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이젠 내가 다 창피할 지경이야. 남 비꼬기 좋아하는 인간들이 우릴 두고 뭐라고 떠드는지 아니? 빛 좋은 개살구. 못 먹는 감. 반지르르하니 예쁘고 먹음직스럽게 잘 익었는데 막상 씹어 보면 속은 떫어서 도무지 삼킬 수 없는 땡감이라더라. 하, 정말이지 기가 막혀서.”
아연의 팔을 움켜쥔 손에 강한 힘이 들어갔다. 희수는 입술을 씰룩거리며 빠르게 속삭였다.
“그렇게 실속도 없이 한 세트인 것처럼 붙어 다니다가 하루아침에 성현이 쟤 딴 여자랑 결혼한다는 소식 들리면, 우린 닭 쫓던 개 됐다는 소문이나 이 바닥에 파다하게 퍼질 텐데. 그런 꼴 보지 않으려면 네가 먼저 네 살길 찾아가야 돼.”
희수의 눈길이 성현을 벗어나 넓은 홀의 입구로 향했다.
“알겠지? 판은 엄마가 다 깔아 줬으니까, 이제 너만 잘하면 돼. 정신 똑바로 차려.”
그녀의 시선이 머문 곳에는 본부인을 옆에 둔 한 의원이 사람 좋은 미소를 띤 채로 사람들과 인사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잠시 모녀에게 닿았다가 아무것도 걸리는 것이 없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다른 곳으로 돌아갔다.
희수의 강한 향수 냄새가 코끝을 전전했다. 참기 힘든 구토감이 몰려든 것은 바로 그때였다.
“엄마, 나 잠깐, 화장실 좀…….”
아연은 희수의 팔을 다급하게 떼어 냈다. 손등으로 입을 막으며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는 아연의 뒷모습을 보며 희수는 혀를 끌끌 찼다.
넘어질 듯 말 듯 휘청거리는 발걸음이 위태로웠다. 숨이 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아연이 화장실 벽을 짚었다.
당장이라도 고꾸라질 듯한 몸을 겨우 벽에 기대자 관자놀이를 송곳으로 쑤시는 것처럼 지끈거렸다. 머리가 반쪽으로 쫙 쪼개질 것만 같았다.
* * *
초여름의 신부는 아름다웠다.
한낮의 열기가 한풀 꺾인 미지근한 바람이 순백색의 드레스를 휘감았다. 오묘한 핑크색으로 변한 하늘에서 쏟아지는 햇볕이 드레스 자락을 타고 은하수처럼 부서져 내렸다.
관현악단이 만들어 내는 아름다운 음률에 맞춰, 신랑과 신부는 어깨를 나란히 맞대고 하얀 카펫 위를 걸었다. 하늘의 색깔을 담은 꽃가루들이 주위에 너울졌다.
결혼식의 주인공들이 아연이 서 있는 테이블 옆을 지날 때, 마지못해 손끝으로 톡톡 박수를 치던 희수가 몸을 아연에게 불쑥 기울이며 말했다.
“저 여자애는 무슨 복이라니. 들어 보니 천둥벌거숭이나 다름없는 처지던데. DH그룹 도 회장님도 나이가 든 게지. 아들 내외가 살아 있었으면 가당키나 한 신붓감이니, 저게?”
연한 미소를 띄고 수줍은 시선을 내린 신부를 바라보는 희수의 눈빛은 비아냥거림을 넘어 차라리 투기에 가까웠다.
아연은 깊은 피로감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제발 그 입 좀 다물어요. 무심코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갈무리하기 위해서 갖은 애를 써야 했다.
희수와 함께 결혼식장을 빠져나오는데 안도의 한숨이 흘렀다. 인생에 다시없을 중요한 날을 치른 진한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무슨 생각으로 결혼식장에 앉아 있었는지 모를 정도로 정신이 나가 있었다.
얼른 집에 가고 싶었다.
집에 도착하면 얼굴에 가면처럼 덧씌워 놓은 텁텁한 화장부터 지워 내고, 욕조에 따뜻한 물을 가득 채워서 몸을 푹 담가야지. 그러고 나와서 차갑게 식힌 맥주 한 캔을 마시면, 당장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정신도 어느덧 괜찮아진 것처럼 느껴질 것 같았다. 그리고 내일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잠만 자야지.
그런 생각을 하니 맥없이 질질 끌리던 발걸음도 점점 빨라졌다. 그런데 아연의 팔짱을 낀 희수가 정문 쪽이 아닌 라운지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어디 가요. 나 오늘은 피곤해.”
“가만있어 봐. 잠깐이면 되니까. 아! 저기 있네.”
희수가 창가 테이블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을 향해 손을 들었다. 희수를 발견한 상대방도 앉아 있던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를 보내는 남자의 얼굴이 어렴풋하게 낯이 익었다. 언젠가 보았던 프로필 사진 속의 남자였다.
“엄마, 이게 무슨……. 갑자기 이러는 법이 어디 있어. 나 아무 준비도 안 되어 있는데.”
아연이 발걸음의 속도를 줄이고 제게 팔짱을 낀 희수의 손을 붙잡으며 다급하게 말했다. 난색을 띤 그녀의 얼굴을 흘끗 살핀 희수가 시선을 피하며 변명했다.
“네가 준비할 게 뭐가 있어. 오늘 예뻐. 이대로도 충분해. 마침 저쪽에서도 오늘 결혼식에 참석한다면서, 번거롭게 따로 시간 잡을 거 뭐 있냐기에 그러자고 했어. 지난번엔 한 번 튕겼으니, 이번에는 못 이기는 척 넘어가 줘야지. 괜히 더 뺐다간 완전히 튕겨져 나갈라.”
“엄마, 안 돼요……. 나 오늘은 정말 못 하겠어.”
“너 아까 엄마가 한 말 헛들었니? 군말하지 말고 따라와.”
희수는 아연의 허리를 낚아채듯 붙잡고 끌어당겼다. 그 섬약한 몸 어디에서 치솟았는지 모르게 강한 힘이었다.
“엄마. 엄마. 제발……. 응?”
희수는 부릅뜬 눈으로 표정 관리 제대로 하란 강경한 뜻을 내비쳤다. 그러고는 거짓말처럼 온화해진 얼굴로 고개를 돌리고 고운 목소리로 말했다.
“먼저 와 계셨네요. 저희도 식 끝나자마자 온다고 온 건데.”
몸에서 영혼이 빠져나가고 껍데기만 남은 양 덜거덕거렸다. 빈자리에 시린 한기가 숭숭 스며들었다.
* * *
삐리릭.
등 뒤로 도어 록이 자동으로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아연은 벽을 손으로 짚고 구두를 벗었다. 벗어 낸 구두가 옆으로 툭 넘어졌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휘청휘청 집 안으로 들어갔다. 불도 켜지 않고 거실로 향하는 길이 끝나지 않는 늪처럼 느껴졌다. 아연은 바닥에 쩍쩍 달라붙는 발걸음을 질질 끌면서 걸었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깨에 걸고 있던 가방이 팔뚝을 타고 미끄러져 소파 위로 툭 떨어졌다. 핸드폰 하나가 겨우 들어가는 작고 납작한 가방이었다.
희수가 유난히 좋아하는 브랜드의 로고가 어둠 속에서도 반짝반짝 윤이 나며 빛났다. 그것을 가만히 쳐다보던 아연은 눈을 감고 소파에 등을 기댔다.
피로가 전신을 덮쳤다. 하루가 1년같이 길었다. 너무 많은 일이 한꺼번에 일어나서 오히려 현실감이 없었다. 누군가 꾸며 놓은 연극 한가운데에 내동댕이쳐져서 팔다리가 끈에 묶인 채 춤추는 꼭두각시가 된 것만 같았다.
화장도 지우고 샤워도 해야 하는데, 아무것도 하고 싶지가 않았다. 아연은 그저 적막으로 가득한 집 안의 고요에 귀를 기울인 채 머릿속을 비워 갔다.
충분히 예견된 일이었다. 어떤 방식으로든 끝은 오게 되어 있었는데, 이 정도로 난잡한 파국을 맞이하게 될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는 게 제 어리석음의 방증일 뿐.
안온한 기분에 젖어서, 사실은 그 꿈결 같은 순간을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가만히 부딪쳐 오는 다정한 몸짓이, 등을 어루만지던 커다란 손의 온기가, 온통 반짝반짝 빛나던 눈동자가 너무 좋아서.
조금이라도 유예하고 싶었고, 코앞까지 다가온 마지막을 애써 외면해 왔다. 그래서 지독하게 냄새를 피워 올리던 불안감의 실체를 마음속 가장 밑바닥에 숨겨 놓고 다지듯이 꾹꾹 짓밟았다. 그렇게 하면 그게 숨겨질 거라고 믿는 것처럼.
아연은 감고 있던 눈꺼풀을 느릿하게 들어 올렸다. 소파에 팽개쳐 놓은 가방이 진동하고 있었다. 로고의 홈을 돌려서 가방의 덮개를 열고 안에 들어 있던 핸드폰을 꺼냈다.
권성현.
이제는 이름 세 글자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눈물이 핑 돈다. 아연은 쓰게 웃으며 끈덕지게 울리고 있는 핸드폰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전화를 받았다.
“응.”
- 집이야?
“……어.”
- 어디 안 좋아? 아까 보니까 아파 보이는 얼굴이던데.
그곳에 위태롭게 서 있던 제 모습을 성현이 모르길 바랐다. 다른 사람은 다 알아차려도 그의 앞에서만큼은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싶었는데, 마음처럼 되는 게 하나도 없지. 아연은 눈썹머리를 느릿하게 문지르며 대답했다.
“조금. 아픈 건 아니고 피곤해서.”
- 볼까? 잠깐 본가 들렀다가 지금 들어가는 길인데.
본가라는 말에 자동으로 낮에 보았던 태준의 얼굴이 연상되었다. 그 사람을 만났을까. 만났다면 무슨 이야기를 나눴을까. 마음이 덧없이 침잠한다.
성현을 아끼고 사랑한다던 사람. 태강그룹의 발이라 불리는 이. 가족.
오늘 일은 그의 단독 행동일까. 아니면 그 뒤로 성현의 일가가 함께하는 것일까. 생각이 연쇄적으로 뻗어 나갔다.
하지만 부질없는 궁금증일 뿐이었다. 해답과 상관없이, 그들에겐 저란 존재가 화초 주변에 영양분을 좀먹으며 자라난 잡초에 불과하단 사실은 달라지지 않을 터였다.
“아니. 그냥 쉴래. 자면 낫겠지.”
기태준 사장과 약속한 ‘정리’라는 것을 해야 하겠지만, 오늘만큼은 그냥 미뤄 두고 싶었다. 지친 마음을 추스르고 조금 더 단단해지게 다진 다음에, 그때 잘라 내어도 늦지 않겠지.
- 그래, 그럼.
무뚝뚝하게 들리는 성현의 담백한 인사가 가슴에 깊은 여운을 남겼다. 전화가 끊긴 핸드폰을 귓가에 대고 한참 멍하니 있다가 손을 뚝 떨어뜨렸다.
아연은 그대로 눈을 감았다.
* * *
성현은 손에 쥔 핸드폰을 바라보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결혼식장에서 보았던 창백한 얼굴. 우아하고 단정하게 걷던 걸음걸이에서 느껴지던 까닭 모를 위태로움. 눈부시게 미소 짓는 입가가 만들어 내던 미세한 경련. 핸드폰 너머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은근한 거리감까지.
모두 아주 사소하고 미묘했다. 과한 근심일 수도 있겠지만, 모래알을 삼킨 것처럼 무언가가 계속해서 신경에 거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