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짧은 침묵이 흘렀다.
핸드폰 너머로 바람 소리와 함께 한 박자 늦게 성현이 낮은 욕설을 중얼거렸다. 아연은 숨을 죽이고 그의 반응에 귀를 기울였다.
- 하…….
허탈한 듯 내쉬는 헛웃음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있는 성현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 한아연, 넌……. 진짜…….
성현의 쉰 듯한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숨이 뚝뚝 끊어졌다. 술기운은 어느새 깨끗하게 가셔 버렸는지 정신이 또렷했다. 뒤에 이어질 말이 몹시 궁금해 아연은 몸을 똑바로 세워 앉으며 핸드폰을 귀에 가까이 가져다 댔다.
- 끊어.
그러나 그렇게 통보하고는 인사도 없이 전화가 뚝 끊겼다.
“뭐야…….”
통화 종료를 알리는 화면을 아연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이렇게 끊는 법이 어딨어.”
기껏 용기를 내어 한 말을 듣고는 득달같이 끊어 버리다니. 전화 매너가 형편없을뿐더러 순 제멋대로였다. 심지어는 출장지가 어디인지조차 끝끝내 말해 주지도 않고서.
서운함에 눈물이 찔끔 나왔다.
“나쁜 놈.”
아연은 뜨끈하게 열이 오른 손바닥 안에 얼굴을 묻었다. 기분이 하염없는 하향 곡선을 그렸다.
* * *
전화를 끊은 성현은 팔을 툭 떨어뜨렸다. 샤워 후 갈아입었던 파자마 바지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맥주 캔에서 콸콸 흘러나온 액체가 발코니 바닥에 거품을 일으켰다.
그런 멍청하기 짝이 없는 반응이라니.
‘보고 싶어. 지금 내 옆에 있었으면 좋겠어.’
아연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을 듣는 순간, 그 듣기 좋은 음성이 심장을 움켜쥔 것만 같았다.
손에 힘이 쭉 빠져서 손아귀에 쥐고 있던 맥주 캔이 맥없이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갔다. 바닥에 부딪친 맥주가 쏟아지며 바지를 적시고 말았다.
씨발. 씨발이라니.
보고 싶다는 말을 들어 놓고 고작 욕지거리나 지껄이다니, 뭐 이런 병신이 다 있어.
등신처럼 맥주 캔을 놓치는 바람에 저도 모르게 욕설이 튀어나왔지만, 다른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을 놓치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다행이긴 뭐가 다행이야, 병신아.”
성현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향하며 자조 섞인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허둥거리며 욕설이나 더듬거리다가 대뜸 전화를 끊어 버린 등신 같은 짓거리를 생각하면, 차라리 핸드폰을 놓치는 쪽이 나았을 것이다.
머리를 움켜쥐었다가 뒤쪽으로 쓸어 넘긴 성현은 발코니에 기대었던 몸을 똑바로 세웠다. 핸드폰에서 김 실장의 전화번호를 찾은 그는 망설임 없이 전화를 걸었다.
- 예, 본부장님.
신호음이 몇 번 울리기도 전에 김 실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막 일정이 끝나 헤어진 지 얼마나 되었다고, 꿀 같은 휴식을 방해한 상사의 전화에 떨떠름한 기색을 띨 법도 하건만 김 실장은 공손한 말투로 전화를 받았다.
성현은 빠르게 호텔 방을 가로지르며 김 실장에게 몇 가지 지시 사항을 건넸다. 핸드폰 너머에선 당황한 분위기가 느껴졌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럼 그렇게 처리해 주시고, 일정은 메일로 보내 놓으세요.”
통화를 마친 성현은 맥주 냄새를 풍기는 바지를 벗어 버리고 샤워 부스로 걸어 들어갔다.
내일은 몹시 바쁜 하루가 될 터였다.
* * *
“사장님, 얼른 퇴근하세요.”
아연이 듬성듬성 비어 있는 쇼케이스를 정리하고 있는데, 슬그머니 옆으로 다가온 규영이 소곤거렸다.
토요일 오후의 카페에는 평일 출퇴근 시간보다는 많지 않지만, 주말을 즐기러 나온 손님들이 드문드문 테이블을 채우고 있었다.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드니, 계산대에서 손님을 응대하고 있는 민재를 흘끗 살핀 규영이 목소리를 더욱 낮췄다.
“사장님 오늘 선보러 가신다면서요. 어제 사장님 어머니한테서 살짝 들었어요. 오늘도 혹시 사장님 출근하시면 빨리빨리 퇴근시키라고요. 제가 사장님을 퇴근시킬 입장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쨌든 얼른 가셔서 준비하셔야죠.”
어제 희수가 카페에 찾아왔을 때, 아연이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오는 사이 규영에게 쓸데없는 소리를 늘어놓은 모양이었다. 아연은 절로 찌푸려지는 인상을 애써 가다듬었다.
“다녀오시면 어땠는지 이야기해 주셔야 해요? 민재 씨한테는 비밀로 할게요.”
평소에 제 연애사도 미주알고주알 털어놓기 좋아하는 규영은 남의 맞선 이야기에 호기심이 동했는지 퍽 흥분한 눈치였다. 주문 접수를 마친 민재가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다가가 커피를 내리기 시작하는 것을 힐끔거리더니 아연을 따라 탈의실까지 들어왔다.
“사실은 저, 사장님 그 잘생긴 친구분이랑 잘돼 가는 중인 줄 알았거든요. 제가 원래 그런 쪽으로 눈치가 빠른데 이번엔 헛다리 짚었나 봐요.”
하하. 규영이 해맑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연은 희미하게 웃으며 허리에 묶은 앞치마 끈을 풀어 내렸다. 앞치마를 벗고 고개를 내리는데 입술 끝이 파르르 떨렸다.
“선이라고는 하지만, 그냥 어른들이 시켜 주는 소개팅 같은 거잖아요? 흐응, 재밌겠다. 전 통 소개팅 시켜 준다는 사람이 없어서요. 매번 주변에 원래 알고 지내던 남자애들이랑 잘돼서 그런 건지.”
“소개팅 같은 거 해 봤자 피곤하기나 하지. 난 규영 씨가 부러운데.”
제가 부럽다는 아연의 말에 규영이 눈을 크게 떴다.
“사장님이 저를요? 에이, 말도 안 돼.”
크게 손사래를 친 규영은 웃긴 말을 들었다는 양 콧등을 찡그리고 키득거렸다.
“아무튼 얼른 퇴근하세요. 가게 때문에 늦기라도 하셨다가는 다음에 사장님 어머니 얼굴 보기 무서울 것 같……. 아니, 그렇지 않아도 요새 너무 열심히 일하셨잖아요. 무슨 사장님이 이래. 원래 사장은 매출만 확인하고 가는 거랬어요.”
규영은 슬그머니 말을 돌리며 옷을 다 갈아입고도 여전히 미적거리는 아연의 등을 떠밀었다. 민재에게 인사를 건네고 카페를 나온 아연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향했다.
택시비를 치르고 집 앞에서 내린 아연은 1층 현관으로 느릿느릿 걸었다. 문득 옆쪽의 화단으로 시선을 돌리니 분홍색 꽃을 피운 배롱나무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그 아래에 삐딱하게 서서 담배를 피우던 성현의 모습이 환영처럼 그려졌다.
그날의 바람이, 공기가, 분위기가 거짓말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서늘하고 집요한 시선이 제게 와닿던 감각, 그가 몰고 온 좋은 냄새가 콧속 깊숙이 스밀 때 등줄기가 바짝 곤두서던 느낌이.
아연은 낭패감에 휩싸여 눈매를 일그러뜨렸다. 의식적으로 시선을 앞에 고정한 채 빠르게 현관으로 들어섰다.
“하아…….”
집에 도착한 아연은 가방을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두고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짙은 한숨만이 집 안의 고요를 깨뜨렸다. 그녀는 손바닥 위에 얼굴을 묻었다.
몸을 움직여야 했지만, 도무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눈만 감았다 뜨면 맞선 장소에 앉아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그런 제 생각에 기가 막혀 실소를 흘렸다. 이 와중에도 시간 맞춰 선 자리에 나갈 생각을 하다니, 착하기도 하지.
“착하긴 누가.”
시니컬한 자조가 흘러나왔다.
그래. 그저 멍청한 겁쟁이에 불과한걸.
느리게 깜빡거리던 눈꺼풀이 내리감겼다. 피로에 지쳐 경계심이 무뎌진 틈으로 단편적인 기억들이 파고들었다.
자신을 품 안에 꽉 끌어안아 줄 때면 으스러질 것 같은 성현의 무게감. 거칠어진 숨소리. 그저 안에 가득 들어와 있는 것만으로도 미칠 것 같은 절정감. 권성현의 아득한 냄새.
“미쳤어…….”
아연은 머리를 가로저으며 끙끙 앓았다. 머릿속을 비워 보려 안간힘을 썼지만, 짓궂게도 기억은 더욱 선명해질 뿐이었다.
얼굴을 손에서 떼어 낸 아연은 결심을 굳히고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적어도 성현에게 자신이 오늘 무엇을 하는지 정도는 알려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어제 그렇게 허무하게 끊겨 버린 통화를 떠올리면, 어쩌면 제 알 바 아니라는 반응이 돌아올지도 모르겠지만.
아연은 성현에게 전화를 걸고 핸드폰을 귓가에 가져갔다. 심장이 세차게 두근거렸다.
- 전원이 꺼져 있어 삐 소리 후 소리샘으로 연결되오며…….
핸드폰에서는 기계적인 음성이 흘러나왔다. 왜 하필 이럴 때 전화를 꺼 놓았지 싶다가, 출장 중이니 아마도 중요한 미팅을 하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시간 날 때 연락 줘.]
간단하게 메시지를 남긴 아연은 몸에 힘을 주어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구석에 팽개쳐져 있던 쇼핑백들을 주섬주섬 모아 들고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 * *
침대에 누워 있던 아연이 번쩍 눈을 떴다.
침실 바깥에서 현관 벨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이마를 짚고 있던 한쪽 팔을 내려 침대 옆을 더듬자 핸드폰이 손에 잡혔다.
오후 5시를 조금 넘긴 시간.
결국, 성현으로부터는 연락이 없었다.
끙 하고 상체를 일으키자 구불구불한 머리카락이 등 뒤로 물결쳤다. 몸이 영 무기력했다.
이 상태로 나가 봤자 상대방의 기분이나 상하게 하는 게 아닐까 싶었지만, 어차피 자리를 지키는 것만이 제가 해야 할 몫이었으니 그 이상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느릿느릿 몸을 일으키는 와중에도 벨 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누군지는 몰라도 집요한 성격이 여실히 느껴졌다. 침실 바닥에 발을 내린 아연이 피식 실소를 지었다.
이 시간에 집에 찾아올 사람이야 안 봐도 뻔했다. 그녀가 맞선 장소에 걸어 들어가는 것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득달같이 달려왔을 터.
인내심이 닳은 얼굴로 문밖에 서 있을 모친을 맞이하기 위해 아연은 침대에서 일어섰다.
머리며 화장이며 미용실에 들러서 사람답게 꾸미고 나가라며 그렇게 성화였는데, 어쩌면 직접 예약해 뒀던 미용실에 펑크 낸 것을 알고 찾아온 건지도. 또 얼마나 잔소리를 늘어놓을지,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아연은 급한 와중에도 거울 앞에서 제 모습을 체크했다. 희수에게 트집 잡힐 만한 부분이 없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현관으로 향했다.
“지금 열어요.”
삐리릭, 경쾌한 알림음과 함께 도어 록이 해제되었다. 아연은 현관문을 힘주어 밀며 말했다.
“내가 알아서 시간 맞춰서 갈 텐데 뭐 하러…….”
아연이 눈을 크게 떴다.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잦아들고 입술이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