황 파악이 제대로 안 됩니까.”
성현은 마치 얼쩡거리는 파리를 쫓아내는 것처럼 귀찮은 손길로 태준의 손을 가볍게 털어 냈다.
“그렇지 않아도 찾아가려던 참이었어요.”
무표정한 얼굴이 거짓말처럼 나긋하게 미소 지었다.
“수사 시작되기 전에 한 대 패 주지 않으면, 감방까지 쫓아 들어가고 싶어질 것 같았거든요.”
“……뭐라고? 그게 무슨…….”
멍청하게 되묻는 얼굴. 대답 대신 커다란 주먹이 태준의 코를 후려쳤다.
“아악!”
태준이 코를 움켜잡고 바닥에 널브러졌다. 무릎을 꿇고 바닥에 엎드린 채로 코를 더듬거린다. 코뼈 전체가 부서졌거나 아예 완전히 내려앉은 건 아닌지 조심스럽게 매만지며 그는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지연은 놀란 얼굴로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태준에게 시선을 고정한 성현에게는 그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고작 한 대 친 것으로 속이 풀릴 리가 없었다. 오히려 속이 더 시꺼멓게 탔다. 아예 곤죽을 만들어 버리고 싶은 충동만 간절해질 뿐이었다.
여리디여린 여자를 상대로 그따위 지저분한 계략을 저지를 때까지만 해도 아주 자신만만했을 테지. 지금은 바닥을 기고 있는 꼴사나운 모습조차 분노를 유발했다.
그 맞은편에 앉아서 끔찍한 시간을 감내하고 견뎠을 아연을 떠올리니 울화통이 치밀어 뒤통수가 지끈거리고 눈앞이 흐려졌다. 아연을 앉혀 놓고 악의적인 말을 쏟아 내었을 저주받을 주둥이를 멀쩡히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성현이 구둣발을 앞으로 내디디자, 그 소리에 흠칫 놀란 태준이 몸을 발랑 뒤집었다. 그의 얼굴은 코에서 흘러내린 시뻘건 피로 엉망이었다. 코를 더듬거리느라 자신도 모르게 피를 더 펴 바른 형편없는 모양새였다.
“다가오지 마! 여보! 경찰 불러!”
태준은 엉덩이를 질질 끌면서 뒤로 물러났다. 태어나 처음 겪은 극심한 고통에 의식이 혼미했다. 한 대 더 맞을까 봐 태준의 눈 안 가득 공포가 어른거렸다.
“오지 말라고! 네가 어떻게……, 어떻게 매형을 칠 수가 있어! 사람이라면 이럴 수는 없는 법이야. 이 피를 좀 보라고!”
“억울하면 고소하든가.”
또 한 번의 벼락이 떨어질 거라는 예감에 태준이 눈을 질끈 감았다.
똑똑.
그때 노크 소리가 긴장 어린 공기를 갈랐다.
노크가 끝나기 무섭게 김 실장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꾸벅 허리를 숙였다가 편 그가 바닥에 드러누운 채로 코를 움켜쥐고 있는 태준을 보고 흠칫 놀랐다. 하지만 금세 침착함을 되찾은 김 실장은 빠른 걸음으로 성현에게 다가왔다.
김 실장이 소곤소곤 무언갈 속삭이자, 성현의 표정이 삽시간에 변했다.
“가 봐야겠어요.”
성현이 풀고 있던 슈트 상의의 단추를 잠그며 원장실 문 쪽으로 향했다.
“여기 정리 좀 부탁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본부장님.”
여전히 바닥에서 끙끙거리는 태준을 가리키듯 고개를 까딱인 성현이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대체 무슨 일인데 낯빛이 저렇게 변해서 달려가는 거야.
걱정스러운 얼굴로 성현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지연이 이윽고 고개를 틀었다.
다시금 고통이 밀려드는지 태준이 끙끙거리며 바닥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성가시단 눈길이 태준을 차갑게 훑어 내리고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 * *
달칵. 희수가 서재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화가 가시지 않는지 다시금 사진을 들여다보며 부들거리고 있던 강준이 고개를 들었다.
“아연이 녀석 갔어? 이제 와서 뒤늦게 사춘기라도 온 건지 내 참, 어이가 없어서…….”
신경질적으로 사진을 내팽개친 강준은 아까 전 희수가 떨어뜨리는 바람에 서재 한편에 널브러진 찻잔을 턱짓하며 말했다.
“거기 지저분해진 것들 좀 치우고, 커피 한 잔 진하게 내려와 봐. 아연이 그 녀석을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니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이야.”
커피 타령이나 하는 강준을 싸늘하게 쳐다본 희수는 서재 한편에 놓인 소파로 가 앉았다. 그녀가 멋대로 소파에 자리 잡자 강준이 짜증스럽게 입매를 일그러뜨렸다.
“커피 한 잔 가져오라는데 앉긴 왜 앉아? 이제 당신까지 나한테 반항이야? 누구 덕에 이만큼 떵떵거리며 사는지도 모르고, 배가 불러서는.”
강준은 눈살을 있는 대로 찌푸리며 신경질을 부렸다. 젊었을 적 꽤나 잘생겼던 얼굴인데, 그의 기다란 눈매에 주름살이 자글자글해진 게 보였다.
한때는 저 남자를 사랑했다. 창창하던 배우 인생을 싸그리 접어도 좋을 만큼.
사랑이 그녀를 살게 한다고 믿어 왔다. 비록 제게는 허울뿐인 남편일지라도, 제 딸에게만큼은 든든한 아비라고 믿어 왔다.
추잡하게 일그러진 사랑이 착하기만 한 딸을 어떻게 말려 가는지도 모르고.
‘그동안 말 잘 듣는 착한 아이로 고분고분 조용히 살았던 거, 제가 은혜라도 갚으려는 줄 아셨어요? 당신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그랬던 거 아니에요. 엄마가 불쌍해서 그랬어요.’
‘근데 덕분에 오늘 정신이 번쩍 드네요. 아무래도 이렇게 사는 게 더 불쌍한 것 같아서요.’
따뜻하게 한 번 안아 줘 본 적도 없는 아비 주제에, 그런 아비의 손에 맞은 뺨이 시뻘겋게 부풀어 오른 아연의 얼굴을 보는 순간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눈앞이 명확해졌다.
빛바랜 추억 같은 옛 얼굴이 흐릿하게 겹쳐 보이는 강준을 물끄러미 보며 희수가 차분히 말했다.
“이리 와서 앉아요. 이야기 길어질 테니까.”
“누구보고 이래라저래라야? 당신 징징거리는 거나 듣고 앉아 있을 시간 없어.”
단호하게 고개를 내젓던 강준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목소리를 바꾸며 희수를 향해 검지를 펼치고 위아래로 흔들었다.
“아, 그리고 아연이 간수 좀 제대로 해. 생긴 건 예쁘장하게 잘 자라서 시집 잘 가겠다 하고 있었더니, 다 큰 여자애가 어디 아버지 앞에서 그딴 행패를 부려? 그 말 같지도 않은 협박은 또 뭐고. 하여간 모녀가 하나같이 성질머리가 불같아서는…….”
“협박 아니고, 진심인 것 같던데.”
“그러니까 당신이 당분간 잘 어르고 달래란 소리잖아. 용돈 두둑이 부쳐 줄 테니까. 조현물산과의 혼사는 무산이 되었으니 괜한 소문 뒤집어쓰는 건 아닐지도 걱정되고. 한동안 조용히 있다가 내년쯤 해서 다시 괜찮은 자리로 알아볼 거야.”
조금 전 자신의 딸에게 우악스러운 손찌검을 하고도 반성의 기미라곤 찾아볼 수 없는 강준의 태연한 얼굴을 희수는 말없이 바라보았다. 마치 처음 보는 사람인 것처럼.
“조현물산은 됐어. 조금 아깝긴 하지만……. 아연이 녀석 얼굴에 홀려서 자기들한테 달라고 줄 선 놈들이 한둘이 아니야. 그중에서 적당한 놈으로 또 고르면 돼.”
“내 이름으로 된 당신 차명 계좌 말이에요. 차명 계좌로 정치 자금을 수수한다고 소문이 나면, 곤란하지 않을까?”
희수의 말에 제자리를 빙빙 맴돌던 강준의 발이 우뚝 멈추었다. 그가 허옇게 경직된 얼굴을 천천히 들어 희수를 마주 보았다.
“이 정도면 나랑 이야기할 마음이 들어요? 당신 좋아하는 우아한 말로 할 때…….”
희수는 고상한 얼굴로 명령했다.
“이리 와서 앉아.”
* * *
“연고는 하루 세 번 바르시는데, 혹시 따갑거나 하면 더 자주 발라 주셔도 돼요. 그리고 붓기는 틈틈이 얼음찜질하시면 금방 가라앉을 거예요.”
“네. 감사합니다.”
아연은 약국 카운터 위로 카드를 내밀었다. 직원이 계산을 마치고 봉투에 넣은 연고를 함께 건네주었다.
좀 전에 갔던 병원에서는 아연의 퉁퉁 부은 뺨과 귓가를 확인한 의사가 데이트 폭력이나 가정 폭력을 당하고 있는 건 아닌지 집요하게 캐물었다. 따지고 보면 가정 폭력이 맞으니,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약국에서 나온 아연은 다시 택시를 잡아탔다. 근래에는 비교적 버스를 많이 이용하는 편이었지만, 오늘만큼은 정신적으로 너무 피곤하다는 핑계를 대면서 좌석 시트에 깊숙이 몸을 기대었다.
“도착했습니다.”
집에 도착했다는 택시 기사의 안내가 오늘처럼 반가운 적이 있었나?
얼른 집으로 들어가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고 얼음찜질이나 좀 하다가 포근한 이불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요금을 치르는 아연의 손이 조금 다급해졌다.
“감사합니다.”
택시에서 내려 문을 닫고 몸을 돌리던 아연이 우뚝 멈추어 섰다.
흐드러진 배롱나무 아래에 누군가 서 있었다. 어제는 보이지 않던 커다란 인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