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제 쪽으로 떨어지던 손바닥을 아연이 대신 가로막자 희수가 비명을 질렀다. 짧은 파열음이 울리고, 아연의 머리카락이 얼굴 위로 흘러내리며 커튼처럼 드리워졌다.
아연이 튀어나올 줄은 몰랐는지 강준도 놀란 얼굴로 자신의 손을 회수했다. 당황한 아버지의 얼굴을 아연은 물끄러미 응시하며 차분하게 말했다.
“한강준 의원 딸이라는 거 한 번도 좋았던 적 없어요. 오히려 지긋지긋했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끌어안고 사시느라 그렇게 전전긍긍하실 거 없어요. 저도 더 이상은 이렇게 살기 싫으니까.”
아연의 말에 강준이 어깨를 씨근덕거렸다.
“이, 이렇게 살기 싫다니, 너 그게 무슨 말이야.”
아연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드러난 귓가 전체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여기서 나가는 대로 병원에 가서 진단서 끊을 거예요. 뺨에 한 대, 귀에 한 대. 아버지한테 맞은 이쪽 귀는 지금 잘 안 들리는 것 같은데, 아마 고막에 문제가 생겼는지도요.”
아버지, 라는 말을 발음하는데 가슴이 욱신거렸다. 이제껏 단 한 번도 그를 아버지라는 말로 불러 본 적이 없었다. 어려서는 호칭을 얼버무렸고 커서는 의원님이라고 불렀다.
강준은 아연이 저를 난생처음으로 아버지라고 부른 것도 의식하지 못하고 그저 허옇게 질린 얼굴로 말을 더듬거렸다.
“뭐, 뭐?”
“그렇게 좋아하시는 명예라도 지키고 싶으시면 저한테 더 이상 아무것도 기대하지 마세요. 앞으로는 당신 얼굴 안 보고 싶다는 이야기예요. 고상한 국회의원이 사실은 다 큰 딸한테 손찌검이나 하는 폭력범, 이라고 언론에 나고 싶진 않으실 거잖아요.”
“너, 너 감히 키워 준 은혜도 모르고, 지금 나를 협박하는 거냐?”
“그동안 말 잘 듣는 착한 아이로 고분고분 조용히 살았던 거, 제가 은혜라도 갚으려는 줄 아셨어요? 당신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그랬던 거 아니에요. 엄마가 불쌍해서 그랬어요.”
희수가 두 손을 들어 입을 가렸다.
“근데 덕분에 오늘 정신이 번쩍 드네요. 아무래도 이렇게 사는 게 더 불쌍한 것 같아서요.”
“이 녀석이……!”
아연의 말에 강준이 가슴을 거세게 들썩거렸다. 습관처럼 다시 손이 높이 올라갔다. 그러자 희수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며 아연을 향해 날카롭게 외쳤다.
“아연이 너! 아버지한테 그게 무슨 돼먹지 못한 말이야.”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높이 들린 강준의 손을 쏘아보았다.
“당신도 그만해요. 너무 흥분했어요.”
강준이 주먹을 쥐며 손을 내렸다.
“아연이 넌 이만 가. 아버지랑은 다음에 다시 얘기하는 게 좋겠다.”
“아니. 다음에 다시 볼 일 없을 거예요. 아버지란 사람 보는 일도, 내가 다시 여기 올 일도 없을 거니까.”
아연은 양어깨를 감싸는 희수의 손을 차분하게 물리쳤다. 그리고 성질을 진정시키려 씩씩거리는 강준을 향해 말했다.
“말해 두지만, 카페랑 집은 안 돌려드릴 거예요. 그냥 양육비라고 생각하세요.”
얼빠진 얼굴로 입술을 벌리는 강준을 남겨 두고, 아연은 서재를 떠났다.
* * *
“아연이 너, 귀 안 들린다는 거 정말이야?”
계단을 내려가던 아연이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그녀를 따라 서재에서 나온 희수가 계단참에 서 있었다. 희수의 시선이 아연의 붉어진 뺨과 귓가를 맴돌았다.
희수 또한 아연의 진단서 타령을 제법 진지하게 들은 모양이었다. 반쯤은 위악을 부린 것뿐인데, 이 정도면 아버지란 작자도 꽤 겁을 집어먹었을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고상한 국회의원 직함에 누가 될 만한 짓은 절대 하지 않을 겁 많은 인간이니까. 애초에 그런 사람이 희수와의 중혼 생활은 어찌 감행했는지 모를 일이지만…….
아마도 불같은 사랑이 있었으리라. 그러니 희수 역시 이제까지 그에 대한 미련을 놓지 못하고 살았을 것이다. 스스로의 눈을 가리고, 그가 아연에게 쓰는 돈의 규모를 사랑의 흔적이라고 여기면서.
잠시 담담한 눈길로 희수를 올려다보던 아연이 침착하게 말했다.
“아니야. 잘 들려. 그냥 겁먹으라고 한 말이었어요.”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쉰 희수가 잠깐 사이에 10년은 늙어 버린 듯한 어두운 얼굴로 물었다.
“아까 아버지한테 한 말, 다신 안 보겠다는 거…… 진심이니?”
아연과 희수의 시선이 마주쳤다. 희수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응. 진심이야. 다신 여기 안 오겠다는 말도.”
“…….”
“지긋지긋해.”
쐐기를 박듯 한 마디를 더한 아연은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렸다. 다시 계단을 걸어 내려가는데 흐릿하게 가늘어진 음성이 아연을 불렀다.
“한아연.”
아연은 돌아보지 않았다.
“누가 뭐래도 넌 한강준 의원의 유일하고 고귀한 딸이야.”
“…….”
“너 하나만큼은, 남부럽지 않게 살게 할 거야.”
자기 자신에게 하는 다짐인 것처럼 희수는 자그맣게 읊조렸다.
지독한 피로감을 떨치듯 아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현관에 다다를 때까지 끝내 돌아보지 않았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깊은 늪에서 빠져나온 것처럼 막혔던 숨이 탁 터져 나왔다.
아연은 눈을 들었다. 푸른 하늘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청명하기만 했다.
* * *
“원장님, 기 사장님이 찾아오셨어요. 급한 일이신 것 같은데…….”
원장실의 문을 빼꼼히 연 직원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책상에 두꺼운 서적을 펼쳐 놓고 들여다보던 지연이 고개를 들었다.
동시에 문밖에서 들려오는 요란한 소란에 지연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들여보내라는 허락이 떨어지기도 전에 직원의 몸을 밀치며 태준이 들이닥쳤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태준은 정신없이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머리를 밤새 부여잡고 있었던 것처럼 헝클어진 머리가 군데군데 뭉쳐 있고, 단추를 풀어 내린 셔츠는 엉망으로 구겨져 있었다. 어디서 밤샘이라도 한 듯한 모양새였다.
“괜찮으니 나가서 볼일 보세요.”
태준의 꼴사나운 모습을 아래위로 훑어 내린 지연이 직원을 향해 눈짓했다. 문을 닫아도 되나 하는 표정으로 눈치를 살피던 직원이 마지못해 문을 닫았다.
“병원엔 갑자기 무슨 일이야?”
지연은 책상 가까이 당겨 두었던 서적을 살짝 밀어내며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차분히 묻는 지연의 말에 태준은 어깨를 들썩거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신 지금 한가하게 책이나 보고 있을 때가 아니야! 당신 남편 인생이 지금 결딴나게 생겼다고!”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태준이 버럭 목소리를 높였다. 귀가 따갑다는 듯 눈살을 찌푸린 지연이 혀를 쯧 찼다.
“낯 뜨거운 짓거리 하지 말고 나가지 그래. 그 꼴은 또 뭐야. 가서 좀 씻고.”
권유를 가장한 명령이었다. 지연의 차가운 목소리에 잠시 움찔한 태준이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
“내가 지금 멀쩡한 꼴로 돌아다니게 생겼어? 당신 동생이 무슨 짓을 저지른 줄 알아? 그놈이 날 고발했어.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내 해임안을 놓고 임시 총회가 소집되었다고!”
지연은 잠잠한 얼굴로 안경을 벗어 책상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피로한 눈 앞머리를 지그시 눌렀다.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세간에서는 개인 병원을 운영하는 지연을 두고 그룹에서 완전히 분리된 삶을 산다고 여기고 있지만, 그룹의 대주주 중 하나로서 그 누구보다 빠른 정보통에 닿아 있는 그녀였다.
게다가 제 남편이란 작자와 연관된 소식인데 모르고 있을 리가.
오늘 오전 태준에 대한 고발장이 검찰에 접수되었다. 위장 회사 운영, 그리고 부정 청탁 및 금품 수수에 관한 혐의였다.
검찰 고발과 동시에 그룹에는 임시 총회 소집 안내가 발송되었다. 안건은 태강바이오의 대표이사, 기태준 사장의 해임.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 지속적으로 회사의 명예를 훼손하는 여론을 형성한 것을 포함해 언론에 그룹의 대외비성 정보를 유포한 바에 따른 해임안으로, 이제 약 한 시간 후면 총회가 시작될 터였다.
지연은 한숨을 쉬며 머리를 쓸어 넘기고 눈을 치켜떴다.
“목소리 낮춰. 그리고 알고 있어.”
“뭐? 알아? 아는데 지금 이렇게 여유 부리고 앉아 있단 말이야? 가서 회장님과 부회장님을 설득해야 한다고!”
태준이 제 분을 못 이겨 발을 쾅 굴렀다.
“내가 다 누구를 위해서 그런 짓을 벌였는데. 다 그룹을 위한 일이었다고! 그런데 이런 나를 내쫓으려 해? 어림도 없지. 당장 일어나서 따라 나와! 회장님만 내 편을 들어 주신다면 다른 놈들도 날 어떻게 하진 못할 거야.”
“회장님을 만나려거든 재주껏 알아서 해. 임시 총회에 참석하게 되면 난 당신 해임안에 찬성표를 던질 거니까.”
지연의 서늘한 말에 태준의 턱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차, 찬성? 찬성이라니, 당신 제정신이야?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당신 남편이라고! 17년 동안 당신 옆에서 당신 대신 그룹을 위해 몸 바쳐서 일해 온…….”
“눈치 없이 나대는 놈은 품어도, 날 쪽팔리게 하는 놈은 못 품어.”
지연은 침착한 얼굴로 냉정하게 쏘아붙였다. 눈치 없이 나대는 놈도, 쪽팔리게 하는 놈도 모두 한 사람을 가리키고 있었다.
“당신 애먼 곳에 정신 팔려 있는 거 눈치챈 지는 좀 됐는데, 솔직히 귀찮아서 내버려 뒀어. 병원 일로 바쁘기도 했고, 소심한 인간이라 사고를 치더라도 그 수준이라는 게 뻔할 줄 알았거든.”
“다, 당신까지 나한테 이러기야?”
“나잇값도 못 하고, 내 동생한테 자격지심 같은 거 갖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17년을 남편이랍시고 옆에 끼고 살았던 남자가 이런 한심한 놈이라는 게……. 내 낯이 다 뜨거워. 성현이 얼굴 보기 부끄러워서 임시 총회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던 참이었어. 근데 추잡한 당신 얼굴 보니까 가서 한 표 던지고 와야겠다는 생각이 드네.”
“이…… 망할 남매가 쌍으로……!”
“아, 그리고 이건 나중에 말하려고 했는데, 이왕 찾아왔으니까 지금 말할게. 우리 이혼해.”
지연은 대수롭지 않게 말을 마치고 책상에 내려 두었던 안경을 썼다. 원장실 중앙에 우두커니 서서 온몸을 부들거리던 태준이 돌연 그녀에게 달려들며 팔을 휘둘렀다.
“내가 순순히 이혼해 줄 것 같아?”
태준의 발작 같은 노성과 함께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명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