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7화 (57/96)

<57화>

“제가 친구한테 들었는데 배달 앱에 등록하는 거 하나도 안 어렵대요. 저 길 건너 카페 보니까 낮 시간에 인근 회사로 커피 엄청나게 조달하는 것 같던데 우리도 질 수 없잖아요, 사장님!”

아연의 카페보다 한 달 늦게 문을 연 길 건너의 카페를 의식하며 규영이 경쟁심으로 이글이글해진 눈을 치떴다. 사장보다 더 적극적인 모습에 웃음이 피식 터졌다. 하지만 어째선지 대답이 흔쾌하게 나오지가 않았다.

혹시 권성현네 회사에서 주문이라도 오면 어떡하지…….

무심코 떠오른 생각에 퍼뜩 낯이 굳어졌다. 몸을 사리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 그 회사에 직원이 한두 명도 아니고, 빌딩 하나가 다 태강그룹 소유인데 무슨 말도 안 되는…….

그야말로 과도한 염려였다. 누가 제 생각을 들여다보는 것도 아닌데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창피하고 한심해서 아연은 괜스레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다.

“어? 규영 씨, 사장님께 말씀드린 거예요? 배달? 사장님, 저도 찬성입니다.”

진열대를 정리하던 민재가 허리를 펴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연은 고개를 돌려 민재를 바라보았다.

지금은 괜찮아졌지만, 얼마간은 민재를 볼 때마다 기분이 이상했다. 그와 껴안고 있는 것처럼 찍혔던 사진이 무심결에 계속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런 사진이 찍혔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만큼, 민재 또한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터였다.

대체 언제부터 주변을 맴돌며 그런 절묘한 사진을 찍을 만한 타이밍이 오기를 재고 있었던 걸까.

자연히 뻗어 가는 생각을 아연은 의식적으로 떨쳐 냈다. 어차피 이제는 모두 끝난 일이었다.

“아무래도 요새 매출이 너무 떨어졌잖아요. 배달이라도 해야지. 원래 카페는 한여름 장사가 다라고 해도 좋을 만큼 지금이 성수기인데, 어째 우리는 점점 손님이 줄어…….”

민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연의 옆에서 규영이 민재를 향해 검지를 입술 위에 가져다 댔다가 손날로 목을 치는 제스처를 번갈아 하며 허둥거리는 게 느껴졌다.

뒤늦게 그런 규영을 발견한 민재가 급격히 말꼬리를 줄이고는 다시 허리를 숙였다. 진열대를 정리하는가 싶더니, 불쑥 고개를 든 민재가 갑자기 생각이 났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까 요즘은 왜 사장님 그 잘생긴 친구분은 카페에 안 오세요?”

규영이 경악한 얼굴로 눈살을 찌푸렸다. 민재를 향해 닥치라는 뜻의 험상궂은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아연을 향해 있는 민재의 시선에는 규영의 소리 없는 간절한 외침이 보이지 않는지 눈치 없는 소리를 이어 갔다.

“사실…… 전 두 분이 사귀시는 줄 알았거든요. 왜, 저번에 회식하고 제가 사장님 댁까지 바래다 드렸을 때 빌라 앞에서 친구분 마주쳤잖아요. 근데 그때 절 보는 그분 눈빛이 왠지 살기가 느껴져서…….”

“민재 씨! 지금 화장실 청소할 시간 아니에요?”

결국 규영이 민재의 말을 끊고 끼어들었다.

“화장실이요? 아까 한 시간 전에 청소했는데…….”

“한 시간에 한 번씩 최소한 점검은 해야죠. 가서 괜찮은지 보고 오세요.”

규영은 이를 악물고 눈을 부릅뜬 채 말했다.

“어차피 손님도 별로 없어서 화장실도 깨끗할 것 같은데요……. 뭐, 아무튼 확인하고 올게요.”

민재가 작게 구시렁거리며 화장실로 사라졌다.

“아, 테이블도 좀 닦고 와야겠다.”

규영이 진땀을 흘리며 카운터에서 빠져나갔다. 어색한 분위기로 끝난 대화에 아연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렇게 눈치 없는 민재도 성현과 자신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기색을 느꼈을 정도로 어지간히 티가 났던 모양이다.

그렇게 마음이 허술하게 풀려서는…….

아연은 입술을 깨물고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막 카페로 들어오는 손님을 향해 밝게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세요.”

이 정도의 후유증은 견딜 만하다고 생각했다. 마음의 텅 빈 구멍은 시간이 흐르면 이내 메워지기 마련일 테니까.

* * *

“사장님, 그럼 저 먼저 들어가 볼게요.”

탈의실에서 짐을 챙겨 나온 규영이 고개를 꾸벅 숙이며 아연에게 인사했다. 카페 오픈 시간을 맡았던 민재가 해가 지기 전 먼저 퇴근한 후였다. 인근 회사의 퇴근 시간을 넘긴 이후로는 드나드는 손님도 부쩍 뜸해졌다.

“조심히 들어가요, 규영 씨.”

“네. 내일 뵐게요. 사장님도 얼른 들어가세요오.”

카페를 며칠 쉬었다 나온 후로는 아연이 마감을 도맡아 하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사장이 거의 연락 두절 되었던 상황에서 고생했을 직원들한테 미안한 마음도 있었지만, 카페에서 몸을 바쁘게 움직이는 편이 정신 건강에도 훨씬 나았기 때문이다.

어차피 집에 가 봐야 쓸데없는 생각으로 머리만 복잡해질 뿐이니까.

성현이 어떻게 말을 해 두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카페 직원들은 아연이 진짜 여름 감기를 호되게 앓은 것으로 알고 있었다. 며칠 만에 파리해진 낯으로 나타난 아연을 보고는 의심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아팠던 사람을 남겨 두고 먼저 가는 게 마음이 쓰이는지, 퇴근할 때마다 미적거리는 규영의 등을 떠밀어 가게 밖으로 내쫓은 아연은 가게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시럽과 파우더 통, 빨대 통의 비어 있는 부분을 가득가득 채워 놓고, 쓰레기통을 비운 후 매장을 청소했다. 바닥과 테이블 위는 규영이 퇴근하기 전엔 한 번씩 닦아 놓고 간 터라 아연은 흐트러진 테이블과 의자만 정리하는 정도로 끝내고 카운터로 돌아왔다.

진열대와 냉동실의 재고를 파악하고, 하루 매출 정산을 할 때쯤엔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에스프레소 기계 청소까지 마치고 나자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문단속을 하고 카페를 나서며 습관처럼 택시를 잡으려던 아연은 마음을 바꿔 큰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매출을 확인했을 때의 숙연한 기분을 떠올리니 발이 자연스레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정류장 쪽으로 걷던 아연이 우뚝 멈춰 섰다. 길가에 서 있는 커다란 세단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마침 성현의 회사 건물 근처를 지나던 길이었다.

바닥에 풀이라도 발라 놓은 것처럼 떨어지지 않는 발을 머뭇거리고 있는데, 세단의 운전석 문이 벌컥 열리더니 낯선 남자가 튀어나왔다.

아연은 남자가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역시 처음 보는 얼굴의 남자가 건물 입구에서 차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하아…….”

이게 뭐 하는 짓이람.

아연은 한숨을 내쉬며 걸음을 빨리했다. 버스 정류장에 가까워지자 그녀가 타야 할 버스가 저만치에서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종종걸음으로 정류장까지 도착해 버스에 오르니, 늦은 밤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로 버스 안은 북적거리고 있었다. 그나마 한적한 공간을 찾아 손잡이를 꼭 붙잡고 흔들거리는 버스의 진동에 몸을 맡겼다.

권성현을 이토록 오래도록 보지 않은 것은, 그가 카투사에 복무했던 때와 유학을 갔던 때를 제외하고는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기분이 이상했다. 아마도 마음의 깊이가 달라졌기 때문이겠지.

언젠가는 다시 만나게 되리라는 것을 알던 그때와는 달리, 지금은 성현이 없는 일상에 익숙해져야 하는 때였다.

권성현이 없는 한아연.

커다란 살점 하나가 뚝 떨어져 나간 것처럼 가슴 언저리가 욱신거리고 허전했다. 하지만 아연은 애써 스스로를 다독였다. 상처 위에 새살이 돋듯 곧 괜찮아지리라고.

그가 날카로운 가시처럼 제게 깊숙이 박혀 있었던 만큼, 이 아픔을 회복하는 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필요할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깊은 흉터로 남아 평생 사라지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

버스에서 내려 느릿느릿 빌라를 향해 걷던 아연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서늘한 바람이 가슴을 관통하고 지나갔다.

빌라의 화단 앞 흡연 구역에 성현이 서 있었다.

꽃이 흐드러진 배롱나무 아래에 삐딱하게 서 있는 모습이 마치 환영 같았다. 몇 번이고 그런 환영을 그려 본 적이 있었기에 이번에도 그런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입술 사이에 끼우고 있던 담배를 내리고 길게 숨을 내뱉는 성현의 모습이 너무도 정교해서 자신도 모르게 시선이 묶인 것처럼 붙들렸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아연은 그가 환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뜻을 알 수 없는 눈동자가 지척에서 마주 보는 것처럼 그녀를 통째로 사로잡았다.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새까만 동공이.

회사에서 퇴근하던 길에 잠깐 머물던 중이었는지, 성현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완벽한 슈트 차림이었다.

빠져나온 머리카락 한 올 없이 깔끔하게 쓸어 올린 헤어스타일과 강직한 턱선, 무표정한 표정은 마지막으로 보았던 날 위태롭게 망가진 것 같던 모습과는 달리 단정하기만 했다.

그는 타이 없이 드레스 셔츠의 단추를 몇 개 풀어 헤친 채였다. 보통은 셔츠의 단추를 목 끝까지 채우고 있다가 집에 와서야 타이를 풀어내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 성현이 보이는 유일하게 풀어진 모습이었다.

한때는 외출했다 돌아온 성현이 옷을 하나하나 벗는 걸 바라보는 순간을 좋아했다. 제일 먼저 시계와 커프스링크를 풀어서 툭 던지듯 내려놓고, 손목의 단추를 풀고, 마지막으로 타이를 끌어 내릴 때면 아연은 무심결에 입술을 깨물곤 했었다.

그때 성현이 다시 담배를 입으로 가져가 길게 빨아들였다.

아연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렸다. 다신 눈앞에 띄지 말라고 갖은 위악을 다 부려 놓고선 어느새 홀린 것처럼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니.

바보 같아.

처음 며칠은 빌라를 오가며 성현과 마주치기라도 할까 봐 잔뜩 경계했었다. 그런데 의외로 지금껏 줄곧 보이지 않았기에 조금 안심하던 참이었다. 저도 불편할 테니 어쩌면 본가로 옮겼을 수도 있겠다, 그런 생각도 했었다.

본가로 들어가지는 않았나 보네.

무심코 이어진 생각에 아연은 작게 눈썹을 찌푸렸다.

그런 게 이제 나랑 무슨 상관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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