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5화 (55/96)

<55화>

아연은 침대 시트를 꽉 움켜쥐고 몸을 벌떡 일으켰다. 오랜 시간 사로잡혀 있었던 온몸의 근육들이 곳곳에서 비명을 질러 댔다.

일어나야 한다는 생각으로 아연은 이를 악물고 발끝에 힘을 주었다. 힘겹게 침대에서 내려서니 두 다리가 맥없이 휘청거렸다.

밤새 들러붙어 있던 성현은 보이지 않았다. 할 만큼 했으니 질려서 가 버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니,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지만, 도무지 그럴 놈 같지가 않았다.

주변이 조용한 게 더 불안했다. 잠시 사라진 거라면 이 틈을 타서 문단속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아연은 문으로 향했다. 걸음을 갓 배운 새끼 사슴처럼 후들거리는 걸음을 내디뎠다.

달칵.

방문을 여는 순간, 숨이 멈추었다.

“…….”

문 앞에 성현이 서 있었다. 사신을 만난 것처럼 온몸이 굳어졌다. 발가벗은 채로 문간에 서 있는 아연을 훑어 내린 그가 못마땅한 듯이 눈매를 좁혔다.

“누워 있지. 그 몸으로 어딜 가려고.”

집요한 시선이 가슴 끝에 닿았다. 밤새 그에게 빨리고 괴롭힘당한 젖꼭지가 찌르르 울렸다. 아연은 손을 끌어다 가슴을 가리며 이를 악문 채로 말했다.

“할 만큼 했으니 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더 뻔뻔하네.”

“내가 널 두고 갈 리 없잖아. 들어가. 뭐 좀 먹어야지.”

성현이 손에 든 접시 위에는 죽이 든 그릇이 놓여 있었다. 고소한 냄새가 은근하게 후각을 자극했다. 어젯밤 그가 사 왔다던 타락죽인가 싶었는데, 냄새가 전혀 달랐다.

죽 위에 얇고 어슷하게 썬 전복이 듬뿍 올려져 있었다. 잔병치레가 잦은 아연이 종종 앓아누울 때면 성현이 어김없이 포장해 오곤 했던 그 전복죽. 뇌리를 스치는 기억에 아연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어제의 그 타락죽은 아일랜드 식탁 위에 그녀를 올려놓으면서 성현이 바닥으로 가차 없이 내동댕이쳐 버렸던 게 떠올랐다. 고작 하루 전의 기억이 흡사 빛바랜 추억처럼 가물가물했다.

냄새를 맡아서 그런지 문득 허기가 졌다. 전날 결혼식장에서 열의 없이 뒤적거렸던 접시가 마지막 식사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벌거벗은 꼴로 성현과 마주 앉아서 무언갈 먹고 싶은 마음은 전혀 들지 않았다.

“꺼져. 나쁜 새끼.”

“말했지. 네가 욕할수록 난 흥분한다고. 겨우 가라앉혀 뒀는데, 다시 세워 놓고 싶어서 그래?”

“미친놈. 넌 미친놈이야.”

“알아.”

한숨처럼 웃음을 흘린 성현이 속삭이듯 말했다.

“그러니까 넌 여기서 못 나가, 아연아.”

“놔!”

성현이 아연의 허리를 낚아채듯 붙잡았다. 한 손에는 접시를 든 채로 기술도 좋게 아연을 어깨 위에 걸치듯 올렸다.

“당장 못 내려놔? 놔!”

아연은 얄미울 정도로 너른 등짝을 눈에 보이는 대로 마구 내리쳤다. 하지만 성현은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벗어나려고 버둥거릴수록 허벅지를 꽉 죄는 팔의 힘만 강해질 뿐이었다.

성현이 아연을 침대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 주며 말했다.

“괜히 힘 빼지 마. 너 쓰러질까 봐 걱정되니까.”

“걱정하는 사람이, 이렇게 지독하게 굴어? 너 싸이코야?”

제가 지독하게 굴었다는 것만큼은 잘 아는지, 성현은 말없이 시트를 끌어당겨 아연의 몸에 둘러 주었다. 시트에 둘둘 둘러싸인 채로 아연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온갖 미움이 담긴 아연의 눈길은 보이지도 않는다는 양, 침대 옆에 붙어 앉은 성현이 죽을 듬뿍 담은 숟가락을 내밀었다.

“입 벌려.”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고 있는 아연에게 그가 나긋하게 명령했다.

“꼴도 보기 싫어, 권성현. 꺼져 버려.”

“그 배 속에 든 건 내 정액밖에 없을 텐데 뭐라도 좀 먹어야지. 오늘 너, 입으로는 아무것도 못 먹었어.”

아무것도 못 먹게 만든 사람이 대체 누군데. 한없이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주제에 저딴 상스러운 말을 지껄이는 게 정말 미친놈 같았다.

“가증스러운 얼굴 하지 마. 재수 없어.”

아연은 바들바들 떨면서 그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그런 아연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성현이 이내 다정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싫어? 그럼 다른 걸 물려 줄까?”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도는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아연이 눈을 사납게 치떴다. 커다란 손이 아연의 턱 아래를 붙잡아 들어 올렸다. 엄지가 입술 선을 덧그리듯 쓸다가, 도톰한 입술 가운데를 꾸욱 짓눌렀다. 떨리는 입술이 엄지 아래 뭉그러졌다.

“나도 이 예쁜 입에 무식하게 생긴 좆 따위를 쑤셔 넣고 싶지는 않으니까.”

오히려 쑤셔 넣고 싶다는 말로 들리는 것은, 내가 지금 너처럼 제정신이 아니기 때문일까.

“자, 입 벌려.”

양쪽 턱을 억세게 누르는 힘과는 달리 나직한 음성이 귓등을 간질였다. 아연은 체념처럼 입을 열었다.

* * *

깊은 파도에 휩쓸린 것처럼 온몸이 먹먹한 물속에서 하염없이 흔들렸다. 눈을 떴을 땐 갑자기 뭍으로 건져 올려진 물고기처럼 막힌 숨을 한꺼번에 몰아쉬어야 했다.

정신없이 이어졌던 짐승 같은 섹스는 모두 다 꿈결이었다는 듯 사위가 조용했다. 아연은 천천히 눈을 깜빡여 보았다. 뇌까지 정액에 절여진 것처럼 머리가 멍해서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가 없었다.

기억은 마구잡이로 뒤엉켜 있었다. 머릿속에 남아 있는 마지막 순간을 떠올리려고 툭 건드리자, 둑이 터지듯 조각난 장면들이 와르르 밀려들었다.

성현은 그녀를 벌주는 것처럼 사납게 굴다가도 애달프게 매달리는 것처럼 오락가락했다. 틈틈이 어미 새가 아기 새를 먹이는 것 같은 자상한 식사가 집요하리만치 이어졌고, 그 외엔 쫓기는 것처럼 갈급한 섹스가 반복되었다.

그녀의 아래에 제 물건을 깊이 처박은 채로 음식을 떠먹일 때쯤엔 경악을 넘어서 체념에 이르렀다.

매혹적인 눈동자에 음산한 광기가 스칠 때마다 절망스러웠다.

미친놈 같은데 동시에 안쓰러워서 목이 메고 숨통이 조였다.

성현의 목을 간신히 끌어안고 있던 팔이 끝내 침대 위로 툭 떨어지던 것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그때는 온몸이 진득한 체액을 흠뻑 뒤집어쓴 꼴이었는데, 잠든 사이 그가 닦아 주었는지 말끔해져 있었다. 병 주고 약 준 거나 마찬가지라 고맙지도 않았다.

몸에 묻었던 것을 닦아 내었다 한들, 지나치게 격렬했던 정사가 남긴 흔적은 여전했다. 구석구석 성현이 만들어 놓은 붉은 자국과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 없을 만큼 진이 빠진 감각. 게다가 아직도 이어져 있는 하체까지.

페니스가 마개처럼 막고 있는 질구가 밤새 예민해져서 작은 움직임에도 아랫배가 움찔 조여들었다.

배 속에 정액이 흘러넘치도록 가득 차 있는데도 여전히 부족한지, 밤새 품고 있던 성기를 오물거리는 아래의 감각에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잘 잤어?”

아연이 일어난 것을 귀신같이 알아차린 성현이 등 뒤에서 물었다.

어렴풋이 잠든 와중에도 그가 아래를 드나드는 느낌에 몇 번이고 깨어났는데, 잘 잤을 리가. 그래 놓고서는 저는 모르는 일이라는 양 가증스럽게 묻는 목소리가 뻔뻔하고 다정하기 짝이 없었다.

뒤에서 아연을 품에 가두고 있던 성현이 그녀의 가슴 바로 아래를 바짝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아연의 머리카락 위에 조급하게 입술을 꾹꾹 찍어 눌렀다.

“권성현.”

아연은 잔뜩 쉰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그녀의 나직한 부름에 사근사근한 입맞춤이 뚝 멎었다.

“화풀이 끝났으면, 이제 그만 떨어져.”

도리어 허리를 감고 있는 팔에 더 힘이 들어갔다. 아연은 줄기처럼 감겨 있는 단단한 팔을 떼어 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아예 처음부터 한 몸이기라도 했던 것처럼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밀고 꼬집고 할퀴다가 이내 마구잡이로 주먹질을 하며 온몸을 버둥거렸다.

“놔! 놓으라고! 이 나쁜 새끼!”

기운 한 점 남아 있지 않은 몸으로 발작을 하자 말초신경이 망가진 것처럼 발끝에서부터 쥐가 났다. 내장이 쪼그라들며 배 속이 꼬이는 것만 같았다.

“우읍…….”

치밀어 오르는 구역질에 아연은 몸을 둥글게 말며 입을 틀어막았다. 갖은 발악을 해도 절대 떨어질 것 같지 않던 성현이 그제야 안에서 빠져나가더니 아연의 몸을 제 쪽으로 빙글 돌렸다.

사람 말은 말 같지도 않은 것처럼 무시하던 주제에, 아연의 어깨를 잡은 커다란 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녀가 어떻게 되기라도 했을까 봐 염려하는 눈동자가 어울리지도 않게 사뭇 연약해 보였다.

파리하고 까칠해진 낯. 이렇게 망가진 것처럼 보이는 권성현은 처음이었다. 세상의 모든 불행을 뒤집어쓴 얼굴의 그가 몹시 낯설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미술관에 걸린 걸작을 실수로 망쳐 버린 심정이 이런 기분일까.

아연은 여전히 제 어깨를 움켜쥔 손을 거칠게 쳐 내고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자 안에 가득 차 있던 정액이 꿀럭 흘러나오는 게 느껴졌다. 허벅지를 적시는 감각에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아연은 무심코 아랫배에 손을 댄 채로 몸을 떨었다.

성현이 몸을 돌려 협탁 위에서 티슈를 뽑았다. 닦아 줄 심산인 듯 다리 사이로 다가오는 손을 아연은 죽을힘으로 밀쳐 냈다.

“저리 치워!”

그의 손등을 억세게 내리친 손바닥이 욱신거렸다. 정작 맞은 사람은 더 맞고 싶은 것 같은 기막힌 얼굴을 하고 있어서 허탈했다.

“내 집에서 나가.”

아연은 차가운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성현이 어둑한 눈을 들었다. 맞아서 벌게진 손등은 느껴지지도 않는 듯 그가 다시금 아연에게 손을 뻗었다.

힘으로 누르려는 줄 알고 흠칫 놀란 아연이 몸을 뒤로 뺐다. 그러나 침대 시트를 당겨서 아연의 발가벗은 몸을 가려 준 성현이 고개를 뚝 떨어뜨렸다.

“내가 천하의 개새끼처럼 군 거 아는데……. 네가 지금 나 패 죽이고 싶은 거 아는데……. 근데 그래도 나 너 못 놓겠어.”

“…….”

“네가 없는 나를 상상할 수가 없어. 너는 그게 상상이 돼?”

성현은 아연의 어깨에 이마를 맞대었다. 단 한 번도 무너진 적 없는 단단하고 너른 어깨가 고작 그녀의 말 한마디에 궁지에 몰린 짐승처럼 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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