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화 (39/96)

<39화>

“본부장님, 이동하실 시간입니다.”

김 실장이 슬쩍 다가와 귓가에 속삭였다. 성현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이제껏 그의 주변에 몰려들어 있던 사람들과의 대화를 자연스럽게 마무리 지었다.

호텔의 연회장은 파티 분위기로 무르익어 있었다. 태강전자의 신제품 언팩 행사의 애프터파티였기에 이번 행사의 총괄을 맡은 성현에게 축하를 건네며 이야기를 나누고자 하는 이들은 끝도 없이 밀려들었다.

본래 권윤재 부회장이 전면에 서서 이끌던 태강전자의 주요 행사에 새로이 모습을 드러낸 태강의 황태자. 그룹의 세대 변화를 나타내는 신호에 덩달아 흥분한 분위기가 연회장의 공기를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최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것도 결국은 언팩 행사와 모두 연결되어 있었다. 성공적으로 끝마친 본 행사는 전 세계에 동시다발적으로 전파를 탔다. 그러니 직후에 이어진 애프터파티에서만큼은 느긋하게 축배를 들어도 좋을 테지만, 여전히 중요한 일정이 남아 있었다.

“가시죠.”

파티의 주인공이 떠나가는 모습을 아쉬운 마음으로 뒤쫓는 눈길을 뒤로한 채, 성현은 서슴없이 걸음을 옮겼다. 김 실장이 콧등으로 흘러내린 안경을 추켜올리며 그의 뒤를 따랐다.

“본부장님, 다음 일정까지 가는 데는 30분 정도 소요될 것 같습니다.”

호텔의 그랜드 로비에 대기하고 있던 차에 오르며 김 실장이 말했다. 그들을 태운 차는 하얀색 외관의 호텔을 천천히 빠져나갔다.

“어제까지 진행된 협의안과 오늘 논의될 주요 내용입니다. 라그나 쪽에서는 지속적으로 원천 기술을 유지한 채 전장 사업만 매각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 왔지만, 이번에 저희와의 인수 합병이 무산으로 돌아갈 시 법정 관리 절차를 피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성현은 조수석에 앉은 김 실장이 몸을 돌려 건네는 태블릿을 받아 들었다.

“오늘은 포괄적 권리 매수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질 예정이고요. 세부 자료는 라그나 명으로 된 폴더에 정리되어 있습니다.”

이번 출장 일정이 갑자기 길어진 것은 새로운 사업체의 M&A 협상 때문이었다. 명목상으로는 언팩 행사 총괄을 위한 출장이었지만 사실상 인수 합병의 주요 쟁점을 마무리 짓는 것이 핵심 일정인 것이다.

실무자 선에서 마라톤 회의를 이어 가며 협의 안건을 정리하고, 임원진이 중간에 들어가 의사 결정을 하는 식의 일정이 벌써 사흘째 이어지는 중이었다. 출장 일정 중에 협의안을 결정지어야 하기 때문에 매일 회의에서 다뤄지는 주제가 바뀌고, 때마다 주지해야 할 내용이 상당했다.

“그리고 내일 일정표 새로 업데이트되었으니 확인 부탁드립니다, 본부장님.”

김 실장의 말에 회의 자료를 띄우던 성현은 우선 일정표를 확인했다.

출장 전에 한 차례 검토가 끝났던 일정들을 훑듯이 읽어 내려가던 성현의 눈썹이 작게 꿈틀거렸다. 시간을 쪼개고 쪼개 놓은 바쁜 일정표 중에 저녁 시간을 통째로 비워 놓은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버만사와 저녁 회동? 우리가 버만과 진행 중인 현안이 있습니까?”

성현의 질문에 김 실장이 난감한 표정으로 흘긋 뒤를 돌아보았다.

“아, 그건 태송현에서 반영한 일정입니다. 하단에 참석자 명단 확인하시면…….”

성현의 시선이 다시 태블릿 화면으로 향하는 것을 살피던 김 실장이 슬그머니 말꼬리를 흐렸다.

일정표에 작게 덧붙여진 명단에서 버만사의 회장과 처음 접하는 여자의 이름, 그리고 기태준 사장의 이름까지 확인한 성현이 눈살을 찌푸렸다.

언젠가 본가의 식사 자리에서 결혼이니 뭐니 떠들며 이상하게 굴던 태준의 모습이 떠올랐다. 왜 안 하던 짓거리를 하나 싶었는데, 이런 깜찍한 선물을 준비하고 있었다니 헛웃음이 흘렀다.

“버만사 측에 불참 통보하세요. 기태준 사장 측에서 반발이 있으면 저한테 즉시 보고하시고요.”

잠시 머뭇거리던 김 실장은 백미러를 통해 성현의 눈치를 살피고는 뒤늦게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본부장님.”

성현은 태블릿 화면에 회의 자료를 띄우고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가 태블릿에서 눈을 떼었을 때는 어느덧 창밖으로 익숙한 배경이 흘러가고 있었다. 회의 장소는 조망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호텔이었지만, 사흘째 이어진 회의에 푸른 전망 따위는 아무런 감흥도 일으키지 않았다.

성현은 창밖에서 무심한 시선을 거두었다. 다시금 태블릿으로 눈길을 돌리자 순간적으로 관자놀이가 지끈 울렸다. 여유 없이 돌아가는 일정에 이어 움직이는 차 안에서 30분 가까이 자료를 들여다보았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눈꺼풀을 잠시 감았다 뜬 성현은 슈트 안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아연의 이름이 박힌 메시지창을 켰다.

[나 안 보고 싶]

제 손가락이 저질러 놓은 어이없는 메시지를 내려다본 그는 한 박자 늦게 실소를 흘렸다.

언제부터 이런 낯간지러운 소릴 잘도 지껄였는지.

그의 웃음소리에 조수석에 앉은 김 실장이 어깨를 움찔거리며 뒤를 돌아보는 게 느껴졌다. 성현은 메시지를 모두 지우고 썰렁한 두 글자를 보냈다.

[뭐 해.]

핸드폰 화면을 끈 그가 창틀에 팔을 기대고 턱을 괴었다. 차는 호텔 로비로 이어지는 정원을 느릿느릿 오르고 있었다.

아무런 반응도 없는 핸드폰을 붙잡고 화면을 확인하고 싶은 조급한 충동이 일었다. 뭐 하냐니. 멋대가리 없는 자신의 질문이 한심하기 짝이 없지만, 지금쯤 한아연은 뭘 하고 있으려나 정말로 궁금해졌다.

성의 없는 질문이라고 무참히 씹히려나.

문자 메세지를 확인하고 아연이 지을 표정을 상상하자 배 속이 근질근질 뜨거워졌다. 여지없이 척추 부근이 지끈거리며 시도 때도 분간 못 하는 하체가 뻐근해졌다. 성현은 낮게 혀를 차며 다리를 느슨하게 꼬아 올렸다.

그때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이 부르르 진동했다. 반대편 손바닥에 턱을 괴고 있던 성현의 입술 끝이 보기 좋게 올라갔다.

[카페야.]

성현은 미소 띤 입술을 손바닥 안에 깊숙이 묻었다. 뭐 하냐는 자신의 질문만큼이나 재미없는 대답일 뿐인데, 뭐가 웃긴 건지 입술 사이로 피식피식 얼빠진 웃음이 새어 나왔다.

종잇장처럼 얇은 허리에 앞치마를 질끈 묶고 종종거리는 귀여운 걸음걸이로 카페 안을 쏘다닐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바쁘게 움직일 때마다 하나로 묶은 긴 머리카락이 등 뒤에서 좌우로 흔들거릴 모양새까지도.

문에 달린 종이 딸랑 하고 울리면 몸을 돌려 환하게 미소 짓겠지.

아연이 그렇게 미소 지을 때면 조명도 필요 없을 만큼 눈이 부시다는 실없는 생각을 했었다.

[보고 싶다.]

성현은 망설임 없이 메시지를 보냈다. 이번에는 화면을 끄지 않고 메시지창을 들여다보았지만, 한참이 지나도 답장이 없었다.

그의 메시지를 보고 당황해서 귀 끝이 빨갛게 달아올랐을 아연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이상한 소리를 지껄였다며 욕을 하고 있으려나? 아니면 핸드폰을 손에 쥐고 허둥거리려나.

성현은 대답 없는 핸드폰 너머의 아연을 상상하며 조용히 키득거렸다.

“본부장님, 도착했습니다.”

차가 로비에 멈춰 섰다. 조수석에서 내린 김 실장이 뒷좌석 문을 열었다. 차에서 내리는 성현의 얼굴을 흘끗 올려다본 김 실장의 어깨가 흠칫 굳어졌다.

저와 똑같이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해 온 사람답지 않은 산뜻한 얼굴에 김 실장은 기가 막혔다.

아니, 저보다 바쁘면 바빴지 절대 여유 있는 일정이 아니었다. 아무리 젊고 체력이 끝내준다지만, 3일을 밤낮없이 기 빨리는 협상 테이블에 죽치고 앉았다가 거대한 행사를 치르고 곧장 회의 장소로 달려온 사람의 얼굴이라기엔 지나치게 상쾌한 게 아닌가.

회의 장소로 오는 30분 동안 차에서 잠이라도 잤으면 그러려니 했을 테지만, 김 실장이 중간중간 백미러를 통해 뒤를 살필 때마다 성현은 똑같은 자세로 자료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슈트 상의의 단추를 채워 옷매무새를 정리한 성현은 저를 왠지 모를 경이로운 눈길로 바라보는 김 실장을 향해 말했다.

“갈까요?”

지지부진했던 협상이 오늘은 어쩐지 잘 풀릴 것 같은 분명한 예감이 들었다.

호텔 로비로 성큼성큼 들어서는 성현의 입꼬리가 매혹적으로 휘어졌다. 홍콩의 더운 바람이 귓등을 간지럽게 스치고 지나갔다.

* * *

“사장님, 누구 연락 기다리세요?”

한쪽 구석에 치워 두었던 핸드폰을 확인하던 아연이 화들짝 놀라며 화면을 껐다. 뒤를 돌아보자 규영이 고개를 갸웃 기울이고 서 있었다.

“아, 아뇨. 그냥, 무심결에 봤는데…….”

“그래요? 오늘 유난히 핸드폰을 자주 보시길래. 평소엔 던져두고 잘 안 보시잖아요.”

제가 얼마나 핸드폰을 들여다보았으면 규영이 다 눈치챌 지경이었던 건지.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미묘하게 입꼬리를 들썩거리며 웃을 듯 말 듯 하던 규영이 돌연 호주머니 속에서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어? 저 통화 좀 하고 올게요!”

“그래요.”

규영은 입 모양으로 ‘남자 친구요’ 하고 벙긋거리고는 핸드폰을 귀에 대며 멀어졌다.

가게 구석으로 간 규영이 핸드폰에 대고 무언갈 종알거리더니 푸하하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허리까지 꺾어 가면서 깔깔거리며 웃는 모습에 덩달아 아연도 미소를 지었다.

물어볼 때마다 새로운 남자 친구로 바뀌어 있는가 싶더니, 이번 남자 친구는 정말 잘 통하는 모양이었다. 통화를 할 때마다 저렇게 웃음 바람이 끊이지 않는 걸 보면.

저도 모르게 흐뭇한 얼굴로 규영을 바라보던 아연은 손안에 든 핸드폰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옅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화면에는 사람 마음에 커다란 돌멩이를 내던져서 파동을 일으켜 놓고 그 후로 잠잠하기만 한 메시지창이 떠 있었다.

[보고 싶다.]

보고 싶다니. 이런 말을 어쩜 아무렇지 않게.

사람 마음을 온통 휘저어 놓은 얄미운 글자를 노려보던 아연은 누가 볼세라 얼른 핸드폰 화면을 껐다.

저런 말을 무신경하게 써 재껴 놓고는 이렇다 할 부연 설명도, 심지어는 더 이상의 연락도 없었다. 그 탓에 저만 전전긍긍하고 있는 게 아닌가.

이미 여러 번 깨끗이 닦았던 테이블을 또 한 번 닦아 대던 아연은 핸드폰을 꺼내 전원을 완전히 꺼 버렸다.

그 말 한마디 때문에 도무지 일상생활이 불가했다. 핸드폰 진동 소리가 마치 환청처럼 들릴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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