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 마음에 들어?
전화를 걸자마자 인사도 없이 성현이 대뜸 물었다.
“이건 왜 보냈어? 내가 결혼식에 입고 갈 옷이 없을까 봐서?”
- 입고 갈 옷이야 있겠지. 내 옷 쇼핑하는 김에 골랐어. 그냥 요즘 같은 날씨에 너한테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아연은 핸드폰 너머로 성현의 말을 듣고 코웃음을 쳤다. 쇼핑만큼 그가 귀찮아하는 것도 없다는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닌데, 말이 되는 핑계를 대야지.
“너 쇼핑 싫어하는 거 아는데.”
- 좋아졌어.
어처구니없는 소리에 연이어 실소가 터졌다. 좋아지기는 뭐가 좋아져…….
그가 직접 매장을 돌아다니며 여성복을 골랐을 리는 만무했다. 카탈로그를 보고 골랐다면 모를까.
하지만 성현이 그녀의 옷을 고르겠다고 진지한 얼굴로 카탈로그를 들여다보는 모습조차 상상이 되지 않았다.
대충 직원한테 시켰겠지.
아까 집에 와서 아연에게 옷을 건네주었던 사람을 문득 떠올리니, 아마도 그의 지시를 받아 옷을 골라 온 퍼스널 쇼퍼이지 않을까 하는 추측으로 이어졌다.
“언제부터?”
- 지난번에 호텔에서 네 옷 골랐을 때부터.
아아.
성현이 지난 속초 여행에서의 일을 언급하자 어쩐지 말문이 막혔다. 아연은 소리 없이 마른침을 삼켰다. 대답 없이 흐르는 정적에 성현은 아무렇지 않게 말을 돌렸다.
- 이따가 데리러 갈까?
“아니. 엄마랑 가기로 했어.”
- 그래, 그럼. 거기서 보자.
성현은 더 이상 길게 묻는 법 없이 전화를 끊었다. 통화가 끊긴 핸드폰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아연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눈을 들어 어젯밤에 꺼내 둔 옷을 쳐다보았다.
오롯이 희수의 취향인, 은사가 섞인 옅은 오트밀색 트위드 투피스. 당연하게도, 그녀가 오늘 아연을 위해 미리 골라 준 옷이었다.
태강그룹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나라 경제를 쥐락펴락하는 DH그룹 총수 일가에서 치르는 결혼식인지라 희수뿐만 아니라 아버지, 강준도 참석할 터였다. 그런 자리인 만큼 희수는 며칠 전부터 아연의 집을 들락거리며 제 결혼식이라도 준비하는 양 수선을 떨었다.
아연은 성현이 보내온 옷을 내려 투피스 옆에 나란히 뉘어 보았다.
어쩜 이렇게 두 벌 모두 고른 사람의 성격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는지. 화려하면서 우아한 투피스에 비해 상아색 원피스는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세련된 디자인이었다.
아연은 잠잠한 눈길로 두 벌의 옷을 내려다보며 며칠 전의 일을 회상했다. 말도 없이 맞선을 펑크 내고 핸드폰을 꺼 두었던 날 이후 처음 희수를 만났던 날이었다.
핸드폰 전원을 켜자마자 전화가 빗발치리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우려와는 달리 고요하고 평화로운 날이 며칠간 이어졌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오히려 기묘한 평화에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가고 있었다.
‘사장님! 어머니 오셨어요.’
그러다 갑자기 희수가 카페에 나타났고, 아연은 올 것이 왔구나 하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그러나 정작 희수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예상 밖의 것이었다.
‘엄마, 그날 일은…….’
‘잘했어.’
‘……잘했다니?’
‘그렇지 않아도 그쪽에서 우릴 우습게 여기는 것 같아서 여간 마음에 안 드는 게 아니었는데, 네가 그날 그렇게 바람맞히고 나니 오히려 남자 쪽에서 마음이 동한 모양이야. 아쉬운 게 누구 쪽인지 깨달은 거겠지.’
‘…….’
‘잡힐 듯 말 듯, 줄 듯 말 듯 하는 게 얼마나 남자를 안달 나게 하는데. 뻔하디뻔한 남자들 습성이지. 남자에는 젬병인 애가 웬일로 그럴듯한 짓을 다 했네. 그날 이후로 태도가 아주 180도 바뀌었어.’
희수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테이블에 놓인 커피 잔을 집어 들었다. 카페에 찾아온 이래, 예의상 내어 준 커피를 그녀가 입에 대는 것은 처음이었을 것이다. 한 모금 삼키더니 미간을 노골적으로 찌푸린 희수가 잔을 달칵 내려놓았다.
‘한 의원님한테도 가서 이 결혼이 성사되면 추진할 사업에 몇 가지를 추가 제안한 것 같더라. 아주 만나기도 전에 벌써 몸이 저만치 달아 있으니, 이제 네 얼굴만 보여 주면 금세 넘어올 기세라니까.’
그 뒤로 이어진 다소 상스러운 표현을 떠올리자 다시금 귓등이 뜨거워졌다. 누가 들을까 염려하며 주위를 살피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던, 멍청하고 한심한 자신의 처지도.
아연은 손등으로 뜨끈한 뺨을 문지르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요즘 들어서는 잠시만 정신을 놓으면 생각이 너무 많아졌다. 고민과 번민, 지난한 걱정거리. 어디로 발을 내딛는지에 따라 도미노처럼 발밑이 와르르 무너질 것 같은 불안한 기분에 자주 휩싸이곤 했다.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아연은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겼다. 더 깊은 생각에 잠식되지 않으려면 몸을 바쁘게 움직이는 게 나았다.
결혼식은 오후 5시. 시간상으로는 여유가 있었다. 그동안 미뤄 왔던 대청소를 해치울 생각으로 잰걸음으로 창문으로 다가간 아연은 거실 창문을 활짝 열었다.
미지근한 공기가 산들바람과 함께 집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바람을 맞는 건 오랜만이라 창밖으로 살짝 고개를 빼 보니, 빌라 건물 바로 옆에 있는 키 큰 나무가 여름 날씨에 잎이 더욱 울창해져 있었다.
바람에 파도처럼 물결치는 나뭇잎들을 가만히 바라보는데, 문득 성현과 함께 보았던 바다가 떠올랐다. 단단한 어깨에 고개를 기대고 하염없이 바라보았던 아름다운 짙푸른색 무리.
아연은 도망치듯이 창가를 벗어났다. 이래서야 차라리 카페에 출근하는 게 나았겠다는 후회가 밀려들었다. 적어도 일하는 동안에는 쓸데없는 감상에 빠지지는 않을 테니까.
집 안의 적막함이 까닭 모를 불안감을 부추기는 것 같아 텔레비전을 튼 아연은 음악 방송에 채널을 고정해 놓고 청소기를 돌렸다.
청소를 마칠 무렵 타이밍 좋게 베란다에서 세탁이 종료되었다는 알림음이 울렸다. 세탁물을 건조기에 옮긴 후 건조기를 실행시키고 거실로 돌아오자 거실 테이블 위에 엎어 둔 핸드폰이 드르륵 진동하고 있었다.
핸드폰을 뒤집어서 화면을 보니, 연락처가 저장되지 않은 번호로부터 온 전화였다. 거래처로부터 이따금 이런 식의 전화가 걸려 오는 일이 없지 않은데, 어째서인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아연은 끊길 듯 끊기지 않고 끈덕지게 이어지는 전화의 반짝거리는 화면을 응시하다가 이윽고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한아연 씨 되시나요?
대뜸 이름부터 묻는 음성이 낯설었다. 차분하고 나직한 여자의 목소리는 굉장히 사무적으로 들렸다.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기억에 걸리는 인물은 없었다.
“네.”
한 음절의 대답이 목구멍에 걸린 것처럼 몹시 뻑뻑해서 목소리가 간신히 비어져 나왔다. 그마저도 상대방이 눈치채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볼품없이 떨리고 있었다.
- 잠시 시간 좀 내주시겠어요? 한아연 씨 뵙기를 원하는 분이 있으십니다.
예의 바른 말투를 가장하고 있었으나 단호한 어조에는 은근히 고압적인 분위기가 흘렀다.
“죄송하지만, 누구신지…….”
- 태강이라고만 전하라 하십니다.
귀에 심장이라도 달린 것처럼 맥박이 두근두근 뛰었다. 그 소리가 너무 요란해서 그 외에는 어떤 것도 잘 들리지 않았다. 무슨 말인가 간신히 대답을 했는데, 무성영화를 들여다보고 있는 것처럼 자신의 목소리조차 그저 아득하게만 들렸다.
먹먹한 귓가에 지나간 대화만 부질없이 맴돌았다.
‘언제까지?’
‘너한테 전적으로 선택권을 줄게.’
‘선택권이라면?’
‘네가 질릴 때까지.’
아마도 그게 권성현이 제게 한 유일한 거짓말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처음부터 선택권이란 없었다.
* * *
엘리베이터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그 너머에 검은색 정장을 입은 여자가 서 있었다.
여자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조금 전 통화했던 목소리의 주인공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약속을 정하면 시간을 내겠다고 말했더니, 지금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다소 막무가내식의 대답이 돌아왔다.
집 주소를 어떻게 알고 찾아왔냐는 말을 하려다 그만두었다. 태강이라고 전하면 군말 없이 시간을 내줄 거라는 상대의 확신 어린 태도에서 겨우 집 주소뿐만이 아니라 더한 것도 알고 있다는 무언의 뜻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차로 모시겠습니다.”
여자의 안내에 따라 아연은 주차장에 세워져 있던 차에 올라탔다. 뒷좌석 문을 닫아 준 여자는 조수석에 오른 후 운전석에 앉은 기사에게 고갯짓을 보냈다.
태송현으로 가는 걸까, 아연이 생각하는 사이 차가 부드럽게 출발했다. 그리고 동시에 서류 봉투 하나가 뒷좌석으로 넘어왔다.
“오는 길에 확인해 보라셨습니다.”
아연에게 봉투를 건넨 여자는 고개를 돌려 정면을 보고 앉았다.
아연은 봉투를 열었다. 어둑한 봉투 안이 곧 자신을 집어삼킬 아귀의 입처럼 느껴졌다.
깔끔하게 철해진 종이와 사진 몇 장이 딸려 나왔다. 무릎 위로 떨어진 사진을 주워 올릴 수조차 없어 아연은 그것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성현과 자신이 함께 찍힌 사진. 머리를 맞대고 바닷가에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이 여느 평범한 연인 같아 보여서 왈칵 목이 메었다.
불쑥 치밀어 오르는 무언가를 간신히 삼키고 아연은 무릎에 떨어진 사진들 중 뒤집혀 있던 사진을 집어 들었다. 성현과 같이 찍힌 또 다른 모습일 거라 예상했는데 사진 속의 장면은 너무도 의외의 것이었다.
사진 속의 남자가 여자를 품에 당겨 안고 있었다. 여자는 당연하게도 그녀 자신이었는데, 남자는 성현이 아니었다.
아연은 사진 속의 인물인 민재의 얼굴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응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