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오랜만에 만나서 그런지, 아니면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 성현과 있을 때는 단 한 번도 의식한 적 없던 정적이 왠지 어색했다. 차 안의 적막이 신경 쓰이는 건 저뿐인지, 성현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전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한참을 말없이 달리던 차는 어느덧 고속도로로 접어들었다. 아연은 잠자코 운전 중인 성현을 흘끔 바라보았다.
“말해 봐. 가고 싶은 곳.”
그녀의 시선을 느꼈는지 성현이 물었다. 빨리도 묻는다 싶었지만, 어쩐지 제 대답이 어디가 될지 그는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여유로운 태도였다.
종종 그랬다. 정작 그녀 자신도 모르는 제 속마음을 고스란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은 선명한 눈을 하고 있었다, 권성현은.
물결조차 일지 않는 새벽녘의 깊은 바다 같은 새까만 눈을 마주하며 아연은 대답했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
아무도 내게 기대하지도 강요하지도 않고, 아무도 나를 손가락질하지 않는 곳. 그런 조용한 곳으로 데리고 가 줘.
성현이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아연은 조용히 차창에 머리를 기대었다.
* * *
“정말 그때 왔던 곳이네.”
차에서 내려선 아연이 탄식했다.
눈앞엔 고즈넉한 해변이 펼쳐져 있었다. 사람 한 명 보이지 않는 모래사장에는 갈매기 두어 마리가 모래 위를 종종거리다가 두 사람이 낸 인기척에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갔다.
“여기 오는 길을 어떻게 기억해? 이름도 없는 해변을, 10년 전에 지나가듯이 들른 곳인데.”
아연은 경이로운 눈으로 성현을 올려다보았다.
눈앞의 바다는 10년 전에 보았던 때와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해풍에 휘어진 소나무들이 울창한 숲을 끼고 있는 해변은 여전히 작고 소담했다. 해변이 안쪽으로 들어와 있어서 그런지, 수면은 파도 하나 없이 잠잠하게 일렁거리고 있었다.
10년 전 수능을 막 끝낸 수험생 시절, 시험을 망쳤다고 생각한 아연이 한껏 울적해하던 때 성현이 바람이나 쐬자며 그녀를 데리고 왔던 곳이었다.
큰누나인 지연의 차 키를 슬쩍해서 타고 온 것을 나중에 들키는 바람에 화가 난 지연이 길길이 날뛰었다 들었다. 면허 딴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주제에 고속도로를 타고 속초까지 가는 정신 나간 놈이라며.
그때 정처 없이 해변 도로를 달리다가 우연히 발견한 이 작고 아담한 해변에 아연은 마음을 빼앗겼었다. 언젠가 다시 와 봐야지 생각해 놓고는 새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원래 한번 온 길은 안 잃어버려.”
별거 아니라는 투로 대꾸한 성현은 트렁크에서 담요를 꺼내 들었다. 반가운 마음에 아연이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주변 여기저기를 눈에 담는 동안 그는 그녀의 어깨에 담요를 두르고 꼼꼼하게 여며 주었다.
서울에서 이곳까지 오는 동안 이미 해는 훌쩍 져 버린 후였다. 저녁은 중간에 머문 휴게소에서 간단히 때웠다.
얼굴보다 커다란 왕돈가스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돌솥비빔밥을 먹었는데, 사방이 뻥 뚫린 휴게소의 커다란 테이블에 앉아 있는 성현의 모습이 주변의 풍경과 너무나도 이질적이라 아연은 한참을 웃었다.
성현은 그녀에게 고작 휴게소 음식을 먹인다는 게 마음에 안 든다는 기색을 보였지만 아연은 왠지 여행 온 기분이 나서 오히려 들떠 있었다. 아연이 비빔밥을 크게 뜬 숟가락을 내밀었을 땐 잠시 입술을 씰룩거리던 그도 잘만 받아먹었다.
“추우면 말해.”
바람 한 점 스며들 틈도 없이 아연에게 담요를 둘둘 말아 주고는, 성현은 치마 아래로 드러난 그녀의 맨다리를 염려스럽다는 듯이 내려다보며 말했다.
“안 추워. 여름인데 뭐.”
밤에도 아스팔트에 모아 두었던 열기를 내뿜는 도시와는 달리, 밤바다를 휘감는 공기는 계절이 무색하게 서늘하기만 했다. 그래도 답답했던 가슴이 시원하게 뻥 뚫리는 것 같아 아연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몇 걸음 내딛자 고운 모래 안으로 구두가 푹푹 빠져들었다. 아연은 성현의 팔을 잡고 서서 구두를 하나씩 벗기 시작했다.
“발 다치면 어떡하려고.”
“다쳐서 못 걸으면 네가 업어 주면 되지.”
장난스럽게 말하자 성현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아연이 손에 든 구두를 빼앗듯이 가져가더니 다른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어스름하게 달무리 진 밤하늘엔 도심에서는 볼 수 없는 별빛이 반짝거렸다. 고즈넉한 모래사장을 말없이 걷다가 시선이 마주치면 실없는 웃음이 터졌다. 그러다가 웃음이 잦아들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입술을 찾았다.
빨리고 빨다가 가쁜 숨을 터뜨리며 헐떡이면 귓가로 옮겨 간 입술이 뜨거운 열기를 전했다. 아연은 팔을 뻗어 성현의 목을 세게 끌어안았다.
“흣…….”
정신을 차렸을 땐 욕정으로 짙어진 그의 얼굴 너머로 새까만 하늘이 가득했다. 어깨 위에 단단히 여며져 있던 담요는 하릴없이 풀어져 모래사장 위에 나뒹굴고, 서로의 몸은 빠듯하게 겹쳐져 있었다.
“가자.”
그 말을 뱉고는 성현은 또다시 입술을 붙여 왔다. 입술을 비비고 뭉개뜨리는 그의 숨이 한없이 거칠었다.
“여기선 더는, 못 하니까.”
무언갈 간신히 억누르느라 잔뜩 쉰 목소리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것처럼 들렸다. 흥분으로 붉어진 눈초리에는 당장 이 자리에서 아연을 집어삼키고 싶은 격정이 거센 들불처럼 일렁거리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것 같기는 한데.”
아연은 주변을 둘러보는 척도 않고 성현만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자 그가 일순 뜨거운 물을 뒤집어쓴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골반을 꾸욱 움켜쥐었다 놓는 손길에서 이성과 본능의 치열한 싸움이 느껴졌다.
“그래도 누가 볼지 모르니까.”
“당연, 하지.”
점잖은 대답을 내놓으면서도 성현의 입술은 여전히 아연의 목덜미를 질척이며 유영했다. 그가 터뜨린 숨이 너무도 뜨거워 닿는 곳마다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무심결에 아연의 배에 비벼 올리는 성현의 몸은 이성적인 그의 말과는 너무나도 다른 양상을 띠고 있었다. 그런 그를 더 들쑤시고 싶어졌다. 언제부터 제게 이런 짓궂은 면모가 있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이런 데서 하는 사람들도 있겠지? 누가 보든 말든 야외에서…….”
“적당히 도발해. 돌아 버릴 것 같으니까.”
성현이 아연의 목줄기를 깨물며 짓씹듯이 말했다. 아연은 웃음을 터뜨렸다.
“도발이라니, 나는 그냥 단순히 궁금해서 하는 말인데.”
한계에 다다랐는지 그가 끙 하는 소리를 냈다. 놀리듯이 더 크게 키득거리자 성현이 아연의 몸을 번쩍 들어 올렸다.
아연은 꺅, 하고 웃음 섞인 비명을 지르며 다리를 버둥거렸다. 그가 벌주듯이 아연의 엉덩이를 콱 움켜쥐었다.
“이 정도로 날 들쑤시는 거 보면, 밤새 나랑 이어져 있을 각오 정도는 했겠지.”
아연을 어깨에 가볍게 둘러멘 성현이 이를 갈듯이 읊조리며 걸음을 옮겼다. 발에 푹푹 엉겨드는 모래 때문에 생각했던 것만큼 속도가 나지 않자 그가 성질을 못 이기고 낮게 욕지기를 뱉었다.
아연은 굴러가는 나뭇잎에 웃음을 터뜨리는 사춘기 소녀처럼 크게 웃었다.
고즈넉한 해변의 모래사장에는 아연의 나직한 웃음소리와 짜증 스민 성현의 깊은 발자국만이 오래오래 남아 있었다.
* * *
성현은 아연을 욕조 위에 앉히고 물을 틀었다. 온도를 확인한 뒤 몸을 구부려 아연의 발아래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조심스럽게 물을 끼얹는 그를 보며 아연은 어색함을 견디지 못하고 발을 꼼지락거렸다.
스스로 하겠다는 아연의 말은 들리지 않는 것처럼 무시로 일관한 채 발을 씻겨 주는 성현의 손길이 퍽 세심했다.
“불편할 텐데 옷 벗어.”
아연이 위아래로 갖춰 입은 투피스를 흘끗 쳐다본 성현이 말했다. 평소에 헐렁한 옷을 즐겨 입는 아연으로서는 몸에 달라붙는 투피스가 불편하게 느껴지는 건 사실이었지만, 성현의 앞에서 훌렁훌렁 벗어젖힐 정도는 아니었다.
아무리 이미 속살까지 다 내보인 사이라고는 해도.
“이따가.”
“내가 벗겨 줘?”
장난스럽게 묻는 말에 아연이 눈을 흘겨 뜨자 성현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아연은 커다란 손에 붙잡힌 채 씻겨지는 중인 발을 빼내려고 힘을 주었다.
“내가 알아서 한다는데도. 그만해. 어색하단 말이야.”
“알았어, 알았어. 거의 다 했으니까 가만히 있어.”
달래듯이 아연의 발등을 툭툭 두드린 성현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정작 성현 본인도 여전히 슈트 차림이었다. 늘 칼 같은 각을 자랑하던 몸에 딱 맞게 떨어지는 고급스러운 정장이 아까 그녀와 정신없이 뒤엉킨 탓인지 어딘지 모르게 흐트러진 모양새였다.
타이 없이 단추를 두어 개 풀어 내린 셔츠 깃 때문일까. 아연은 제 무릎맡에 몸을 굽힌 성현의 커다란 몸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네 발가락, 되게 귀엽게 생긴 거 알아?”
꼼꼼히 비누칠까지 하고 따뜻한 물을 끼얹어 거품을 씻겨 주던 성현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아연의 얼굴이 화르르 달아올랐다.
“발가락이 발가락이지, 귀엽게 생긴 발가락은 대체 뭔데.”
빙글거리는 성현의 낯에 천연덕스러운 장난기가 배어 있었다.
“귀여워서 빨고 싶게 생긴 발…….”
짓궂게 중얼거리던 그가 돌연 말을 멈추고 경직되었다.
성현은 고개를 내려 제 사타구니를 내리누르고 있는 물에 젖은 발을 바라보았다.
변명하자면, 아연은 그저 성현의 입을 막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목적했던 바대로 그의 입을 막는 데는 성공했지만…….
잠시 후 얼굴을 든 성현은 거짓말처럼 표정이 변해 있었다. 능청맞은 웃음기 따윈 온데간데없었다. 치켜뜬 눈, 짙어진 눈동자가 오롯이 아연을 담았다.
“이건 그냥, 네가 이상한 말을 하니까 조용히 하라는 의미…… 흣!”
저도 모르게 주워섬기던 변명의 말은 이내 성현의 입술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