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화 (40/96)

<40화>

마음의 평화를 위해 아연은 전원을 끈 핸드폰을 들고 탈의실로 들어갔다. 가방 안에 핸드폰을 넣어 버리고 나서야 한결 편안해진 표정으로 밖으로 나가는 문을 열었다.

하지만 몇 걸음 채 옮기기도 전에 아연의 표정은 얼어붙고 말았다.

“사장님! 어머니 오셨어요.”

규영이 아연의 곁으로 다가와 말했다. 그녀가 가리킨 곳에는 희수가 그림같이 꼿꼿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아연은 잘게 떨리기 시작한 손을 세게 말아 쥐었다.

가슴에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유예되었던 시간이 끝나 간다는 직감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여긴 웬일이에요? 그냥 전화하지.”

“내가 어디 못 올 곳이라도 왔니? 전화하면 잘 받지도 않는 애가 무슨.”

희수가 나긋하게 웃으며 말했다.

“뭐 마실래요?”

“됐어. 금방 일어나야 해. 너도 옷 갈아입고 나와. 샵 예약해 뒀어.”

“또 무슨 샵…….”

아연은 지겹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렸다. 한동안 줄기차게 불러 대더니 맞선이 기약 없이 미뤄진 후로 뜸해졌다 싶었는데. 아연은 불안한 눈길을 내리며 손끝을 쥐어뜯었다.

“관리 한번 해 줘야 우리 딸 내일 예쁜 얼굴로 선 잘 보고 오지.”

희수는 노래하듯이 말했다. 그녀의 애정 넘치는 목소리가 아연을 올가미처럼 움켜쥐고 꼼짝도 할 수 없게 만드는 것 같았다.

“……내일?”

“그래, 내일 6시. 진화호텔 라운지 카페야. 네 성격상 늦지는 않을 테고, 옷이랑은 엄마가 정해 뒀으니까 또 이상한 거 주워 입을 생각 하지 말고.”

어디선가 비릿한 피 냄새가 나는 것만 같아 코를 틀어막고 싶은 충동을 참아야 했다.

욕조 위로 넘쳐흐르던 붉은 물이 바닥에 부딪치며 나는 찰박거리는 소리가 희수의 고운 목소리 사이사이에 환청처럼 뒤섞였다.

“언제는 바쁘다고 기약 없이 미루자더니, 대뜸 연락 와서는 당장 내일 만나자는 거야. 마음 같아선 똑같이 한 번 튕겨 줄까 했어. 아무래도 기분 나쁘잖니. 자기들도 좋아서 하자고 했으면서, 우리 쪽 사정 약점 잡아 흔들면서 발 뺐다 넣는 것도 아니고.”

우리 쪽 사정이라 함은 아연이 한강준 의원의 사생아인 상황을 뜻할 터. 그것은 희수의 약점이자, 평생에 걸쳐 피맺힌 한이었다.

“이왕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의원님 평판 생각해서 알겠다고는 했지만, 아연이 너는 나가서 주눅들 거 없어. 그쪽이라고 뭐 우리 딸처럼 예쁜 얼굴에 삼선 의원 딸내미씩이나 되는 아이 만날 수 있을 줄 아는 건지, 어처구니가 없어서.”

손끝을 만지작거리던 아연이 아, 하는 소리를 냈다. 내내 괴롭힘당하던 손톱 옆에 기어이 핏방울이 맺혔다. 그런 아연과는 상관없이 희수는 계속해서 분통을 터뜨렸다.

“내가 장담하는데 그쪽, 네 얼굴 한번 보고 나면 제발 결혼하게 해 달라고 당장에 바짓가랑이 붙들고 늘어질 게 뻔해. 그러니까 아연이 넌 괜히 움츠러들 거 없이 평소 하던 대로만 하면 돼. 내가 네 얼굴 하나는 기가 막히게 예쁘게 잘 낳아 놨잖니. 넌 걱정할 거 하나 없어.”

무슨 말이라도 해 보려 했지만 목구멍이 꽉 조여들어 숨이 막혔다. 아연은 깊게 심호흡을 하며 소파에 몸을 기대었다.

피가 붉게 방울진 엄지를 가져와 입술에 대자, 비릿한 피 내음이 느껴졌다.동시에 죽음의 냄새가 후각을 사로잡았다.

찰랑거리는 물소리. 온통 붉어진 채 덜덜 떨리던 손바닥. 시체같이 늘어진 몸이 저를 덮치던 묵직한 무게감이 마치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기만 하다.

아연은 작게 숨을 헐떡거리며 눈꺼풀을 닫았다.

* * *

샤워를 마친 아연은 터덜터덜 지친 발걸음을 옮겼다.

갑자기 들이닥친 희수의 손에 이끌려 가서 여기저기를 주물러지고, 거울 앞에 서서 단아해 보이는 옷을 몇 벌이나 갈아입어야 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꾸미기 위해 내일 입을 옷과 구두, 가방을 새로 사들이고 나서야 희수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희수는 그대로 집으로 가서 피부를 위해 초저녁부터 잠자리에 들라고 당부했지만, 대충 고개만 끄덕거린 아연은 카페로 돌아와 일부러 마감을 자처했다.

카페에서 일할 때는 차라리 괜찮았다. 집으로 돌아와 고요한 정적을 마주하니 오히려 짙은 피로감이 밀려들었다.

거실에는 새로 쇼핑한 물건들이 쇼핑백째로 소파 위에 던져져 있었다. 적어도 내일 입어야 할 원피스는 꺼내서 옷걸이에 걸어 놔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모든 게 귀찮았다. 그 와중에도 착실하게 원피스를 꺼내 입고 약속된 장소에 나갈 생각을 하고 있는 스스로가 우스울 뿐이었다.

아연은 부엌으로 들어가 냉장고 문을 열었다. 답답한 속을 달래 줄 맥주 캔을 꺼내다가, 마음을 바꿔 몸을 돌렸다.

선반으로 다가가 양주를 꺼냈다. 술에서 커피 맛이 난다기에 예전에 호기심에 사 뒀지만, 도수가 높아 한 번도 따지 않고 모셔 둔 것이었다.

우유를 가득 따른 유리잔에 양주를 섞자 잔 안의 액체가 오묘한 갈색으로 변했다. 살짝 혀끝을 대 보니 생각보다 더 깊은 알코올 향이 훅 끼쳐 들었다.

저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졌지만, 싫지만은 않았다. 아무 생각 없이 취하고 싶었으니까.

잔을 들고 거실로 나온 아연은 널브러져 있는 쇼핑백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지나쳤다. 소파에 털썩 몸을 묻은 뒤 조용히 잔을 기울여 홀짝거리기 시작했다.

둥근 유리잔에 든 액체가 반쯤 비어 갈 무렵, 아연은 긴 한숨을 토해 냈다. 핸드폰을 들어 화면을 켰다. 메시지창에 희수와 성현의 이름이 나란히 떠 있었다.

잔을 들어 한 모금을 더 들이켜며 망설이던 아연은 이윽고 성현의 이름을 눌렀다.

[보고 싶다.]

처음 그가 보낸 ‘보고 싶다’라는 네 글자의 메시지를 보았을 때, 명치를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몸에 힘이 쭉 빠지고 가슴이 지끈지끈 아팠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머릿속이 그저 하얘져서 허둥거리다가 결국 어떠한 답장도 하지 못했다.

술기운이 올라와서일까.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아연은 희미하게 웃음 지으며 흘끗 눈을 들어 시계를 확인했다.

지금쯤은 일을 끝내고 호텔로 돌아갔으려나.

전화를 걸어 일은 끝났는지 물어보면 그만이겠지만, 핸드폰 위의 손가락은 여전히 머뭇거리고 있었다.

전화를 하면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언젠가 그녀가 맞선을 보게 되리라는 사실을 성현도 모르진 않을 터였다. 이미 지나가듯 이야기한 적이 있으니까.

그런데 지금에 와서 그에게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선을 봐도 되느냐고 허락을 받는 것도 우습고…….

아니, 우스운 게 아니었다. 사실은 성현에게서 무슨 대답이 나올지 두려울 뿐이었다.

그녀가 맞선을 보든 말든 제 알 바 아니란 듯 심드렁한 대답이 나오는 것도, 용납하지 못한다며 격한 반대를 표하는 것도, 아연으로서는 양쪽 모두 겁이 났다.

한심한 겁쟁이.

‘앞으로도 우린 계속 친구일 거고, 그냥 우리 사이에 섹스라는 재미가 더해진 것뿐이야.’

‘언제까지?’

‘너한테 전적으로 선택권을 줄게.’

‘선택권이라면?’

‘네가 질릴 때까지.’

손에 남은 선택지는 끝을 고하는 것뿐이었다.

차라리 네게 질렸다면 조금 나았을 텐데.

아연은 두 무릎을 끌어안고 몸을 웅크렸다. 가지런히 모은 무릎에 턱을 괴고 눈꺼풀을 느리게 깜빡였다. 그녀는 멍하니 테이블 위의 유리잔을 바라보다가, 이내 뜨거운 술을 꼴깍꼴깍 목구멍으로 넘겼다.

술잔이 바닥을 드러낼 즈음, 핸드폰이 드르륵 진동했다. 화면 안에서 눈부시게 반짝거리는 이름 세 글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권성현.

귀가 간지럽기라도 했나. 내가 계속 자기 생각 한 것을 어떻게 알고.

아연은 배시시 웃으며 성현의 이름이 떠 있는 화면을 한참이나 내려다보았다. 참을성 있게 울리던 전화가 끊기며 사위가 다시 조용해졌다. 뒤늦은 아쉬움에 아연은 술잔을 내려놓고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손대기 무섭게 핸드폰이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아연은 소파 등받이에 머리를 툭 기대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깊게 잠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응…….”

- 잤어?

“……아니.”

아연은 뜨거워진 눈시울을 비비며 말했다. 목소리가 이상한 걸 알아차리면 어쩌지, 그냥 자고 있었다고 할 걸 그랬나, 후회하는데 핸드폰 너머로 성현이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 그럼 내 생각 했나?

“……이상한 소리 할 거면 끊어.”

- 무슨 이상한 소리. 내 생각 했을 텐데, 아냐?

“안 했어.”

- 냉정하긴.

그가 낮게 키득거렸다. 듣기 좋은 음성 뒤로 바람 소리가 들리는 걸 봐서는 호텔 발코니에 서 있는 모양이었다.

아마도 일정을 이제 막 마친 정장 차림으로, 혹은 샤워를 마치고 머리카락이 살짝 젖은 채로 창문을 열고 발코니에 기대어 선 성현의 모습을 상상해 보던 아연은 소파에 깊숙이 기대었던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고 보니 성현이 어디로 출장을 간 건지도 여전히 모르는 채였다.

무심하고 무신경한 데다, 제멋대로 자기 좋을 때만 불쑥 연락하기 일쑤에 그마저도 사람 마음 휘저어 대는 말이나 던져놓고, 저 홀로 여유만만한 그가 얄밉기 그지없었다.

“넌 어디야?”

- 나? 호텔이지.

“아니. 그거 말고, 어디에 있냐고. 한국 아니잖아, 지금.”

- 아아, 이제야 그게 궁금해진 거야?

성현은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웃음기가 스민 말투에는 아연을 놀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 알아서 뭐 하게.

알면 뭐 하냐니, 그냥 좀 알면 안 되나?

아연은 불만스럽게 눈을 흘겨 떴다. 하지만 핸드폰 너머 어느 나라에 있는지도 모를 성현이 그것을 알 리 없었다.

“그냥…….”

- 알면, 나 보러 오기라도 하려고?

그가 능청스럽게 말하며 빙글거렸다. 기다란 눈매를 늘이며 웃고 있을 성현의 모습이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졌다.

서늘하게 잘생긴 얼굴에 미소가 덧씌워질 때면 시간이 멈춘 것처럼 머릿속이 멍해진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을까. 그가 웃으면 그저 덩달아 헤픈 웃음이 흘러나온다는 것을.

- 응? 그런 거라면 알려 주고.

성현은 놀리는 목소리로 그녀를 재촉했다.

잠자코 듣고 있던 아연이 말했다.

“보고 싶어. 지금 내 옆에 있었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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