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0화 (60/96)

<60화>

17년 전 이곳 태강그룹에 발을 들인 이후, 태준은 단 하루도 그룹을 위해 살지 않은 날이 없었다.

매일 다섯 시간 이상 잔 적이 없고, 새벽 6시가 되기 전에 하루도 빠지지 않고 태송현으로 넘어가 문안 인사를 드렸다.

권 회장은 아침 식사를 하며 태준의 브리핑을 들었다. 안 듣는 것 같은 심드렁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도, 이따금 흘리듯이 던지는 질문이 귀신같이 정곡을 찌르는 것들이라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만성 위염은 그림자처럼 따라붙었고, 마흔이 되기 전부터 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했다. 죽을 것처럼 힘들었지만, 그래도 태준을 지금까지 버티게 한 건 그에 상응하는 보상이 따르리라는 합당한 믿음과 정당한 기대감이었다.

‘요즘 같은 시대는 남자 여자 따지지 않고 기업 활동을 하는 때라, 내가 큰손녀인 지연이에게 거는 기대가 컸다. 그런데 그 녀석은 회사 일엔 영 관심도 없고 소꿉장난 같은 병원 일에나 푹 빠져 있으니. 기 서방이 지연이 몫을 단단히 해내야지.’

지연의 몫.

그 말은 태준을 움직이게 하는 마법의 말이었다.

법정 상속도 남녀 따지지 않고 나누는 마당에, 무려 17년을 그룹에 봉사했으니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주어지리라 여겼건만.

고작 바이오라는 신생 사업 하나만 던져 주고는 먹고 떨어지라는 듯한 권씨 집안의 태도를, 태준은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낮에 들렀던 성현의 집무실과는 크기부터 어마어마하게 차이 나는 소박하기 짝이 없는 자신의 집무실을 둘러보며 태준은 다시금 분노에 겨워 몸을 떨었다.

누구는 17년을 몸을 갈아 넣고도 받지 못한 것을 처음부터 당연하다는 듯이 갖고 태어난 놈.

가진 게 너무 많아서 아쉬운 것도 없어 보이는 성현의 유유자적한 모습은 언제나 태준의 추잡한 질투심을 건드렸다. 권민환 회장의 말처럼 소꿉장난 같은 병원 놀이에 빠져 제 몫 챙길 줄도 모르는 미련한 제 아내를 바라볼 때마다 드는 감정과는 판이하게 다른 방향으로 그의 속마음을 마구 들쑤셨다.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모든 것을 누리는 성현이 얄밉고 괘씸하다가도, 앞으로도 계속 한량처럼 유유자적하게 살아가기를 바랐다. 자신이 시키는 대로, 제가 깔아 놓은 포석을 밟아 가면서.

그룹의 아름다운 화초 역할만 톡톡히 해 주면 그만일 테니까.

태준은 책상을 내리친 탓에 시뻘게진 손으로 책상 서랍을 열어 안에 들어 있던 사진을 꺼냈다.

이제 곧 이루어질 인생의 청사진을 다시금 되새기자 마음이 몹시 다급해졌다.

버만사의 중추가 되는 오일 사업권이 국제 분쟁에 얽히게 될 주요한 정보를 쥐고 있는 태준은 이 결혼이 모두 성사된 후에 문제가 터지도록 시기를 조정해 둔 상태였다.

흠결 없는 성현의 이력에 유일한 오점이 될 결혼. 그것을 이용해 그룹 내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권력의 방향을 제게 끌어올 계획이었다.

그런 사정을 알 리 없는 태송현이나 성현이 놈 입장에서도 이 혼사는 절대 손해 볼 만한 거래가 아니었다.

버만사의 고명딸 정도면 어디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주 훌륭한 혼처이지 않은가.

버만사 회장의 사생활이 지저분하기 짝이 없다는 성가신 소문이 빈번하게 들려오기는 했지만, 회장이랑 결혼하는 것도 아니고 그 딸인데 그게 다 무슨 상관이겠는가. 게다가 그 딸이라는 아가씨는 꽤 봐줄 만한 얼굴과 몸을 가지고 있었다.

정략결혼으로 이 정도면 감지덕지인 것을, 딱딱하다 못해 곧 부러질 기세인 성현의 태도에 태준은 울화통이 치밀었다.

“안 되겠어…….”

음산하게 중얼거리며 그는 손에 쥐고 있는 사진 끝을 긁어내렸다. 사진 표면에는 이미 손톱자국이 흉하게 나 있었다.

이대로는 불안해서 가만히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적당히 처리를 해 두었다고 생각했건만, 그것으론 부족하다는 느낌이 쎄하게 올라왔다.

자신이 꺼낸 이야기에 예민하게 눈을 치뜨고 딱 잘라 끊어 버리는 성현이 놈의 태도를 보아서는 아직 한심한 사랑 타령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기태준 사장님이 염려하시는, 그런 사이 아닙니다. 이 사진에 찍힌 모습까지 부정하지는 않겠지만, 과한 근심을 하실 정도의 깊은 사이가…….’

‘……더 말하지 않으셔도, 무슨 뜻인지 알고 있습니다. 걱정하실 일 없을 거예요.’

여우 같은 계집애의 약속만 믿고 있었다간 뒤통수를 맞을 공산이 컸다.

저러다가 대뜸 애라도 배고 나타나면 큰일이지…….

애라도 들어섰다가는 제 핏줄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권 회장이 그 계집애를 둘러싼 추문까지 품으려 들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추문이 있다고는 해도 태강에서 기를 쓰고 막는다면 막지 못할 일이 없을뿐더러, 어찌 됐든 대대로 국회의원을 지낸 뿌리 깊은 정계 인사 집안의 딸이다. 서류상으로도 문제가 없으니 어떻게든 품으려고 마음먹으면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것은 일도 아닐 터였다.

당장 오늘 밤 발 뻗고 잠도 못 잘 것처럼 신경이 바짝바짝 탔다. 태준은 버석하게 마른 입술을 혀로 훑으며 생각했다.

아무래도 추가 작업을 해 둬야겠어.

“안 실장, 들어와요.”

한 손으로는 여전히 사진 표면을 괴롭히면서 태준은 인터폰을 눌러 비서실장을 호출했다. 하지만 인터폰 너머에서 대답하는 것은 비서실장이 아닌 수행 비서의 목소리였다.

- 죄송합니다, 사장님. 안 실장님이 잠시 자리를 비웠습니다. 제가 들어가겠습니다.

예상 밖의 대답에 태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명색이 비서실장이라는 놈이 상사의 허락도 없이 멋대로 자리를 비우다니 황당한 일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골치 아픈 일로 짜증이 팍팍 나는 마당에 이젠 별게 다 신경을 건드리고 있었다.

“사장님, 부르셨습니까.”

태준은 고개를 들어 조심스럽게 묻는 수행 비서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나중에 안 실장이 오면 한마디 따끔하게 하더라도, 지금은 중요한 문제부터 해결하는 게 시급했다. 애써 짜증을 가라앉힌 태준이 빠른 속도로 지시를 내렸다.

“한강준 의원 쪽에 연락 넣어서 긴급하게 회동 일정 잡아 줘요. 사유를 물으면 한 의원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할 만한 언론 기사를 사전에 감지했다고 전해요. 자세한 건 보안상의 문제가 있으니 만나서 얘기하자고 하고.”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 사진, 한 장 더 마련해 오세요.”

태준이 손가락 사이에 끼워 든 사진의 표면이 사무실 조명을 받아 번뜩였다.

* * *

버스에서 내려선 아연은 자신도 모르게 버스 정류장의 유리에 비친 제 모습을 바라보았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넘겨 귀 뒤로 꽂다가 문득 그런 제 모습이 우스워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아연은 머리에서 손을 떼고 집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걸음걸이로 한 발, 한 발, 발을 옮길 때마다 두근두근 심장이 콩닥거리는 소리가 귀까지 들려왔다.

빌라 앞 화단에서 성현을 보게 된 이후로, 며칠 새 똑같은 퇴근길이 반복되었다. 첫날은 우연한 마주침이라고 생각했지만, 우연이 며칠 동안 이어질 리는 없었다.

대체 뭘 어쩌자는 건지.

이미 다 파탄 난 사이였다. 주변을 둘러싼 잡음은 차치하더라도, 그가 제게 저질렀던 지독한 짓거리와 자신이 그에게 쏟아 냈던 욕지거리, 악에 받친 주먹질로 관계의 바닥을 여실히 드러냈다.

산산이 깨어져서 도무지 이어 붙일 수 없을 정도로 조각조각 난 관계인데…….

어울리지도 않게 미련을 떠는 것도, 미련을 떨고 있는 주제에 뻔뻔할 만큼 아무렇지 않은 말끔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도, 그 뻔뻔한 얼굴마저 지나치게 잘생겼다는 것도, 아연으로서는 죄다 얄미운 일투성이었다.

몹시 신경 쓰이고 불편했지만, 딱히 그 이상의 부딪침은 없었다. 차라리 성현이 다가와 말이라도 걸어온다면 그러지 말라고 냉정하게 말했을 테지만, 제집 앞에서 제 시간 들여서 서성거린다는데 무슨 자격으로 그걸 금지한단 말인가.

그저 모르는 사람인 듯, 혹은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빠르게 옆을 지나갈 뿐이지만, 기가 막히게도 스치듯 본 그의 모습이 새겨지듯이 뇌리에 남아 하루 종일 머리를 맴돌았다.

어쩌면 그 짧은 순간의 마주침을 저 또한 기다리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아연은 고개를 숙인 채로 붉은색 벽돌을 밟으며 걸었다. 그리고 빌라 앞에 다다라 살며시 얼굴을 들었다.

분홍색 꽃잎이 산들산들 흔들거렸다. 배롱나무의 은은한 향기가 미지근한 바람을 타고 불어와 코끝을 간지럽혔다.

모든 건 어제와 똑같은데, 배롱나무 아래는 텅 비어 있었다.

어째서 고작 이런 걸로 가슴이 서늘해지는 건지.

그런 자신이 한심했지만, 흔들리는 눈망울을 숨길 수는 없었다.

잠시 멈칫했던 아연은 금세 담담해진 얼굴로 다시 걸음을 떼었다. 빌라 안으로 들어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기다리는데,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아아, 정말 이사 갈까…….”

아연은 차가운 벽에 지친 어깨를 툭 기대었다. 입술 끝에 쓰디쓴 미소가 스치고 있었다.

* * *

“그, 그럼 이만 저는 가 보겠습니다, 본부장님.”

안 실장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움직여 문으로 향했다. 한시라도 빨리 이 공간을 벗어나고 싶었다. 등으로 쏟아지는 시선에 몸이 꿰뚫리는 것 같았다.

단독으로 성현을 마주하는 게 처음은 아니었다. 안 실장은 기태준 사장을 모시는 최측근으로서 공적인 자리뿐만 아니라 태송현에서의 가족 모임을 보좌하는 경우가 잦았기 때문에 성현과도 수없이 마주쳤었다.

그러나 그동안 자신이 만났던 권성현이라는 인간은 모두 거짓이었던 것처럼, 오늘 만난 남자는 평소와 너무도 달랐다.

목소리 하나 높이지 않고 날카롭게 바라보는 눈빛에 푸른 날이 서 있었다. 칼날 위에 발끝으로 서 있는 것 같은 긴장감으로 오금이 저릴 지경이었다.

자신이 성현을 만났다는 사실을 기태준 사장이 나중에 알아차리면 분명 방방 날뛰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권성현은 먹이사슬의 최정점에 위치한 맹수 같았다. 당장은 여기서 살아서 나가야 하지 않겠나.

안 실장은 목덜미를 물어뜯긴 먹잇감처럼 흔적만 남겨 둔 채 도망치듯이 떠났다.

넓은 집무실에는 성현만이 남았다. 그는 책상 위에 흩어진 종이와 사진 몇 장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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