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규영의 노골적인 질문에 순간 사레가 걸리고 말았다. 아연이 작게 콜록거리자 규영은 그녀의 등을 두드려 주며 얼른 물 잔을 건넸다. 물을 마시고 기침이 진정되고 나서야 아연은 붉어진 눈가를 살며시 문지르며 대답했다.
“규영 씨가 오해했나 본데, 그런 거 아니에요.”
“왜요?”
“응? 왜냐니…….”
“왜 안 사귀세요? 완전 잘생겼는데……. 전 그렇게 잘생긴 사람 태어나서 처음 봤어요.”
규영이 진심으로 의아하단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연은 난감한 얼굴로 쓰게 웃었다.
잘생기기야 했지. 너무 잘생겼어. 잘생겼는데…….
“오랫동안 친구로 지내서, 그런 쪽으론 생각이 안 든다고 해야 하나.”
어쩐지 가슴 언저리가 콕콕 찔리는 기분이었다.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하려니 입술이 바싹바싹 말랐다. 아연은 규영의 시선을 피하며 얼른 맥주를 다시 목으로 넘겼다.
“흐음, 전 그렇게 잘생긴 친구가 없어 봐서 공감을 못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저라면 친구고 뭐고 어떻게든 확! 잡아먹…… 아니, 사귀자고 했을 것 같은데.”
규영이 마치 먹음직스러운 음식을 먹지 못해 아깝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렸다. 아연은 대답 대신 맥주만 벌컥벌컥 들이켰다.
실은 이미 친구고 뭐고 앞뒤 안 가리고 확 잡아먹어 버렸다는 사실을 어떻게 말하냐고…….
“앗. 우리 사장님 요새 술 고프셨나 보다.”
빈 맥주잔을 테이블에 탁 하고 내려놓자 규영이 곧장 살랑거리며 맥주병을 기울여 술을 채워 주었다.
아연은 어색하게 미소 띤 얼굴로 집게를 집어 들고 불판 위의 애꿎은 고기만 뒤적거릴 뿐이었다.
* * *
“사장님! 오늘 잘 먹었습니다. 배 터지게 먹은 만큼 내일부터 더 열심히 일할게요!”
규영이 아연에게 팔짱을 끼며 애교스럽게 말했다. 그러다 도로에 세워진 차 옆에 멀뚱하게 서 있는 남자를 발견하곤 손을 휘휘 저었다.
“아, 저 남자 친구가 데리러 와서요. 먼저 가 볼게요. 민재 씨, 내일 봐요.”
아연과 민재에게 인사를 한 규영이 종종걸음으로 멀어졌다. 규영의 남자 친구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무어라 말을 하더니 조수석 문을 열었다. 규영은 다시 한번 몸을 돌려 두 사람을 향해 손을 휘젓고는 조수석 안으로 쏙 들어갔다.
“보기 좋네요.”
보기 좋다, 라고 무의식중에 생각하던 아연이 옆을 돌아보았다.
민재가 그녀와 비슷하게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규영보다 두 살은 더 어리면서, 마치 오빠가 동생 바라보듯 자상한 얼굴을 한 민재 때문에 아연이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왜, 왜요? 제 얼굴에 뭐 묻었어요? 아까 화장실에서 얼굴 확인했는데.”
아연이 제 얼굴을 보고 웃자 민재가 당황한 표정으로 자신의 뺨을 쓸어내렸다.
“아뇨. 그냥, 민재 씨 재밌어서. 아, 민재 씨는 여기서 어떻게 가요?”
“사장님은 어떻게 가시는데요?”
“난 집이 여기서 별로 멀지 않아서 그냥 걸어가려고요. 택시 잡기도 애매한 거리라 소화도 시킬 겸.”
회식 장소였던 고깃집은 평소에도 아연이 종종 가는 유명한 맛집인데, 공교롭게도 아연의 빌라와 멀지 않은 거리였다. 그곳을 찾을 땐 입에서 살살 녹는 소고기와 함께 꼭 맥주를 잔뜩 마시게 돼서 배불리 먹고 집까지 걸어가는 게 코스였다.
“그럼 제가 모셔다드릴게요.”
아연의 말을 들은 민재가 고개를 반짝 들며 자못 진지하게 말했다.
“응? 아니에요. 그럴 거 없어요. 정말 금방이니까.”
아연은 고개를 저으며 손사래를 쳤다. 괜히 걸어간다고 말했나, 뒤늦게 후회가 들었으나 이미 말을 뱉은 후였다.
“여성분을 밤늦게 혼자 걸어가게 할 순 없죠. 저 그렇게 매너 없는 사람 아니에요.”
게다가 사장님 같은 미인을…….
민재는 개미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중얼거리며 뒷말을 흐렸다.
“뭐라고요?”
“아, 아뇨. 제가 꼭 집까지 안전하게 모셔다드리고 싶다고요.”
‘괜찮다’와 ‘아니다, 데려다줘야 한다’, 몇 번의 실랑이가 오갔다. 소득 없는 설전 끝에 결국 두 사람은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사람 많은 가게가 몰려 있는 번화가 블록을 벗어나니 도로는 훨씬 한산해졌다.
초여름의 밤길을 터벅터벅 걸으며, 나름대로 사장과 직원 간의 고충 상담 같은 대화가 오갔다. 그러나 일하는 데 힘든 건 없냐고 물으면 없다는 단답형 대답만이 되돌아와 상담 거리가 금방 바닥났다.
이따금 도로 위의 자동차가 두 사람 옆을 빠르게 지나가며 소음을 만들어 냈다. 발걸음 소리만 남은 어색한 정적 속에서 아연은 걸음을 조금 빨리했다.
나 조용한 거 못 견디는 성격이었네.
무슨 말을 해야 하나, 머리를 굴리는 와중에 아연은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성현과 함께 있을 때는 숱한 적막에 휩싸였어도 단 한 번도 이런 어색함을 느낀 적이 없었다는 것을.
머릿속의 생각이 예고도 없이 성현에게로 흘러가는 것을 막을 길이 없었다. 아연은 밤바람에 흔들거리는 플라타너스 가로수의 푸른 잎을 바라보며 작게 한숨지었다.
세상에서 가장 편한 사람. 그리고 이제는 편하고도 불편해진 미묘한 관계.
아무렇지 않게 흘러가고 있지만, 유예된 시간은 점점 바닥나 간다.
아마 나는 결국 우리를 잃게 되겠지.
“사장님, 전화 오는 것 같은데.”
민재의 조심스러운 부름에 아연은 사색에서 빠져나왔다. 주머니 안에서 핸드폰이 우웅 소리를 내며 진동하고 있었다. 뒤늦게 주머니에서 꺼내 본 핸드폰 화면에는 권성현, 세 글자가 반짝거렸다.
난데없이 심장이 쿵쿵 날뛰었다. 핸드폰을 움켜쥔 손가락이 홧홧하게 달아오르며 손끝이 간질거렸다.
“아, 잠깐 전화 좀 받을게요.”
아연은 무의식적으로 핸드폰 볼륨을 최대한으로 줄이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사이에 전화가 끊길까 봐 어쩐지 마음이 졸아들었다.
근래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진 성현이었다. 전자 쪽 일을 겸하게 되었다고 그가 말해 주었던 날을 기점으로 아연 또한 그런 변화를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핸드폰 너머에서 약간의 피로가 묻어나는 낮은 목소리를 들을 때면, 이유 없이 가슴 언저리가 욱신거렸다. 설렘, 기대감, 두려움, 바닥 모를 불안감, 두서없는 감정들이 마구 뒤섞여 그게 대체 무엇인지 종잡을 수조차 없었다.
“여보세요.”
- 뭐 해.
“집에 걸어가고 있어.”
아연이 집에 있을 거라 생각했던 모양인지 잠시 멈칫한 성현이 다시 물었다.
- 어디쯤인데.
“거의 다 왔어. 편의점 근처.”
듣기 좋은 저음의 목소리가 못마땅한 투로 읊조렸다.
- 늦은 시간에 왜 혼자 걸어 다녀. 위험하게.
그 순간 커다란 외침이 귓전을 때렸다.
“사장님!”
동시에 팔뚝을 덥석 붙잡아 당기는 강한 힘이 느껴졌다. 삽시간에 몸이 훅 딸려 갔다.
아연은 어안이 벙벙한 채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조금 전까지 서 있던 자리에 전동 킥보드를 탄 사람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스쳐 지나갔다. 아연이 통화하는 동안 멀찍이 떨어져 있던 민재가 어느새 다가와 그녀의 팔을 다급하게 끌어당긴 것이었다.
멀어지는 검은 뒷모습을 향해 민재가 거친 욕설을 퍼부었다. 아연은 핸드폰을 쥔 손을 가슴에 얹고 놀란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녀만큼이나 놀랐는지 이토록 크게 흥분한 모습의 민재는 처음이었다.
알아듣지도 못할 욕을 쏟아 내며 한참을 씩씩거리던 민재가 거칠어진 숨을 들이쉬곤 아연에게 물었다.
“사장님, 괜찮으세요?”
“아아, 괜찮아요.”
“사람을 칠 뻔해 놓고 사과도 없이 도망가다니, 뭐 저런 미친놈이 다 있는지. 많이 놀라셨죠? 제가 잡았어야 했는데, 저도 너무 놀란 데다 순식간에 지나가 버려서…….”
“아니에요. 그걸 무슨 수로 잡겠어요. 민재 씨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네. 고마워요.”
민재는 전동 킥보드가 사라진 방향을 향해 분한 숨결을 씩씩 내뱉었다. 그런 민재를 진정시키고 나서야 아연은 여전히 통화가 연결되어 있는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댔다.
“여보세요?”
- 무슨 일이야?
다급하게 되묻는 목소리엔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초조감이 배어 있었다. 전화기 너머로 방금의 소란을 모두 들은 모양이었다.
“그게, 지나가던 사람이랑 부딪칠 뻔했어.”
- 다쳤어?
“아니, 부딪치진 않았어. 좀 놀라서…….”
- 옆엔 누군데.
“민재 씨.”
짧은 정적이 이어졌다. 부연 설명을 하려는데 성현이 먼저 물었다.
- 걔는 왜.
“오늘 직원들이랑 회식했거든. 근처라 걸어오는 길인데 같이 걷고 있어.”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참는 듯 숨을 억누르는 기척이 느껴졌다.
- 집 앞이야. 끊어.
전화는 단숨에 끊어졌다. 아연은 통화가 끊긴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민재가 옆에서 요즘 전동 킥보드랑 부딪치는 사고가 많다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늘어놓았지만,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멀리 보이던 빌라 건물이 점점 가까워지고, 아연은 화단 옆 어둑한 그림자 아래에 서 있는 익숙한 인영을 발견했다. 성현은 화단 앞에 마련된 흡연 구역에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아연이 성현을 발견함과 동시에 그가 입술 사이에 끼우고 있던 담배를 내렸다. 흰 연기가 그의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와 공기 중으로 어른어른 흩어졌다. 희뿌연 연기 속에서 그의 얼굴이 점차 선명해졌다.
담배를 비벼 끈 성현이 느릿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점점 가까워지는 성현의 얼굴이 가로등에서 쏟아지는 주황색 조명 아래 환하게 드러났다. 뒤늦게 그를 알아본 민재가 말했다.
“어? 저분, 사장님 친구분 아닌가요?”
“맞아요. 친구도 여기 살거든요.”
성현이 한 걸음가량을 앞두고 두 사람 앞에 멈춰 섰다. 안녕하세요, 고개 숙여 인사하는 민재에게 성현은 성의 없이 고개를 까닥였다. 모양 좋은 입꼬리가 민재를 향해 미소 짓고 있는 것과는 달리 그의 기다란 눈매에는 그 흔한 웃음기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네까짓 게 어째서 감히 한아연의 옆에 들러붙어 있냐는 듯한 냉랭한 시선이 민재를 훑어 내렸다. 그러다가 문득 밤늦은 시간에 아연을 혼자 걷게 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냐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어 잠시 누그러졌다가, 아무래도 역시 기분 나쁘다는 듯 잘생긴 눈매가 다시 가늘어졌다.
눈치가 썩 좋지 못한 민재였지만, 성현의 싸늘한 눈빛을 모른 척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네 역할 끝났으면 꺼져.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새까만 눈동자가 마치 영역을 침범당한 맹수처럼 희번덕거렸다.
그는 말 한 마디 하지 않았는데 민재는 살벌한 협박을 당한 사람처럼 얼어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