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화 (47/96)

<47화>

‘이게 무슨…….’

머릿속에 흐릿한 기억이 쏜살같이 스쳐 갔다.

언젠가 직원 두 사람과 회식을 마치고 집까지 민재와 함께 걸었던 길. 갑작스럽게 뒤에서 빠른 속도로 튀어나왔던 킥보드. 사람을 칠 뻔해 놓고 일말의 동요하는 기색도 없이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유유히 멀어지던 시커먼 뒷모습.

사진 속의 두 사람은 그런 사건과는 상관없이, 공교롭게도 그저 남자가 여자를 끌어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무슨 의도를 가지고 이런 교묘한 타이밍의 사진을 찍었는지, 예사롭지 않은 악의가 선명히 느껴졌다.

아연은 손의 떨림을 멈춰 보려고 빈주먹을 쥐었다 폈다. 서류를 들고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첫 번째 장을 넘기자, 기사 형식으로 쓰인 글의 헤드라인이 눈에 들어왔다.

「현직 국회의원의 아리따운 사생아, 대물림된 바람기가 미친 곳은?」

전신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조여드는 것 같았다. 어디서 불어오는지 모를 한기로 이가 딱딱 부딪쳤다. 서류를 쥔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이 기사는 대체 무엇인지.

아연은 글을 몇 번이고 읽어 내렸다. 머릿속에 홍수가 난 것처럼 엉망으로 뒤엉킨 내용들이 휩쓸려 갔다가 또다시 밀려들었다. 문장이 아닌 단어들이 어지러이 뒤섞였다.

전직 검사장. 중혼. 혼외 출산. 재벌 3세. 밀회.

침몰한 배처럼 깊게 잠식되어 소용돌이치던 의식을 건져 올린 것은 냉랭하고 사무적인 목소리였다.

“내리십시오. 기다리고 계십니다.”

달칵, 하고 열린 뒷좌석 문 너머로 눈부신 햇살이 내리쬐었다. 아연은 눈살을 찌푸리며 차에서 내려섰다. 차가 세워진 곳은 한강 둔치였다.

먼저 도착해 아연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선팅이 진하게 된 새까만 세단이 햇볕을 뜨겁게 반사하고 있었다. 세단 옆에 서 있던 중년의 남자가 아연에게 말없이 묵례를 보내고 차 문을 열어 주었다. 차 안쪽에 길게 꼬고 있는 다리가 보였다.

“타세요.”

떠밀리듯 뒷좌석에 올라탔다. 손에 쥐고 있다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했던 서류 뭉치가 바스락거리며 구겨졌다. 아연은 식은땀이 밴 손바닥을 종이 위에 문지르며 눈을 들었다.

* * *

“약속도 없이 이렇게 갑자기 불러내서 미안해요.”

태준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비스듬하게 기울였다.

“내가 요즘 워낙 바빠서 따로 시간을 내기도 어렵고, 한데 상황은 굉장히 급박해서 초면에 결례를 범했네요. 아, 초면은 아닌가?”

기억을 더듬는 것처럼 태준은 잠시 허공을 응시했다.

“성현이랑은 어려서부터 친구였다고 들어서. 지나가면서라도 본 적이 있나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처음 보는 것 같네요. 맞죠?”

네, 라고 대답을 하려 했지만 목구멍이 무언가로 꽉 막혀 있는 것처럼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아연은 간신히 몸에 힘을 주면서 고개를 들었다.

성현의 매형이자 태강바이오의 사장인 기태준을 직접 대면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 정도는 알고 있었다. 태준 역시 총수 일가에 속하기에 권민환 회장이나 권윤재 부회장만큼 자주 언급되는 것은 아니지만, 언론을 통해 종종 그의 얼굴을 접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아연도 그런 자신을 알 것이라 여겼는지 태준은 자신의 소개조차 하지 않고 즉시 본론을 꺼냈다.

“사진이랑 기사는 오는 길에 봤죠? 어떻게 전달하면 좋을지 좀 고민했는데, 서로 시간이 중한 사람들이니까 시간도 아낄 겸.”

“봤습니다. 근데 대체 어떻게 된 건지 전 이해가…….”

아연의 입에서 꽉 잠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무심코 손에 힘이 들어가 서류가 더욱 구겨졌다.

“잠깐. 우선 내가 먼저 말할게요. 어떤 점에서 이해가 안 되는지는 내 설명 다 들은 후에.”

태준은 제 말을 끊은 게 언짢은 듯 손을 들어 아연을 제지하고는 말을 이었다.

“기사는 아직 언론에 배포되기 전의 것을 우리 홍보실에서 입수한 거예요. 같이 있던 사진도 마찬가지. 예정대로라면 오늘 아침 조간 기사로 흘러 나갔을 테지만…….”

아연이 불쑥 고개를 들자 걱정하지 말라는 양 태준이 미소를 지었다. 사정없이 흔들리는 눈망울을 주시하며 그가 혀를 쯧 찼다.

“당연히 최선을 다해서 막았어요. 기사 내용 보았다시피 메인 줄기는 한아연 씨를 다루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화살은 교묘하게 성현이를 향해 보란 듯이 까 내리고 있죠. 요즘 언론에서 가장 다루기 좋아하는 인기 최고의 재계 인사잖아요, 성현이가.”

태준은 꼬고 있는 다리 위에 올려 둔 두 손으로 깍지를 끼며 엄지를 마주 비볐다. 얄팍한 입술이 심술궂은 모양새로 씰룩거렸다.

“하마터면 지저분한 추문에 얽혀서 곱게 쌓아 올린 황태자의 대외적인 이미지가 바닥에 처박힐 뻔했지.”

지저분한 추문……. 그게 곧 아연 자신을 뜻한다는 것을 모를 수 없었다.

“사실이, 아닙니다.”

기사의 내용을 부정하는 순간에도 사생아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아연은 애써 그것을 외면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진에 찍힌 사람은 제가 운영하는 카페의 직원이에요. 제가 길에서 누군가와 부딪칠 뻔한 걸 도와준 것뿐인데,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좋게 찍혔지만…….”

“미안하지만, 그게 누구인지는 관심 없어요.”

태준이 눈썹머리를 문지르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한아연 씨가 길에서 그 직원과 끌어안든 입을 맞추든, 실제로는 그 직원과 아무 사이도 아니든 어떻든, 사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아요. 이 기사가 흘러 나간다면 보게 될 사람들도 그런 거에 관심 없는 건 마찬가지일 거고. 이 기사가 흥미로운 건 재벌 3세가 치정에 얽혀 있다는 거죠.”

태준의 마른 뺨이 꿈틀거렸다. 재미있다는 듯이 웃는 것도 같았다.

“황태자로 추앙받던 평소의 이미지와는 달리 고작 바람기 많은 여자의 손바닥 안에서 농락당하고 있다는 의외성이 대중의 구미를 당기니까.”

긴장으로 작게 옹송그린 어깨를 흘끗 바라본 태준이 낮게 뇌까렸다.

“아, 거기 언급된 현직 국회의원이 누구인지 정도는 대중들이 궁금해할 수도 있겠네요.”

아연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출생에 대한 숱한 소문이 주변에 무성하게 떠다녔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수면 위로 드러난 적은 없었다.

검사장 출신 현직 국회의원의 사생아.

아연을 나타내는 그 표현은 사실이기도, 거짓이기도 했다. 엄연히는 혼외 자식이 맞지만, 법적으로는 온전히 한 의원의 자식이다. 물론 한 의원의 본처이자 서류상의 어머니와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아연은 허리를 꼿꼿이 펴고 이를 악물었다. 보이지 않는 수백 개의 돌멩이가 온몸을 때리는 것만 같았다. 그럴수록 아연은 더욱 몸에 힘을 주고 버텼다.

“이렇게 악의적인 기사는 본 적이 없어요. 이 정도면 분명히 명예훼손감인데 어떻게 이런 기사가 나갈 수 있는지 납득이…….”

“그런 걸로 감수해야 할 손해보다 이 기사를 냄으로 인해 벌어들일 수익이 더 클 테니까.”

태준은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으쓱 추켜올렸다.

“어쨌든 그건 걱정하지 말아요. 말했잖아요. 우리 홍보실에서 최선을 다해서 막았다고. 한아연 씨의 개인사가 까발려지는 일은 없을 거예요. 뭐, 아마도 당분간은.”

까발려지더라도 저와는 상관없다는 듯이 무성의하게 중얼거린 태준이 좌석에 기대고 있던 상체를 세웠다. 오는 길에 보았던 사진 중의 하나인, 아연과 성현이 함께 찍힌 사진을 손가락 사이에 끼워 아연에게 보여 주며 그가 말했다.

“이제 이 사진에 관해서 이야기해 볼까요?”

입에 풀이라도 붙여 놓은 것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이제부터가 진정한 본론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태강그룹 총수 일가의 발이라 불리는 기태준 사장이 굳이 직접 자신을 찾아왔을 리가 없을 테니까.

너와 관련된 추잡한 기삿거리를 사전에 막았노라. 겉으로 드러낸 껍데기는 친절에 가까웠으나 그 밑에 도사린 속뜻은 명징한 불안감을 일으켰다.

아연을 잠시 가만히 응시하던 태준이 여상한 말투로 물었다.

“최근에 언론에서 권성현 팀장, 아, 이젠 본부장이지. 뭐가 됐든, 성현이를 다루는 분위기가 어떤지는 압니까?”

태준은 사진 끝을 손톱으로 긁어내렸다. 코팅된 종이가 허옇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아연이 시선을 들자, 태준이 단어 한 자 한 자에 힘을 실으며 말했다.

“태강그룹의 얼굴 반반한 황태자. 온실 속의 화초. 세습 경영. 순혈주의. 권성현 본부장을 향한 언론의 시선이 곱지만은 않다는 건 당장 포털에 뜬 기사 몇 줄만 읽어 보아도 알 수 있을 겁니다.”

태준이 시선을 비스듬하게 돌려 밝은 햇살이 반사되어 반짝거리는 한강의 수면을 응시했다.

“그룹 차원에서 대응을 하고 있지만, 우후죽순처럼 터지는 기사들을 일일이 챙길 수도 없을뿐더러, 너무 깊게 관여했다가는 재벌이 언론을 관리하려 한다는 시선을 사기 좋으니 한계가 있어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자연스럽게 긍정 여론을 형성하는 방법이 유일하죠.”

그의 도드라진 목울대가 눈에 띄게 꿀렁거렸다.

“의외죠? 혹자들은 우리 태강그룹이 대한민국을 쥐락펴락한다고들 말하지만, 실제로는 우리 발을 묶고 있는 장애물들이 꽤 많은 게 현실이라.”

‘장애물’이란 단어를 입에 올리는 순간 태준이 먼 곳을 응시하던 시선을 돌렸다.

꿰뚫어 보는 듯한 날 선 눈길이 허공을 가르며 아연에게 쏟아졌다. 당장 눈앞에서 치워 버리고 싶은 귀찮은 물건을 보는 양 찌푸린 눈매가 사납게 꿈틀거렸다.

“중요한 시기예요. 한아연 씨가 세상 돌아가는 사정에 얼마나 관심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권 회장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사실 정도는 알 겁니다. 덕분에 나라 전체가 시끌시끌 뒤숭숭하니까.”

태준이 짓씹듯이 말했다.

“조만간 권윤재 부회장에게 승계가 이루어질 거란 전망이 많지만, 그룹 내부적으로는 굉장히 혼란스러운 상황이에요. 그룹 내 성현이의 입지는 좁고, 미미하죠. 그런데 이런 위태로운 시기에, 고작 이따위 사진이나 찍혀 가면서…….”

태준의 손안에서 사진이 볼품없이 구겨졌다. 하지만 아연에게 시선을 고정한 그는 정작 자각조차 못 하는 듯했다.

“저 혼자 유유자적, 철없는 사랑놀음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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