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화 (45/96)

<45화>

밤새 아연을 괴롭히던 때의 모습과는 달리 말끔하게 차려입은 성현이 어울리지 않게 쇼핑백을 달랑거리면서 물었다.

“응.”

“몸은?”

민망하게 그런 걸 왜 물어.

아연이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리자, 새삼스럽게 부끄러워하느냐는 듯 성현이 웃었다.

“아침까지 같이 있었던 건 처음이잖아. 맨날 누가 꽁지 빠지게 집으로 도망가 버리는 바람에.”

“꽁지가 빠지긴 누가.”

아연은 모른 척하며 새침하게 대꾸했다. 성현의 말처럼 하루가 멀다 하고 뜨겁고 격렬한 밤을 보낼 때마다, 아무리 늦은 시간에도 축축 늘어지는 몸을 악착같이 일으켜 꾸역꾸역 집으로 돌아가던 그녀였다.

이미 선을 한참 넘어선 짓을 저지르고는 있다지만, 나름대로 정해 둔 규칙이었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스러질 것을 알았다면, 성현이 그냥 자고 가라고 할 때마다 괜히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잘난 척이나 하지 말걸.

아연은 괜스레 성현이 테이블에 내려놓은 쇼핑백을 들춰 보며 말을 돌렸다.

“이건 뭐야?”

“네 옷. 지저분해졌잖아. 호텔 안에 있는 매장이 몇 군데 열었길래.”

성현은 별거 아니란 투로 말했다. 하지만 듣는 아연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제 옷이 왜 지저분해져 버렸는지를 떠올린 까닭이었다.

“무슨 생각 하는데, 얼굴이 벌게져서는. 엄청 꼴린 표정인데.”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성현이 뒤에서 아연의 골반을 쥐어 당기며 속삭였다.

“무슨, 이상한 소리. 그런 적 없거든?”

“발뺌하기는. 그거 알아? 너, 여기까지 빨개졌어.”

기다란 손가락이 아연의 목선을 쓸어내렸다. 간지러운 손길을 따라 소름이 오소소 솟아올랐다. 아연은 어깨를 움츠리며 몸을 떨었다. 낮게 키득이는 소리가 놀리듯이 귓전을 울렸다.

“한 번 더 하고 나갈까.”

맞닿은 하체를 의도적으로 비벼 대며 속삭이는 음성이 노골적이었다.

“됐어……. 흣, 밤새 그렇게 해 대고 지치지도 않아? 나 이제 힘들어.”

“한 번만. 응?”

애원하듯이 말하면서 가슴을 움켜쥐고 주물럭거리는 손길은 무도하기 짝이 없었다. 습관처럼 아래가 젖어 들었다.

“…….”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한숨과 뒤섞인 신음을 내쉼과 동시에 털썩, 등 뒤에 푹신한 침대가 닿았다.

* * *

체크아웃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나서야 두 사람은 호텔을 나섰다. 늦은 점심으로 호텔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식당에서 유명하다는 해물전골을 먹었다.

부른 배를 두드리며 나온 뒤에는 속초에 온다면 꼭 한번 가 보고 싶었던 카페로 향했다. 집에 있을 때 지역의 유명한 맛집을 소개하는 방송을 틀어 놓는 것을 좋아하는 아연이 언젠가 방송에서 본 가게였다.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입력하는 아연의 손이 신나 보였는지, 성현이 전방에 시선을 둔 채로 피식거리는 게 느껴졌다.

해변 도로를 따라 성현의 차가 여유 있게 달렸다. 창문을 내리자 시원한 바닷바람과 비릿한 바다 내음이 밀려들었다.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기며 아연은 입꼬리를 올렸다.

“좋다…….”

무심코 중얼거리며 창문 바깥으로 슬며시 손바닥을 내밀었다. 넓게 편 손가락 사이사이로 바람이 휘감기는 느낌. 그 느낌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어서 아연은 몇 번이고 허공에서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따사로운 햇살이 수면 위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아연은 바다가 꼭 성현의 눈동자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 하나 정도는 왈칵 집어삼키고 든든하게 품어 줄 것만 같은, 끝없는 바다.

짙푸른 바다를 옆에 두고 한참을 달리던 차는 내비게이션 안내에 따라 옆길로 빠지며 속도를 줄였다. 한갓진 도로를 지나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내비게이션의 안내 멘트와 함께 2층짜리 건물이 눈앞에 나타났다.

포장이 되지 않아 뿌연 흙먼지가 이는 주차장에 차를 댔다. 안전벨트를 풀어 줄 생각으로 성현이 몸을 비트는데 아연은 이미 조수석 문을 열고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자기도 카페 사장이면서 남의 카페에 온 게 뭐가 저리 좋은 건지. 하여간 단거라면 좋아서 정신을 못 차리지.

성현은 웃음 띤 얼굴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아연의 뒤를 따랐다. 그녀의 부드러운 갈색 머리카락이 햇살을 받아 반짝거리는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나무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이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가벼웠다. 종종거리며 걷는 뒷모습을 뒤에서부터 확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몇 번이고 억눌러야 했다. 겉으로는 점잖은 척 걷는 스스로가 우스울 지경이었다.

먼저 가게에 들어간 아연은 가게 직원으로부터 무언갈 건네받았다. 뒤에 따라붙어 선 성현이 아연이 쥐고 있는 것을 슬쩍 내려다보았다. 은행에서나 받음 직한 번호표였다.

“커피 받으시려면 두 시간 후에 오시면 돼요.”

두 시간?

성현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그는 제 귀를 의심했다.

어느 유명한 식당에 가더라도 비서에 의해 이미 사전에 예약이 되어 있거나, 혹은 그의 얼굴을 알아본 사장이나 직원이 버선발로 뛰쳐나오거나, 둘 중의 하나에 속했던 성현으로서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기 위해 무려 두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이 몹시 당황스러웠다.

슬며시 주위를 둘러보니 가게 안쪽에서는 음료를 만드느라 정신없는 직원들이 너덧 명 보였다. 마침 음료를 받아 가던 다른 손님 무리도 있었는데, 그들 역시 아연이 손에 쥐고 있는 번호표와 유사한 종잇조각을 카운터 너머로 내밀고 있었다.

세상에. 기껏 커피 한 잔 마시자고 두 시간을 기다리는 세계가 있었다니.

생전 처음 겪는 일에 절로 얼빠진 표정이 튀어나오려 했다. 옆에 선 아연은 이러한 주문과 대기 시스템을 이미 알고 있었는지 전혀 놀라지 않은 것 같았다.

그때 고개를 돌린 아연이 황당한 기색으로 굳어진 성현을 발견하고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세상사에 어두운 도련님을 비웃는 듯한 웃음이었다.

자존심에 미세하게 금이 가는 걸 느끼며 미간을 찌푸리던 성현이 갑자기 아연의 팔을 턱 붙잡았다. 두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는 소리에 정신이 팔린 사이, 아연이 제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고 있는 게 아닌가.

“잠깐. 뭐 하는 거야.”

“커피 정도는 내가 사려고…….”

누굴 여자한테 커피나 얻어먹는 등신으로 만들려고.

성현이 말없이 눈을 희번덕거렸다. 아연은 마지못해 지갑을 다시 가방 안에 넣었다.

“감사합니다! 그럼 이따가 커피 받으러 오세요.”

주문을 마친 두 사람은 직원의 인사를 뒤로하고 커피숍에서 걸어 나왔다. 자연스럽게 아연의 손을 잡은 성현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우리, 두 시간 동안 뭐 할까.”

아연은 지독하게 달콤한 것을 삼킨 사람처럼 눈을 찡그렸다. 심장이 고장 난 것처럼 날뛰고 있었다.

* * *

커피를 기다리는 시간 동안 가까운 거리의 해변을 거닐었다. 어젯밤 갔던 해변과는 달리 모래사장이 길고 넓게 이어져 있어서 그런지, 두 사람 외에도 해변을 걷는 사람들이 꽤 여럿 눈에 띄었다.

손을 잡고 걷다가 해변 중간쯤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무렇게나 앉으려는 아연을 잠시 제지한 성현은 제 슈트 상의를 벗어서 모래 위에 깔았다.

그가 입는 옷의 가격을 대충이나마 아는 탓에 그걸 마구 깔아뭉개기가 망설여졌지만, 정작 성현 본인은 별생각 없는 듯 모래사장에 아무렇지 않게 털썩 앉았다. 그러더니 앉지 않고 뭐 하냐는 듯이 아연에게 눈짓했다.

성현은 모래에 손을 짚고 상체를 뒤로 느슨하게 기울였다.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던 아연은 어느샌가부터 성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아연은 미지근한 바닷바람이 뺨을 간지럽히는 것을 느끼며 그가 출장으로 다녀온 곳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홍콩의 더운 공기, 물속을 휘적휘적 걷는 것처럼 높은 습도, 푸르게 우거진 야자수가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지는 것 같았다. 두 시간이 어떻게 지났는지 모를 정도로 아연은 그가 해 주는 이야기에 푹 빠졌다.

다시 찾은 카페에서는 커피 두 잔을 받으며 쇼케이스를 텅텅 비게 만들었다.

“내일 가져가면 직원들이 좋아하겠다. 안 그래도 민재 씨가 요새 마들렌 공부한다고 하던데.”

마들렌과 쿠키를 쓸어 담은 쇼핑백을 받아 들고 아연이 혼잣말처럼 말하자, 성현은 잠시 못마땅한 얼굴로 입술을 씰룩거렸다.

평소에도 그리 말이 많지는 않지만, 운전할 때의 성현은 더욱 조용한 편이었다. 아연은 바스락거리는 포장을 벗겨 낸 쿠키를 입에 물고 머리 위로 지나가는 녹색 이정표를 바라보았다.

「안녕히 가십시오. 강원도」

어째선지 마지막일 거란 생각이 들어 불쑥 목이 메었다.

목구멍에 꽉 차오른 무언가.

아연은 그저 입에 가득 문 쿠키 탓으로 돌리며 커피 잔에 손을 가져갔다.

코끝에 스치는 커피 향이 눈물 나게 향긋했다. 사이드미러에 비친 풍경 속, 이곳에서의 좋았던 기억과 되돌아가야 할 현실이 소용돌이처럼 뒤섞이며 어그러졌다.

그래서였다. 선팅이 짙게 된 차 한 대가 줄곧 뒤쫓아 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은.

* * *

“자꾸 왜 어울리지도 않는 짓이야.”

난감하다는 듯이 중얼거리는 아연의 입가에 어쩔 수 없는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아연은 옷걸이에 걸린 여린 상아색 원피스를 다시 바라보았다.

오늘은 동창인 진한의 결혼식이 있는 날이었다. 날이 날이니만큼 오늘 하루는 카페 일도 직원들에게 맡겨 놓고 외출 준비를 하기로 했다.

평소와 다르지 않은 시간에 일어나 샤워부터 하고 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리고 있는데, 이른 아침부터 현관 벨이 울렸다.

찾아올 손님도 없는데 의아해서 나가 보니, 처음 보는 여자가 환하게 웃으며 대뜸 커다란 부직포 가방을 내밀었다.

당황한 아연이 더듬더듬 뭐냐고 묻자, 사무적인 미소를 지은 여자는 자신은 그저 심부름 왔을 뿐이라며 아연에게 가방을 안겨 주고 사라져 버렸다.

망설이다가 열어 본 가방 안에 들어 있던 게 바로 지금 보고 있는 원피스였다.

이런 짓을 할 사람은 그녀가 아는 한 딱 한 사람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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