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사랑. 사랑놀음.
그 말이 가슴을 날카롭게 할퀴고 지나갔다. 깊게 남은 상흔이 뻐근하게 벌어지며 뼈까지 시리는 기분이었다.
사랑.
이토록 사무친 아픔이 사랑이라는 것을, 어쩌면 이미 알고 있었는지 모른다.
남의 입을 빌려 귀에 꽂힌 그 생경하고 뾰족한 단어가 심장에 깊숙이 박혔다.
아연은 치밀어 오르는 눈물을 억누르려 안간힘을 썼다.
이건 일종의 업보였다. 결국 이렇게 끝나리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으면서 충동적으로 그를 들쑤시고, 제 감정을 뻔뻔하게 발뺌하고, 제게 닿아 오는 그의 마음을 외면했다.
걷잡을 수도 없이 부풀어 버린 제 감정 하나 감당할 줄도 모르면서.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이미 그에게 온 마음을 빼앗겨 버린 후였다.
희게 질린 손등 위로 한숨이 흘렀다. 잠시 격앙되었던 감정을 추스른 태준이 차분하게 말했다.
“성현이는 계속 시들지 않는 어여쁜 화초로 자라 줘야 해요. 모두를 위해서. 철저한 관리하에 수준 높은 비료만 받아먹으면서, 사람들이 사랑해 마지않는 우리 태강그룹의 얼굴마담으로서. 그 잘난 얼굴에 지저분한 오물이 묻으면 곤란하지 않겠어요?”
오물…….
그녀를 자극하고 상처 주기 위해 태준은 일부러 원색적인 표현을 선택하고 있었다. 그의 의도가 고스란히 눈에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마음을 다잡는 것이 쉽지 않았다.
모두가 선망하는 남자. 태어났을 때부터 한여름의 따스한 햇살만 내리쬐었을 삶.
그런 성현의 완전무결한 평판에 저와 얽힌 스캔들이 얼룩질 경우 누구에게 더 큰 손해가 발생할지는 누가 봐도 자명한 일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현이는 저한테 힘을 실어 줄 수 있는 여자가 필요해요. 그룹의 발목을 잡고 구렁텅이로 끌고 들어갈 추잡한 소문의 주인공이 아니라.”
태준은 이미 엉망으로 구겨진 사진 위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렸다.
“버만사 총수 일가의 고명딸, 그 아가씨가 권성현 본부장과 결혼할 거예요.”
아연은 말갛게 빈 눈을 들었다. 버만사라면 언론을 통해 숱하게 들어 온, 오일 관련 사업을 하는 홍콩의 저명한 기업이었다. 전대 회장이 한국인과 결혼해 당시 국내에서 크게 화제가 되기도 했었다.
결혼.
지금 눈앞에 맞닥뜨린 이 끔찍한 상황만큼이나 현실감이 떨어지는 말이었다. 먹먹해진 귓가가 윙윙 울리고 귓등이 뜨거워졌다.
사실 놀랄 만한 일도 아니었다. 결혼을 전략적인 제휴의 수단으로 여기는 세계. 아연 자신 또한 그러한 세계에 발 하나를 걸치고 있지 않은가.
그런 주제에 그 당연한 사실에 왜 이렇게 가슴이 내려앉는 것인지. 자격 없는 동요가 요동쳤다. 기분이 한없이 침잠했다.
설마 성현은 그러한 것을 알고도 제게 내색하지 않았던 걸까.
뻔뻔한 의심이 서서히 번져 나갔다. 텅 빈 것처럼 허전한 배 속에 시린 한기가 스몄다.
뜨겁게 서로를 안고, 다정하게 어루만지고, 장난스럽게 키득거리고, 속된 말을 속삭이던 그때에도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기만이 되는 존재였던 걸까.
“나는 성현이를 아주 어렸을 때부터 봐 왔습니다. 그만큼 아끼고, 가족으로서 사랑하고 있어요. 성현이한테 이 엄청난 기회를 엮어 주기 위해서 내가 얼마나, 갖은 노력을…… 했는지 알면 절대…….”
태준이 이를 악물고 뇌까렸다. 그의 얼굴이 놀라우리만치 순식간에 검붉게 달아올랐다. 격앙된 목소리가 손톱으로 유리창을 긁어내리는 것처럼 갈라져 나왔다.
“한아연 씨가 한번 말해 봐요. 그깟 기사야 치워 버리면 그만인 것을 내가 뭐 하러 귀한 시간 버려 가며 여기 이렇게 앉아 있을까.”
길게 꼬고 있는 다리 아래 잘 닦인 구둣발이 까딱거렸다. 고개를 슬쩍 기울인 태준이 아연과 눈을 맞췄다. 기다란 입매가 삐뚜름하게 치켜 올라갔다.
“S대 나왔다죠? 나는 거기 떨어져서 재수까지 했는데도 결국 거긴 못 들어갔거든요. 똑똑한 한아연 씨는 내가 왜 아까운 시간을 들여서 여기까지 찾아왔는지 잘 알 것 같은데.”
이곳에 오기 전 차 안에서 몇 번이고 읽어 내렸던 기사의 내용이 머릿속에서 뒤엉켰다. 사생아. 바람기. 현직 국회의원. 헤드라인의 커다란 글씨가 불로 지진 도장처럼 가슴에 쾅쾅 박히는 것 같았다.
무심코 구기듯 손에 쥐고 있던 서류는 손바닥에 난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이 종이에 적힌 악의적인 글씨의 조합이 대체 몇 사람을 한꺼번에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 있을지.
아버지. 엄마. 우아하고 고상한 삶의 껍데기를 쥐었지만, 사생아의 존재라는 비수를 가슴에 묻고 사는 서류상의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 한 의원의 입지가 흔들릴 경우 함께 풍랑에 휘말리게 될 보좌 직원들까지.
이 순간 떠올릴 수 있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성현의 잘생긴 얼굴이 가장 먼저 생각난다는 게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아연은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어 차분하게 말했다.
“기태준 사장님이 염려하시는, 그런 사이 아닙니다. 이 사진에 찍힌 모습까지 부정하지는 않겠지만, 과한 근심을 하실 정도의 깊은 사이가…….”
입에서 흘러 나가는 목소리가 제 것 같지가 않았다. 고장 난 라디오처럼 뚝뚝 끊기는 음성에는 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은 것 같기도, 가장 절절한 심정이 실린 것도 같았다.
말을 끝마치는 순간, 바닥이 훅 꺼지는 것처럼 눈앞이 점멸했다. 아래로, 아래로 침강하는 의식 속에 유일하게 고개를 드는 건 죄책감일까, 미련일까.
태준이 빈정거리며 웃었다.
“말이 잘 통하는 것 같아서 다행이에요. 얼굴만 예쁜 줄 알았는데, 머리도 그럭저럭 돌아가는군요.”
결국 이것은 우아한 방식의 협박이었다. 최선을 다해 막았다는 기사는 어느새 태준의 무기가 되어 잘 벼린 칼날처럼 아연의 목을 향하고 있다.
“비록 한아연 씨와 난 오늘 여기에서 처음 만난 거지만, 성현이와의 오랜 인연을 생각해서 가혹하게 굴고 싶지는 않아요. 그쪽에서 노선 정리만 제대로 하면 복잡하게 꼬일 것도 없고, 여기서 그 누구도 망가지지 않을 겁니다.”
아연의 손 아래서 반쯤 구겨지고 해진 종이를 태준이 툭툭 건드렸다. 종이가 팔락거릴 때마다 글자들이 어지러이 일그러졌다. 마지막까지 태준은 치졸한 경고를 잊지 않았다.
“한 의원님 아직 쟁쟁하신데, 다음번 선거도 치르셔야 하지 않겠어요?”
“……더 말하지 않으셔도, 무슨 뜻인지 알고 있습니다. 걱정하실 일 없을 거예요.”
말끝을 줄인 아연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인사를 남기고 차 문을 여니 미지근하게 익은 여름 한낮의 공기가 훅 끼쳐 들었다.
차가 세워진 장소에서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한강의 수면이 잘 닦인 유리 표면처럼 눈부시게 반짝거렸다. 세상 평화롭기만 한 광경에 왈칵 목이 메었다.
뒤통수에 끈덕지게 꽂히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차에서 내려선 아연은 끝내 돌아보지 않았다.
* * *
무슨 정신으로 태준과 만났던 장소를 벗어났는지 기억조차 흐릿했다.
대학생 때 생애 단 한 번 술에 만취해서 필름이 끊겼던 적이 있다. 술은 단 한 방울도 마시지 않았는데도 딱 그때처럼 의식이 군데군데 끊겨서 뒤죽박죽 뒤섞이는 것만 같았다.
“왜 내가 골라 줬던 옷 입지 않고. 그래도 뭐 사람 같아 보이게는 차려입었네. 네가 웬일로 이런 옷을 다 샀어?”
결혼식장에서 만나자마자 희수는 아연의 옷매무새를 집요하게 뜯어보며 자신의 감상을 읊었다. 평소 부리던 신경질에 비하면 한풀 꺾인 목소리가 아연의 차림새에 꽤 만족한 듯한 반응이었다.
태준과의 만남 후, 집에 돌아가서 옷을 차려입고 엉망이 되어 버린 화장을 새로이 한 다음 몇 번이고 거울 속의 모습을 체크했다. 다행스럽게도 희수는 그런 아연에게서 이상한 기색을 읽지 못한 듯했다.
한데, 성현의 눈에는 그게 빤히 보였던 것일까.
멀리서 아연을 발견한 그가 희수와 함께 서 있는 그녀 쪽으로 다가왔다. 반갑게 인사하는 희수에게 언제나처럼 그럴싸한 미소로 화답한 성현이 아연만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미세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아연은 발끝에 힘을 주고 섰다. 온몸에 쥐가 난 것처럼 지끈거리고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평온을 가장하고 싶어서 몇 번이고 마른침을 삼켜야 했다.
그저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어머니를 대하듯 성현은 요령 좋은 태도로 희수와 짧은 이야기를 나눴다.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 돌아서서 멀어지는 성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희수는 먹음직스러운 음식을 눈앞에 두고도 먹지 못하는 사람처럼 입맛을 다셨다.
“정말이지 잘 자랐다니까. 저런 애를 어떤 복 받은 집안에서 데려갈지, 벌써부터 배가 다 아프네.”
성현은 그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에게 금세 둘러싸였다. 희수는 그런 성현에게서 아쉬운 눈길을 떼지 못했다.
“너는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그렇게 지겹도록 붙어 다니면서, 어떻게 된 애가 사고 한 번을 치지를 않는지.”
아연의 몸이 흠칫 굳었다. 아연에게 바짝 붙어선 희수가 팔짱을 끼어 오며 목소리를 낮췄다.
“성현이 쟤 그렇게 눈이 높은 거니? 아니면 그냥 목석인 건지. 거기에 무슨 문제 있는 거 아니니?”
“엄마. 누가 들어…….”
아연이 울상이 된 얼굴로 애원했으나 희수는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어디 하나 고장 난 것도 아니라면, 넌 대체 뭐가 문제라서 매일같이 붙어 다니는 남자애한테 여자로서 전혀 어필을 못 하는 거니? 내심 기대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이거야 원.”
희수가 못마땅하게 혀를 쯧 찼다. 젊은 혈기에 확 사고라도 쳐서 금테 두른 발목을 확 낚아채 올 줄 알았는데 내가 꿈이 커도 너무 컸지. 희수의 중얼거림 사이로 삐 하고 찢어지는 듯한 이명이 울렸다.
고막이 후벼 파이는 듯한 감각과 함께, 몇몇 빛바랜 장면들이 필름처럼 스쳐 지나갔다.
귀가 닳도록 혼전순결의 중요성을 읊던 희수가 학교 다닐 적 이따금 성현이 집에 놀러 올 때면 매번 아연과 성현을 2층 방으로 몰아넣었다. 그러고는 꼭 방문을 꼼꼼하게 닫고 나가곤 했다.
문을 닫기 직전까지 방 안을 빤히 들여다보던 그녀의 끈덕진 시선이 무슨 욕망을 품고 있었는지, 어째서 그땐 눈치채지 못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