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번쩍 눈이 떠졌다.
거실 테이블 너머로 텔레비전의 까만 화면 속에 자신의 인영이 비쳤다. 잠시 눈을 감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대로 잠이 든 모양이었다. 소파에 옆으로 비스듬히 기대 누워 몸을 한껏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 꼭 버림받은 짐승 같았다.
아연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집 안에는 현관 벨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인터폰 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네모난 화면 안에 너른 가슴팍이 보였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화면을 가득 채운 커다란 몸이 누구의 것인지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아연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적어도 오늘은 성현을 보고 싶지 않았다.
넝마처럼 너덜너덜해진 마음을 말끔하게 추스른 다음에 그를 마주하고 매듭을 지으려고 했는데, 마음의 준비도 없이 갑자기 들이닥친 성현을 맞이하려니 어쩔 수 없이 마음의 동요가 일었다.
울컥 치밀어 오르는 무언가를 꾹꾹 억누르고, 자꾸 불규칙적으로 거칠어지는 호흡을 애써 가다듬었다. 문고리를 잡고 잠시 망설이던 아연은 깊은 숨을 몰아쉬며 현관문을 열었다.
인터폰 화면 안에서 보았던 넓은 가슴이 시야를 채웠다. 동시에 늘 성현에게서 나는 기분 좋은 냄새가 밀려들었다.
아연은 시선을 들었다. 눈을 마주쳐 온 성현이 가볍게 웃었다. 왈칵 목이 메어 와 몇 번이고 마른침을 삼켜야 했다.
“왜 왔냐는 표정이네.”
“…….”
그를 대면하고 싶지 않았던 속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난 모양이다. 아연은 뒤늦게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런 아연을 보고 피식 웃은 성현이 손을 뻗어 현관문을 짚고 있던 그녀의 손 위를 덮었다.
“냉정하기는.”
겹친 손에 힘을 주어 문을 더 크게 열며 그가 고개를 기울였다. 성현이 속삭이듯 말했다.
“들어오라고 안 할 거야?”
불쑥 가까워지는 것에 흠칫 놀라 아연이 몸을 뒤로 뺐다. 성현은 고요한 눈길로 아연을 응시했다. 속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동자가 두려워 아연은 시선을 피하고 옆으로 비켜서며 말했다.
“들어와.”
“그럼 실례.”
실례한다는 사람치고 집 안으로 들어가는 성현의 뒷모습은 제집인 양 거침이 없었다. 아연은 오히려 손님처럼 그의 뒤를 쫓으며 조용하게 물었다.
“오늘은 그냥 쉬기로 한 거 아니었어?”
그러자 어느새 거실을 지나던 성현이 아연을 흘끗 돌아보았다. 그의 입술 끝에 미묘한 웃음이 피어났다.
“쉬어. 누가 너 괴롭히러 왔대?”
“……그럼 왜 왔는데.”
섹스할 것도 아니면 왜 왔냐는 듯한 아연의 말투에 성현은 허탈한 실소를 흘렸다. 그는 대답 대신 들고 온 쇼핑백을 아일랜드 식탁에 내려놓았다.
신경이 바짝바짝 탔다. 당장이라도 저 착해 빠진 얼굴을 양손으로 부여잡고 오늘 나 몰래 어떤 새끼를 만나고 왔느냐고 추궁하고 싶은 좆같은 충동이 치밀었다. 하지만 단단한 껍질을 씌운 듯한 냉랭한 얼굴을 보고 있노라니, 동시에 아무것도 묻고 싶지 않기도 했다.
성현이 말없이 쇼핑백을 열었다. 고소한 밤 냄새가 은근하게 공기 중으로 퍼졌다. 아연은 이게 뭐냐는 듯한 얼굴로 눈을 찡그렸다.
“타락죽. 저번에 잘 먹는 것 같길래.”
그러고 보니 쇼핑백에 그려져 있는 기와집 문양의 로고가 눈에 익었다. 언젠가 성현에게 납치당하듯 붙잡혀 가서 점심 식사를 했던 곳이었다.
“결혼식 보면서 저녁 먹었는데 뭐 하러.”
“네가 잘도 먹었겠다. 깨작거리기나 했겠지.”
비아냥거리듯이 말하는 말투가 한없이 다정하기만 해서 마음이 욱신거렸다.
“많이 먹었어. 결혼식 끝나고도 약속이 있었거든.”
성현이 쇼핑백에서 포장된 용기를 꺼내는 손을 멈추지 않으며 아연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아연은 성현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았다. 그리고 가슴에 꽉 차 있던 감정을 왈칵 쏟아 내듯이 말했다.
“나 선봤어. 오늘.”
“알아.”
성현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오히려 너무 놀라서 말문이 턱 막힌 쪽은 아연이었다.
안다고? 알면 왜…….
어째서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아연의 눈에서 색소가 빠져나가는 것처럼 멍해졌다.
맞선을 보았다고 하면 배신감에 부들거릴 모습이라도 기대했던 걸까. 성현의 태연한 태도에 상처라도 받은 것 같은 제 모습이 우스워 아연은 쓰게 웃었다.
억지로 희수의 손에 끌려가 맞선 테이블에 앉혀진 뒤로 내내 하늘이 무너지기라도 한 것처럼 굴었다.
끝내 피할 순 없다 하더라도, 적어도 성현과는 정리를 끝마친 후에. 그게 순서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를 두고 외도라도 저지른 것처럼 죄책감을 느끼며 괴로워했는데, 지난 몇 시간이 미련해지는 순간이었다.
네 맞선 따위가 자신과 무슨 상관이 있겠냐고 말하는 듯 태평하기만 한 얼굴. 그런 얼굴로 성현은 아연에게 고갯짓을 했다.
“이리 와 앉아.”
아연은 그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진 채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떻게 알았어? 설마 나 미행이라도 해?”
“아아. 왜 진작 그 생각을 안 했는지 모르겠네.”
성현이 의자에 등을 기대며 느긋하게 말했다.
“마음 같아선 그러고 싶어. 일거수일투족 감시하고, 나 없을 땐 뭘 하는지, 누굴 만나는지 일일이 간섭하고. 아니, 나 말고는 아무도 못 만나게 가둬 두는 게 좋겠다.”
아연은 얼음처럼 차갑게 경직된 얼굴을 들었다.
“그게 무슨…….”
“너 내 거잖아. 그러니까 나만 보는 게 맞지 않나? 어차피 난 너 말고는 눈에 뵈는 게 없는 놈이니까 그게 공평한 거 같은데.”
농담처럼 가벼운 말투와는 달리, 아연을 직시하는 눈동자에는 그 흔한 장난기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몸을 꽁꽁 묶어 버리는 것 같은 짙어진 시선에 아연은 발끝을 더듬거렸다.
움찔. 뒤로 물러서던 걸음이 흠칫 굳어졌다. 발끝을 물리기 무섭게 그가 몸을 일으킨 까닭이었다.
정말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묶인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런 아연에게 성현이 성큼 다가와 눈 깜짝할 사이에 가까워졌다.
“근데 그건 어디까지나 내 작은 소망일 뿐이고, 내가 너한테 어떻게 그래. 내가 널 어떻게 가둬. 나 너한테 약한 거 알잖아.”
거짓말처럼 다정해진 얼굴로 그가 속삭이듯 말했다.
“너도 아니까 그랬겠지. 네 말이라면 배알도 없는 놈처럼 기라면 기고, 까라면 까는 놈이잖아, 나.”
“너 화나서 이러는 거면…….”
“나 화 안 났어. 착해 빠진 한아연이 누구한테 떠밀려서 거기 나갔을지 다 아는데, 내가 왜 화를 내. 아니야?”
바르르 떨리는 입술을 성현이 엄지로 스윽 쓸었다. 손끝으로 입술 선을 덧그리다 양손으로 아연의 뺨을 감쌌다. 당연하다는 듯 기울어지는 얼굴.
그가 무얼 하려는지 인지하기도 전에 입술이 겹쳐졌다. 예고도 없이 입술을 벌리고 들어온 혀가 벌주듯이 입 안을 휘저었다. 자상하게 속삭이던 목소리와는 너무도 다른 움직임으로 엉키고 감겨들었다.
버둥거리는 아연의 턱을 커다란 손아귀가 단단히 움켜쥐었다. 성현은 더 깊이 들어왔다. 혀뿌리가 뽑히는 것만 같았다.
“흐읏……. 이거 놔.”
아연이 그의 가슴팍을 짚고 힘껏 밀어냈다. 몸부림을 친 끝에 겨우 성현에게서 벗어난 아연은 손등으로 젖은 입술을 거칠게 훔쳤다.
“나에 대해서 다 안다는 듯이 굴지 마.”
입술을 마구잡이로 닦아 내는 아연을 바라보며 성현이 실소를 터뜨렸다.
저 동그란 머리통 속에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는 것투성이라 딱 미치기 직전인데. 속속들이 알지 못해서 완전히 돌아 버릴 지경인데. 다 안다는 듯이 군다는 아연의 말에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성현은 아연의 손목을 붙잡아 내렸다. 금세 입술이 발갛게 부풀어 있었다. 애타는 손끝이 입술 위를 문질렀다. 아연이 그의 손을 냉랭하게 쳐 내고 새된 눈으로 성현을 노려보았다.
“나쁘지 않았어. 몇 번 더 만나 볼 생각이야.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결혼도 하게 될 거고. 그러니까 이제 이런 짓…… 그만해.”
“뭘 해?”
성현의 다감한 눈동자에서 시퍼런 불꽃이 탁 하고 튀어 오른 건 바로 그때였다.
순식간에 어둑하게 가라앉은 새까만 눈이 아연을 꽁꽁 옭아맸다. 기묘하게 침착해진 표정으로 성현이 조곤조곤 달래듯이 말했다.
“다시 말해 봐. 네가, 뭘 하겠다는 생각인지. 난 잘 이해가 안 가는데.”
형편없는 오답을 들었으니 다시 제대로 된 대답을 내놓을 기회를 주겠다는 듯 말투만 너그럽게 꾸민 협박이었다.
누가 겁먹을 줄 알고.
아연은 오기로 점철된 목소리를 쥐어짰다.
“그만하자고 말했어. 놀 만큼 놀았잖아, 우리.”
성현은 이를 꾹 물었다. 피가 차게 식는 기분이었다.
그만하자는 말이 뒤통수를 강타했다면, 뒤에 이어진 말은 머리통을 도끼로 찍어 내리는 것 같았다.
쌓여 온 시간을, 감정을, 마음을 걸레짝 팽개치듯 바닥에 처박고 발로 꾹꾹 짓밟아 확인 사살까지 하는 잔인함이 심장을 할퀴고 지나갔다.
“난 아직 덜 놀았는데.”
고작 이따위 악에 받친 대답밖에 못 하는 스스로가 병신 같았다. 성현은 생전 처음 심각한 초조감을 느꼈다. 무언가 아주 중요한 것이 스르륵 빠져나간 것처럼 허전해진 손을 허겁지겁 뻗어서 아연의 어깨를 붙들었다.
“이제 겨우 시작인데 무슨 소리야. 네 멋대로 다 놀았다고 손 털어 버리면 내가 그냥 끝내 줄 것 같아? 누가 널 놓아준대? 네 말이라면 배 까뒤집고 뒹구는 개새끼라 네가 단단히 착각한 것 같은데, 나 너 안 놔줘.”
“너야말로 뭔가 착각한 것 같은데, 우리 아무것도 시작한 적 없어. 네가 날 놔주고 말고 할 것도 없고.”
가녀린 어깨를 쥔 손에 불쑥 힘이 들어갔다. 애원하듯 움켜쥐는 힘을 느꼈을 법도 하건만 아연은 담담한 표정으로 툭 내뱉듯이 말했다.
“우리 그냥 섹스 좀 한 것뿐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