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충격으로 흐려진 눈을 든 재호가 말끝을 흐렸다.
지금 그의 맞은편에 느슨하게 등을 기대고 앉아 있는 남자는 마음만 먹으면 세상의 모든 정보를 당연하게 가져올 수 있을 터였다.
태강그룹의 권성현이 이 정보를 과연 어떻게 캐냈는지 묻는 것은 양쪽 모두에게 무의미했다. 그가 이것을 구실로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는지가 본론에 가까울 것이다.
머릿속으로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재호는 정처 없이 떨리는 눈을 세게 치떴다.
“이걸 제게 보여 주는 의도가 뭡니까?”
“그걸 이제부터 좀 말해 볼까 합니다.”
재호가 이곳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성현이 소파에 기대었던 상체를 똑바로 세웠다. 재호는 저도 모르게 그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긴장감에 잠식된 머리가 혼미해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눈앞에 있는 남자의 무표정한 얼굴은 소문처럼 아름다웠다.
* * *
재호가 허둥거리며 집무실을 떠난 뒤, 성현은 소파에 등을 기대고 머리를 젖혔다. 습관적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던 그는 팔을 뚝 떨어뜨리고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맞은편 소파에 앉아서 진땀을 흘리던 멍청한 얼굴을 몇 대 후려치고 싶은 충동을 몇 번이고 참아야 했다.
걸레같이 더러운 몸으로 감히 누굴 넘봐.
음흉한 눈알로 한아연을 바라보고, 제깟 놈이 언감생심 한아연의 남편이 되리라고 잠시나마 부푼 꿈을 꾸었을 걸 생각하니 속이 뒤집어졌다. 심지어 넙데데한 낯짝이 못생기기까지 해서 기분이 더 더러웠다.
……씨발. 어떻게 날 버리고 저딴 놈이랑 결혼할 생각을 해.
한아연의 비위가 이렇게 강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성현은 손을 들어 피로한 눈 앞머리를 꾹 누르며 허탈한 실소를 흘렸다.
지난 보름, 잠을 자도 자는 것 같지 않고, 깨어 있어도 깨어 있는 것 같지 않은 시간이었다.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아연의 모습은 환영처럼 제게서 사라지지 않았다. 한아연을 보지 못해서 겪는 금단 증상은 그를 속속들이 무너뜨렸다.
‘미안해. 내 잘못이야. 내가 우릴 다 망쳐 놓은 것 같아.’
아연의 입에서 나온 그 어떤 잔인한 말보다 끝내 그를 밀어내는 데 성공한 것은, 고작 그따위 사과였다.
네가 우릴 다 망가뜨렸다고.
속죄하듯 털어놓은 그녀의 자책은 성현을 올가미처럼 죄어 꼼짝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아니. 우릴 망가뜨린 건 나야.
친구니 뭐니 헛소리를 늘어놓았던 것도, 아연이 제 부모로부터 어떤 압박을 받고 있는지 짐작하면서도 순간에 젖어 허무하게 시간을 흘려보낸 것도 모두 멍청한 그 자신이었다.
발정 난 개새끼처럼 굴면서 아깝게 허비할 시간에 처음부터 제 감정을 직시했더라면……. 매일같이 뼈저리는 후회로 가슴이 저며 들었다.
제게서 등을 돌리고 가늘게 떨던 작은 어깨가 머리에 새겨져서 온종일 떠나지 않았다. 심장이 조각조각 떨어져 나가 다시는 정상적으로 뛸 것 같지가 않았다.
아연에게서 제 인생에서 꺼지란 말을 듣기는 했지만 정말로 꺼져 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말 잘 듣는 한아연의 개새끼답게 적어도 잠시 꺼진 척이라도 해 주려고 했는데,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영혼이 빠져나간 시체 같은 꼴로 일에나 몰두한답시고 여기저기서 불러 대는 대로 몸을 바쁘게 움직였다. 그러나 정신은 여전히 한아연의 곁에 머물러 있는 것만 같았다.
결국 며칠 전부터는 허기를 참지 못한 하이에나처럼 빌라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지나가는 한아연의 그림자라도 스치듯 보고 싶어서, 그렇게 우연을 가장해서라도 한번 눈에 담고 싶어서.
할 일도 없는 놈처럼 같은 자리에 멍청히 서서 한없이 서성거린 것을, 너는 알까.
피우지도 않을 담배에 몇 번이나 불을 붙이고, 빨간 불씨가 서서히 타들어 가는 것을 멍하니 지켜보는 시간이 하나도 지루하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핸드폰을 들어 한아연이 지금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는지, 주변에 심어 놓은 눈과 귀를 통해 전해 들으면 하지 않아도 될 짓이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카페에서 커피를 내리고 있을 한아연. 손님을 향해서 그 햇살처럼 눈부신 미소로 웃어 주는 한아연. 카페 불을 끄고 그 어둑한 공간에서 차분한 걸음으로 걸어 나올 한아연.
그런 아연을 상상하다 보면, 시간이 지나가는 줄도 모르게 날듯이 흘러갔다.
그리고 비로소 제 쪽으로 천천히 걸어오는 아연을 발견했을 때, 멈추었던 심장이 다시 뛰는 것 같은 까마득한 환희가 머리 꼭대기에서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색을 고이 담아 놓은 듯 연하게 반짝거리는 눈동자와 그 안에 일렁거리는 수천 개의 감정들.
시선이 마주친 순간, 보잘것없이 빌빌거리던 시간이 오롯이 보상되는 기분이었다.
일생의 남은 시간을 모두 가져다 바쳐서 아연을 기다리고 싶었다.
받아 주기만 한다면.
안 받아 주니까 문제지만…….
애가 끓는 그의 시선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찬바람을 날리며 지나가 버리는 아연의 모습마저도 기꺼웠다. 당장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지거나 무릎이라도 꿇으며 질척거리고 싶은 마음이 들불처럼 치솟았지만 성현은 간신히 참아 넘겼다.
괜히 나대서 아연이 대뜸 이사라도 가 버리면 곤란한 일이었다.
물론 어디로 가든 지구 끝까지 쫓아갈 테지만.
저 몰래 이딴 짓을 꾸민 것을 알면 화를 내려나?
성현은 소파에 기댄 채 고개만 틀어 집무실 구석에 놓인 세절기를 쳐다보았다.
재호는 성현과의 대화가 끝난 후 증거를 인멸한답시고 서류를 철에서 빼서 직접 세절기에 집어넣었다. 그게 원본일 거라고 철석같이 믿는 멍청함이 안쓰러울 지경이었으나, 그냥 그렇게 생각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비록 한아연의 인생에서 잠시 퇴장 명령을 받은 신세로 전락했지만, 아연의 주변에 그딴 질 나쁜 놈이 얼쩡거리게 내버려 둘 순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고집 센 한아연을 설득해서 제게 돌려놓을 작정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주변 청소부터 깨끗이 해야 했다.
성현은 창가로 다가가 김 실장을 호출했다. 오래 지나지 않아 김 실장이 안경을 추켜올리며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네, 본부장님. 부르셨습니까.”
“기태준 사장 최근 동선 파악해서 보고해 주세요. 기태준 사장이 홍콩의 버만사와 나를 갖다 붙이려는 의도는 김 실장님도 아실 겁니다. 그걸 미끼로 무슨 거래가 오가고 있는지, 관계 구축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기태준 사장이 발을 걸치고 있는 언론사 쪽도 확인해 보시고요.”
김 실장은 수첩에 성현의 지시 사항을 빠르게 적어 내리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해당 언론사는 기태준 사장이 위장 운영 중이라는 직접 증거를 이미 확보한 상태입니다.”
줄곧 성현에 관한 악의적인 기사를 생산해 내던 언론사와 태준의 연결고리는 진작부터 그물망에 들어와 있었다.
성현의 입지가 강화되면서 궁지에 몰린 그가 기어이 권민환 회장에 대한 대외비성 정보를 언론에 흘림으로써 물고 물려 있는 회로가 걸려들었고, 언제라도 고발이 가능한 상황이었다.
성현의 지시로 조사와 정황 포착, 근거 확보까지 마친 김 실장으로서는 그 언론사가 써 재낀 기사를 읽는 것만으로도 속이 답답해지고 피가 부글부글 끓을 지경인데, 정작 당사자인 성현은 그다지 신경 쓰지도 않는 기색이었다.
멘탈이 세다고 해야 할지, 무신경하다고 해야 할지…….
성현을 지척에서 모시는 김 실장이었지만, 여전히 제 상사의 속마음을 완전히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성현이 기태준 사장과는 가족 관계로 얽혀 있기 때문에 결단을 미루는 것은 아닐까 짐작만 할 뿐이었다.
김 실장은 눈을 흘끗 들어 창문을 향해 선 너른 등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기태준 사장이 한아연과 접촉한 정황이 있는지. 있다면 무슨 말을 했는지.”
갑자기 튀어나온 예상 밖의 이름에 김 실장의 미간이 좁아졌다. 동시에 수첩 위를 오가던 펜의 움직임도 멈추었다.
“토씨 하나 빠짐없이 알아야겠는데.”
성현이 몸을 돌려 김 실장을 마주 보았다. 역광을 받아 그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필요하다면 내가 직접 물을 테니, 안 실장이라고 했나요? 기태준 사장의 비서실장, 조용히 불러오세요.”
보이는 것은 그의 실루엣뿐인데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 때문인지 살벌한 표정이 절로 그려졌다. 김 실장은 자신도 모르게 긴장감에 허리를 곧추세웠다.
“알겠습니다, 본부장님.”
* * *
태준은 벌써 몇 바퀴째 책상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성현과의 대화를 곱씹을수록 머릿속을 휘젓는 불안감이 거세어졌다.
‘이쯤 되면 왜 이렇게 날 그쪽이랑 엮어 주지 못해 안달이 나셨는지 순수한 호기심이 드는데, 일이 성사되면 버만에서 지분이라도 챙겨 준답니까?’
‘사장님의 야욕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말씀하시죠.’
‘바깥으로 모셔요.’
태준은 어느새 자리에 멈춰 서서 혀를 쯧 찼다.
“싸가지 없는 새끼…….”
성현이 놈의 일방적인 퇴짜로 홍콩에서의 만남이 무산된 탓에 자존심이 상한 버만 회장을 다시 설득하느라 얼마나 각고의 노력을 쏟아부었는지 모른다.
그나마 전대 회장의 와이프가 태준의 먼 친척인지라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동안의 작업이 얄짤 없이 수포로 돌아갈 뻔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스케줄을 쪼개고 쪼개 지난 2주간 홍콩을 세 번이나 왔다 갔다 하면서, 이른바 삼고초려 끝에 다시 회장의 마음을 돌릴 수 있었다.
저를 위해 매형이란 사람이 이렇게 물 건너까지 발로 뛰어다니며 좋은 혼처를 물색해 코앞에 물어 와 주는데, 고맙다고 절을 받지는 못할망정 중간에 문전 박대를 당하다니.
태준은 분노로 부들거리는 주먹을 꽉 쥐고 중얼거렸다.
“어린놈의 새끼가…… 어디서 배워 먹은 싸가지인지. 그 핏줄은 어째 하나같이 다 싹수가 없어서는……. 인생에 도움 되는 게 하나도 없어.”
흉흉한 눈빛을 희번덕거리며 책상에 앉은 태준은 치미는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꽉 쥔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