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화 (42/96)

<42화>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성현이었다.

출근할 때나 보던 반듯한 슈트 차림이었지만, 어딘지 알게 모르게 흐트러진 듯한 분위기였다.

성현이 왜 여기에 있는 건지 도무지 믿기지 않아 아연은 크게 뜬 눈만 깜빡거렸다. 분명 내일까지 출장이라고 했는데.

제가 필요로 할 때는 연락도 닿지 않고 깜깜무소식이더니, 갑자기 어디서 이렇게 뚝 떨어진 것처럼 제 앞에 나타난 건지.

배 속에 알싸한 기분이 퍼졌다. 놀란 아연을 보고 싱긋 웃은 성현이 손을 뻗어 현관문을 받치며 말했다.

“5초만 더 기다리고 안 나오면, 문 따고 들어가려던 참이었는데.”

불한당 같은 말을 지껄이면서도 성현의 커다란 몸은 여전히 문 바깥에 서서 그녀의 허락을 기다리듯 서 있었다.

시야를 가득 채운 너른 어깨, 비스듬하게 내려다보는 시선.

어쩐지 목이 메어 와 아연은 작게 숨을 골랐다.

“어떻게 된 거야? 내일 온다고 한 거 아니었어?”

조금 쉰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루 일찍 들어왔어.”

진화호텔 6시. 약속된 시간에 맞추려면 슬슬 집을 나서야 할 때였다.

절묘한 타이밍에 거짓말처럼 나타난 권성현. 문 앞을 꽉 채우듯 가로막고 선 그를 올려다보는 먹먹한 눈길이 잘게 흔들렸다.

아연이 입술만 달싹거리자 성현이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왜 그랬는지는 안 물어봐?”

아연은 볼품없이 떨리는 눈을 들었다. 어떤 대답이 돌아올지 두려운 마음 반, 궁금한 마음 반이 뒤섞여 차마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흔들림 없는 시선이 그대로 꽂혀 들었다.

“너 보고 싶어서.”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마음이 사정없이 요동을 쳤다. 서늘한 낯에 떠오른 장난스러운 미소가 지나치게 눈부셨다. 태연한 얼굴로 나타나 사람을 뒤흔드는 그가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래서 왔는데, 나.”

성현은 칭찬을 바라는 아이처럼 웃으며 눈썹을 찡그렸다. 가슴 언저리가 조여드는 것을 느끼며 아연은 시선을 떨궜다.

그녀의 경직된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성현이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드라이된 머리와 희수의 취향이 잔뜩 반영된 트위드 투피스 차림. 다시 시선이 올라와 연하게 화장한 아연의 얼굴을 살펴보고는 묻는다.

“약속 있어?”

목구멍이 뜨거운 돌덩이를 삼킨 것처럼 홧홧했다. 아연은 북받쳐 오르는 무언가를 간신히 억누르며 대답했다.

“……아니. 그냥, 집에 있기 싫어서. 어디라도 가 볼까 하고.”

어쭙잖은 핑계였지만, 함께 섞여 나온 말은 진심에 가까웠다.

숨 막히는 모친으로부터의 도피처이자 은둔지. 제게 늘 아늑함을 주던 집이 오늘만큼은 어쩐지 까마득한 감옥처럼 느껴졌다. 그녀가 이제껏 순응해 온 삶을 대변하는 창살 없는 새장.

아버지, 아니 이제는 의원님이라는 호칭이 더 익숙한 허울뿐인 부친이 마련해 준 공간이 어떻게 제게 도피처가 될 수 있었을까.

비겁하게 외면해 온 현실이 서글픈 민낯을 드러냈다. 뜨거워지는 눈시울을 성현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 아연은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저 조용히, 평화롭게 살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말 잘 듣는 아이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믿어 왔는데. 비틀린 체념은 산산이 깨어졌다.

나는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지긋지긋해. 도망가고 싶어. 벗어나고 싶어.

망령처럼 따라붙는 환영이 또다시 눈앞에 깜빡거렸다. 어린 딸의 품에 안겨 저 혼자 평온히 잠든 것처럼 눈을 감은 엄마의 얼굴, 시체같이 차갑던 체온. 필라멘트가 나간 전구처럼 눈앞이 환하게 밝아졌다가 또다시 어두워질 때마다 희수의 얼굴이 시퍼렇게 변해 갔다.

“이리 와.”

나직한 음성이 침몰하던 아연의 의식을 건져 올렸다. 성현은 현관문을 등으로 받치고 아연을 불쑥 끌어당겼다. 가는 허리가 그에게 붙잡혀 맥없이 딸려 갔다.

“좀 안아 보자.”

“아……!”

아연은 빨려 들어가듯이 성현에게 안겼다. 허리를 꽉 감은 팔이 그녀를 으스러뜨릴 것처럼 세게 껴안았다.

의식할 겨를도 없이 입술이 포개졌다. 부드러운 혀가 입술을 가르고 들어오며 머릿속이 휘발되었다. 며칠간 떨어져 있었던 시간을 더듬듯 성현이 입 안을 휘저으며 밀려들었다.

안쪽의 여린 살을 훑으며 등허리를 쓸어내리는 손길에 아연이 으응, 소리를 내며 고개를 비틀었다.

커다란 손이 뒤통수를 감싸듯 받쳤다. 그녀가 도망간 만큼 각도를 바꾸어 더 깊이 파고든다. 혀를 감았다가 풀고 구석구석을 탐하는 감각에 온몸에 힘이 쭉 빠져나갔다.

무릎이 휘청거릴 지경이 되어서야 아연을 놓아준 성현은 아연의 목선에 고개를 묻었다. 그리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녀와 키를 맞추기 위해 한껏 구부린 등이 크게 부풀어 오르는 게 느껴졌다.

“……좋다.”

성현은 긴 숨을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따스한 온기가 목덜미를 간질였다. 벅차오르는 감각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된 건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가만히 숨을 들이켜자, 폐부 가득 성현의 냄새가 들어찼다. 트라우마처럼 코끝을 맴돌던 비릿한 피 냄새 같은 건 온데간데없이 뒤덮어 버린 그의 냄새에 눈물이 핑 돌았다.

아연은 손을 들어 성현의 단단한 등을 조심스럽게 쓸었다. 그러자 그의 등이 더 단단하게 경직되었다. 손바닥 아래 고스란히 느껴지는 변화에 손끝에서 정전기가 튀어 오르는 것만 같았다.

기분이 이상해져서 그의 등을 어루만지던 손길을 멈추었더니 그녀를 끌어안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마치 더 해 달라고 조르듯이.

“왜 이래…….”

“좋아서.”

성현의 이런 말에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아연은 그저 숨만 가만히 내쉬었다.

“이제 그만 놔.”

“조금만 더.”

“숨 막혀.”

“오랜만이잖아. 좀 봐줘.”

성현은 어리광 부리듯 중얼거리며 아연의 목덜미에 더욱 깊이 얼굴을 묻었다.

귓가의 솜털이 일제히 바짝 곤두섰다. 그와 닿은 부분부터 닿지 않은 부분까지 남김없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아랫배가 뭉근히 조여들며 지끈거렸다.

“……들어갈래?”

아연의 말에 성현이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마주쳤다.

“…….”

아연이 입술을 달싹였다. 마주친 그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해석하기 어려웠다. 안으로 들어가자는 말의 속뜻을 모를 리 없건만, 성현은 오묘한 눈으로 아연을 응시할 뿐이었다.

맞닿은 하체의 상태를 가늠해 볼 때 급한 건 아무래도 그인데, 성현은 오히려 기분이 상한 듯한 얼굴을 했다. 그가 곧장 집 안으로 들이닥치리라 생각했던 아연은 예상 밖의 성현의 반응에 당황해서 그만 흘러나오는 대로 덧붙이고 말았다.

“오랜만에 보는 거니까…… 하고 싶은 거 아냐? 여기서 이러지 말고, 안으로 들어가는 게…….”

“너는 어떻게 나흘 만에 나 보자마자 하는 소리가 또 섹스……, 하.”

성현은 말을 중간에 멈추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천장을 올려다보며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더니, 이윽고 아연을 내려다보는 눈길에는 터질 듯한 짜증이 가득했다.

“너랑 섹스하고 싶은 건 맞는데, 너랑 하고 싶은 게 섹스만 있는 건 아니거든?”

아연이 시선을 내려 그의 하체를 흘끗거렸다. 억울해하는 목소리와 달리 아래는 잔뜩 성이 나 있다. 제 아래를 살피는 아연의 눈빛을 읽은 성현이 발끈하여 말했다.

“좆 세우고 하는 소리라 신빙성 떨어지는 거 알아. 아는데…….”

자조적인 숨을 흘린 성현은 끌어안고 있던 아연의 허리를 놓아주었다.

그러게 이놈의 몸뚱어리는 어떻게 된 게 한아연의 머리카락 냄새만 맡아도 대뜸 발기부터 하고 마는 건지, 성가시기 짝이 없었다.

적나라하게 바지 앞섶에 드러난 윤곽 따윈 제 알 바 아니란 듯 성현의 목소리는 금세 차분해졌다.

“들어가서 핸드폰 챙겨 와.”

“……왜?”

“집에 있기 싫다면서. 어디든 데리고 가 줄 테니까.”

아연은 눈을 들어 성현을 올려다보았다. 고요하고 잠잠한 시선.

권성현이라면, 정말이지 그 어디라도 데려다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

선선한 대답에 성현이 미소 지었다. 근사하게 휘어진 기다란 눈매를 바라보며 아연은 마주 웃었다.

유일한 도피처를 찾은 방랑자처럼.

* * *

조수석에 올라탄 아연은 핸드폰을 꺼내 문자를 전송했다.

약속 시간을 30분 남짓 남겨 두고 보내는 사과 인사. 졸지에 바람을 맞게 된 상대방에게는 형식적으로 느껴질 터였다. 생전 안 하던 짓을 하려니 죄책감과 긴장으로 손끝이 바르르 떨렸다.

아연이 맞선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희수가 알게 된다면 어떤 히스테리를 부려 댈지, 상상만으로도 모골이 송연하고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오랜 세월 학습된 반응이었다. 그녀의 목줄을 조이는 올가미가 꽁꽁 감겨드는 것 같았다.

아연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핸드폰 전원을 꺼 가방 안에 넣어 버렸다. 주차장을 빠져나가며 핸들을 크게 돌린 성현이 그런 아연에게 흘끗 시선을 보냈다.

“어머니 만나기로 한 거였어?”

‘어머니’란 단어에 몸이 흠칫 굳었다. 역시 대충 둘러댄 핑계에 속아 넘어갈 리 없는 성현이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희수의 취향대로 꾸민 아연의 복장을 보고, 모친과 약속이 있었으리라 생각한 모양이다.

“어, 다음에 보자고 했어.”

흐응, 웃는 듯 마는 듯 알 수 없는 소리를 흘린 성현은 이내 운전에 집중한 듯했다. 아연도 말없이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토요일 저녁의 도로 위는 각기 목적지로 향하는 차들로 가득했다. 성현의 차는 복잡한 도심을 서서히 빠져나갔다. 아마도 제 문자를 받고 황당해하고 있을 상대방을 떠올리며 두근반세근반 쿵쾅거리던 심장의 울림도 서서히 잦아들었다.

새빨간 후미등을 빛내던 차들이 시야에서 하나둘 사라지고, 성현의 차는 이내 속도를 내어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창밖으로 빠르게 스쳐 가는 풍경을 바라보던 아연이 문득 고개를 돌려 물었다.

“피곤하지 않아? 공항에서 바로 왔으면 제대로 못 쉬었을 텐데.”

“설마 내가 아무리 피곤한들, 너한테 운전시킬까.”

피식 웃음을 터뜨린 성현이 창틀에 팔을 기대고 턱을 괴며 중얼거렸다.

“걱정하지 마. 남는 게 체력이야.”

그래. 체력이 흘러넘쳐서 탈이지…….

아연은 시선을 옆으로 옮기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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