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결혼식장에서 보았던 아연의 모습과 조금 전의 짧은 통화를 복기하던 성현은 이내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아연과 관련된 일이라면 지나치게 신경이 곤두서는 제 꼴이 퍽 우스웠다.
불편한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되었을 테니 피곤한 것도 당연할 테지.
예전부터 그런 자리를 불편해하던 아연이었다. 다만 당연히 밤에 볼 수 있을 거라 기대했는데, 못 본다고 생각하니 하늘로 붕 떠오르던 몸이 돌연 땅바닥에 패대기쳐진 것처럼 맥이 빠졌다.
허전한 마음을 삼키며 성현은 핸드폰을 슈트 안주머니에 꽂아 넣었다. 그때 누군가 뒤에서 그의 등을 툭 두드렸다.
“뭐 하고 있어? 가뜩이나 커다란 덩치로 문을 다 가로막고서.”
누가 다가오는 것도 모르고 정승처럼 서 있던 성현이 고개를 돌렸다. 흘끗 돌아보는 얼굴은 다른 생각에 푹 빠져 있던 사람답지 않게 태연하기만 했다.
“어, 왔어? 잠깐 통화 좀 하느라.”
“할아버지는?”
주은이 문 너머를 눈짓했다.
“들어가 봐. 아직 깨어 계실 거야.”
“다행이다. 병원 일이 늦어지는 바람에 혹시라도 이미 주무시고 계실까 봐 서둘렀는데. 나 들어가 볼게.”
성현의 등을 툭툭 두드린 주은은 다음에 보자는 눈길을 보내곤 방으로 들어갔다. 주은이 들어간 곳은 태송현에서 가장 먼저 아침 햇살이 들고 가장 늦게 저녁노을이 지는, 권민환 회장의 방이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오랜 기간 입원해 있던 민환이 오늘 태송현으로 돌아왔다. 참석했던 결혼식이 끝나고 성현은 곧장 병원으로 가서 민환을 집으로 모셨다.
눈에 띄게 수척해진 조부는 방으로 들자마자 성현을 앉혀 두고 회사 돌아가는 상황에 대하여 자세히 보고받기를 원했다.
최근 가장 많은 진척이 이루어진 전장 기업 인수 합병 건에 관한 보고를 마무리할 무렵 민환이 무거워진 눈꺼풀을 끔뻑거렸다. 노년의 나이에도 자정 전에는 잠자리에 드는 법이 없던 민환이었는데, 아직 몸 상태가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성현은 권 회장에게 밤 인사를 고하고 방 밖으로 나와서, 문 근처를 채 떠나기도 전에 아연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이었다.
성현은 저벅저벅 발걸음을 옮겼다. 차고로 내려갈 생각에 계단으로 향하던 그는 돌연 오른쪽으로 방향을 꺾었다.
서재로 들어간 성현은 불을 켜고 벽 앞에 섰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한참 동안 액자 안의 사진을 바라보던 성현이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핸드폰에 찍힌 심각하게 귀여운 여자아이의 얼굴에 피식 웃음이 터졌다.
이게 뭐 하는 짓거리야.
얼굴이 보고 싶으면 직접 가서 보면 그만인 것을, 이 옛날 옛적 사진은 왜 계속 보고 있는 건지. 어처구니가 없지만, 자꾸만 딸려 가는 눈길을 멈출 길이 없었다.
성현은 입술 끝에 미소를 띠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서재에서 나왔다. 주차장으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운전석에 올라타 시동 버튼에 손을 뻗는 찰나 핸드폰이 울렸다. 성현은 발신자의 이름을 확인하고 귀찮은 듯이 핸드폰을 귀에 가져갔다.
“어. 왜.”
- 야, 너 그거 알아?
본론부터 말하지 않고 상대를 떠보는 것처럼 빙빙 돌려 대는 것은 준성 특유의 화법이었다.
약간의 짜증으로 성현의 눈썹이 설핏 치켜 올라갔다. 결혼식장에서 얼굴 보고 이야기 나눈 게 고작 몇 시간 전인데, 쓸데없는 소리를 늘어놓으면 곧장 끊어 버릴 생각으로 성현은 좌석에 몸을 기댔다.
“뭔데, 또.”
- 한아연 선본 거.
암 레스트를 규칙적으로 두드리던 손가락이 우뚝 움직임을 멈췄다.
- 몰랐어? 한아연이 말 안 했을 것 같긴 했는데, 그래도 넌 알고 있나 했지.
성현으로부터 아무런 대꾸가 없자, 그가 몰랐다는 사실이 의외라는 듯이 준성이 반색하며 말을 이었다.
- 나 아까 진한이 결혼식 끝나고 일 때문에 그 호텔 라운지 카페 들렀거든. 거기서 봤어. 걔 어머니랑 같이 앉아 있는 거. 상대 쪽에서도 제 엄마까지 옆에 끼고 넷이서 마주 앉아 있는 거 보니까 각 나오잖아. 무슨 분위기인지 딱 알겠더라. 근데 그 상대방 남자가 누구였는지 알아? 너도 아는 놈이야.
성현이 빈주먹을 쥐었다. 손등에 굵은 핏대가 불거졌다.
“뜸 들이지 말고 얘기해.”
- 조현물산 개망나니.
성현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어떤 이름이 튀어나오더라도 달가웠을 리는 없겠지만, 개중에서도 몹시 불쾌한 인물이었다. 공공연하게 개망나니라고 불리는 조현물산의 둘째 아들은 성현이 가장 혐오하는 인간 군상에 속하는 쓰레기였다.
- 그 새끼 사업 배운답시고 외국으로 나돌면서 더럽게 논 거 이 바닥에 아는 사람 극소수잖아. 조현물산 요즘 아랍에미리트에서 수주 잘 받는단 소문 들리더라고. 그 여세 몰아서 국내 사업도 좀 더 키워 보려는 모양인데, 정계 인사 딸내미를 와이프로 맞으면 어느 정도 이미지 세탁은 되겠지.
준성이 불만스럽게 혀를 쯧 찼다.
- 그런 놈이 대대로 국회의원 배출한 집안 사위라니 가당키나 한가 싶지만, 한아연네 집에선 그 이상 가는 혼처는 안 들어오겠다고 생각했을 수도…… 뭐, 그 집 사정도 좀 복잡하니까…….
불문율이나 마찬가지인 소리를 무심코 내뱉은 준성이 말꼬리를 흐리며 얼버무렸다.
- 아무튼 그 새끼, 자기는 여자 여럿 끼고 놀 만큼 다 놀아 봤다고 결혼은 무조건 참하고 얌전한 여자랑 할 거라고 묻지도 않은 말 부지런히 씨불이고 다니더니. 그게 한아연이 될 줄은 몰랐네. 한아연 어떡하냐. 걔네 집은 그 새끼 그 정도인 줄은 모를 거 아니야.
“뭘 어떡해. 선본다고 다 결혼하는 것도 아닌데.”
- 네가 아까 못 봐서 그런 말을 하지. 너도 걔네 엄마 유난 장난 아닌 거 잘 알면서 그러냐? 아까 거기서도 둘이 얘기 나누라고 자리 비켜 주는 척 일어나더니 몇 테이블 떨어진 데 앉아서 한아연이 어떻게 하나 지켜보더라. 눈빛이 얼마나 매섭던지, 한아연 뒤통수 꿰뚫리는 줄 알고 내가 다 쫄았다니까?
호텔 라운지에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앉아 있는 아연의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 것처럼 그려졌다. 능숙하게 표정을 감추고 언제나처럼 연하게 미소 지었을 얼굴.
성현은 고개를 들고 한숨 같은 헛웃음을 내뱉었다.
내가 사 준 옷을 입고 그 자리에 앉아서, 넌 무슨 생각을 했을까.
오늘 결혼식장에 제가 선물한 원피스를 입고 나타난 아연을 보는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세상의 모든 빛을 혼자 흡수한 것처럼 주변의 모든 사물은 흑백의 정물로 만들어 버리고 홀로 반짝반짝 빛나는 모습에 제 눈이 고장 난 게 아닐까 시답잖은 생각마저 들었다.
입으라고 보낸 건데, 막상 정말 입은 모습을 보니까 마치 승은이라도 입은 것처럼 가슴이 두방망이질을 치며 날뛰었다. 사람을 이렇게 정신 나간 놈으로 만들어 놓고…….
넌 무슨 생각으로 그 옷을 입고 거기에. 내 생각을, 하기는 했을까.
자신이 아닌 다른 놈의 맞은편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고, 눈을 마주치고, 작은 새가 지저귀는 것 같은 듣기 좋은 목소리로 조곤조곤 말을 하는 아연을 상상하자, 뒤통수에서 등줄기까지 뻐근하게 조여들었다.
씨발. 성현은 낮게 욕지기를 짓씹었다.
무슨 자격으로 성을 내고 있는 건지, 한심하기만 한 자신에게 분노가 치밀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스스로가 초래한 결과였다.
아연의 입에서 맞선이란 말이 튀어나왔던 게 벌써 한 달도 더 지난 일이었다. 그사이 지나간 수없이 많은 순간, 감당 못 할 만큼의 욕정에 미쳐서 아연의 몸이나 물고 빨아 대기 바빴던 속된 나날들이 흐르는 동안 입 하나 벙긋하지 않았던 비겁한 병신은 다름 아닌 자신이 아니었던가.
어쩌면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그 말이 꼭 그들 사이를 절단 낼 잘 벼린 칼날일 것만 같아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사탕의 달콤한 맛에 매료돼 치아가 다 썩어가는 것도 모르고 자꾸 사탕 그릇을 기웃거리게 되는 중독자처럼 유예하고, 회피하고, 안주한 채로 그저 순간의 행복에 젖어 있고 싶었다.
시간이 조금만 더 있다면, 너도 나처럼, 내가 너에게 빠진 것처럼, 어쩌면 나를 좋아하게 되지 않을까. 아니, 벌써 좋아하게 된 것은 아닐까.
그런 어리석은 속단을 허겁지겁 주워 삼키면서.
저 잘난 맛에 사는 재수 없는 놈이라는 별명을 꼬리표처럼 달고 사는 주제에, 아연의 앞에서는 어울리지도 않게 초라해졌다.
아무것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 한아연이라는 복잡한 미지수를 받아 들고, 너무 어려워서 풀지 못하는 문제를 숙제로 받은 어린애처럼 안절부절 제자리만 빙빙 맴돌게 되고 마는 것이다.
- 순진하기만 한 한아연이 그 더러운 놈한테 팔리듯이 시집간다고 생각하니까 내가 다 아까워 죽겠는데, 어쩌지?
한참 동안 조현물산 개망나니가 얼마나 더럽게 놀았는지에 대한 설파를 이어오던 준성이 돌연 목소리를 바꿔 한탄조로 말했다.
- 그냥 나한테 오라고 할까? 한아연 눈에 내가 찰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돈만 있는 쓰레기 놈이랑 한평생 사는 것보다는 내가 낫지 않냐? 우리 아버지는 어떻게 설득해 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우리 아버진 예쁜 여자에 약하니까. 우리 엄마가 문제지…….
“뭔 개소리야.”
- 개소리라니. 내 말 들어 봐. 막말로 한아연 인생 시궁창에 처박힐 뻔한 거, 내가 구해 주는 거 아니야? 백마 탄 왕자님까지는 안 되더라도 벤츠 타는 김준성 정도면 괜찮지 않나?
“네가 구하긴 뭘 구해. 씨발.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고 있어.”
성현은 짜증 섞인 숨을 거칠게 내쉬며 핸드폰을 조수석에다 내동댕이쳤다. 멀어진 핸드폰에서 무어라 웅얼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잠잠한 눈길로 어두컴컴한 차창 너머를 응시하던 성현은 한참이 지나서야 시동을 켰다. 성현의 차가 어둠에 잠긴 태송현을 급히 빠져나갔다.
앞 유리 위로 빗방울이 한 방울씩 떨어지더니 이내 후드득 소리를 내며 창을 때리기 시작했다. 옆으로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가로수의 풍성한 이파리가 거세어진 바람에 미친 듯이 흔들거렸다.
때 이른 태풍이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