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김 실장이 은밀하게 입수된 자료를 태블릿에 켜서 성현에게 건네주었다.
“주요 내용은 회장님의 일신상의 이슈를 흘리며, 본부장님의 발탁을 위해 꾸며낸 일종의 쇼가 아니냐는 추측성 기사입니다. 기사 내용이 이전과 비교해도 상당히 악의적입니다. 지금까지 제 흔적이 붙잡히지 않았다고 여기는지 점점 수위가 심해지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이제는 제동을 거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게 제 사견입니다, 본부장님.”
성현은 아무런 뜻도 읽히지 않는 무감한 눈빛으로 태블릿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어느덧 눈을 들고 무심하게 지시했다.
“아직은 내버려 둬요.”
김 실장은 무어라 반박할 말을 찾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네, 하는 짧은 대답과 함께 몸을 돌렸다.
태블릿을 내려놓고 창밖을 응시하는 성현의 입꼬리에 희미한 미소가 서렸다.
이른바 익명의 제보자가 이제까지는 시답잖은 뻘소리를 늘어놓는 것으로 심기를 거스르게 하는 것에 그쳤다면, 오늘 기사화될 내용은 그 익명의 목줄을 틀어쥘 올가미가 되기에 충분했다.
권민환 회장의 입원과 관련된 사항은 회사 내에서도 극비로 다뤄지는 것으로, 이를 외부에 흘리는 행위는 그가 그룹 내부에서 고급 정보에 컨택이 가능한 고위 인사라는 반증이었다.
누군가를 내세워 연막을 피웠다 한들 이미 그 꼬리를 성현 측에서 묶어 놓은 상태였다. 언제든 낚아 올리기만 하면 되는 상황에서 오늘의 기사야말로 조심성 없고 멍청하기 짝이 없는 짓이 아닐 수 없었다.
성현이 태강전자의 본부장을 겸하게 되자 상대는 궁지에 몰린 생쥐처럼 얄팍한 심리 상태에 처한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 허술한 흔적을 남길 리가.
성현은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늘이며 좌석 시트에 몸을 느슨하게 기대었다.
부스러기를 흘리기 직전의 범인에게 괜한 위협을 가하여 움츠러들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과도한 친절에 가까웠다. 부스러기가 땅에 떨어지기만 가만히 기다리면 되는 일이니까.
“본부장님, 점심 식사는 원래 장관님과 함께 하시는 것으로 예정되어 있었지만, 지금 연락이 왔는데 산업부 쪽의 일정 문제로 취소되었다고 합니다.”
차가 고속도로를 빠져나갈 즈음 조수석에서 조용히 통화를 마친 김 실장이 성현에게 통화 내용을 전달했다.
“산업부 내부에서 어떤 문제가 터진 모양입니다. 협약식 끝나고 급하게 돌아가셨다고 하네요. 식사는 하셔야 하는데, 예정된 식당으로 모실까요?”
김 실장의 말에 잠시 느긋하게 창밖을 응시하던 성현이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에 이제껏 보지 못한 장난기가 어른거렸다.
“아뇨. 회사 쪽으로 가시죠.”
망할 스케줄 때문에 한아연을 만나지 못한 지 벌써 나흘째였다. 울산 공장의 라인 증설 시찰을 위한 출장이 지난 3일간 이어졌고, 울산에서 바로 용인으로 출근한 참이었다.
계속된 무리한 출장으로 김 실장의 낯빛은 파리하고 눈 밑은 거뭇하게 꺼져 있었다. 살인적인 일정을 함께한 사람치고 체력에는 아무런 타격을 입지 않은 성현이 다만 유일하게 불만스러운 부분이 바로 그것이었다.
한아연을 만나지 못한다는 것.
그 부드럽고 기분 좋은 몸을 안지 못한다는 것.
성현은 빠르게 스쳐 가는 창밖의 풍경을 내다보며 짧게 실소했다.
발정이 제대로 났네.
자조적으로 되뇌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아연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명치 아래가 지끈거렸다.
최근 통화 목록을 주욱 내리던 성현은 마음을 바꿔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 안에 집어넣었다.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 놀라 눈을 커다랗게 뜰 토끼처럼 귀여운 얼굴이 보고 싶어졌다.
* * *
“사장님, 저희 밥 먹고 왔어요. 사장님도 얼른 식사하고 오세요.”
규영이 종종거리며 다가와 아연에게 미안하다는 듯이 눈꼬리를 늘이며 말했다. 아연이 카페를 보는 동안 규영과 민재, 두 사람만 식사를 하고 온 게 퍽 마음에 걸린 모양이었다.
“아아, 괜찮아요. 아까 신메뉴 맛본답시고 음료를 너무 많이 마셔서 그런지 별로 배가 안 고프네요.”
“음료수랑 밥이랑 어디 같나요? 밥은 드시고 일하셔야죠!”
“응, 조금 있다가. 그나저나 신메뉴 레시피를 조금 바꿔 봤는데 어떤지 한번 봐 줄래요?”
아연은 새로 만든 음료를 규영에게 내밀었다.
제주산 녹차 가루로 만든 그린티 라테에 초콜릿을 섞은 새 음료는 아이스로 제조했을 때 초콜릿이 잘 섞이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었다. 아연은 규영과 머리를 맞대고 초콜릿의 양과 음료에 섞는 시점을 미묘하게 바꿔 가며 레시피를 조정해 갔다.
어느덧 싱크대에 초콜릿 묻은 컵들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거품을 일으킨 솔로 컵을 닦아 내던 규영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물었다.
“그런데 사장님, 저 계속 궁금했는데 그 잘생긴 사장님 친구분, 왜 요새는 카페에 안 오세요? 설마 카페 바꾸신 건 아니겠죠?”
“아아.”
아연이 난감한 얼굴로 웃자 규영이 말을 덧붙였다.
“아니, 원래도 바쁘시면 하루 이틀은 안 오시기도 하셨지만, 우리 카페 마스코트의 부재가 너무 길어지니까 은근히 저한테 물어보는 손님들도 계시고요.”
언제부터 권성현이 우리 카페의 마스코트였는지 모를 일이지만, 한때 신나게 이용해 먹었던 것도 사실인지라 양심의 가책이 느껴져서 도무지 할 말이 없었다.
실은 아연에게도 이미 몇몇 손님이 다가와서 넌지시 그의 행방을 묻거나, 한참 카페 안을 두리번거리다가 실망한 얼굴로 돌아가기도 했다. 이 상태가 계속된다면 매출 타격으로 이어지는 것도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저번에 그 멍청하게 생긴 직원 놈 보러 오는 손님도 은근히 많다면서. 나 없는 동안 그놈더러 예쁘게 하고 나와서 잘 팔아 보라고 해.’
장난스럽게 속삭이던 얄미운 목소리가 떠올랐다.
아연은 홀에서 테이블을 정리하고 있는 민재의 뒷모습을 흘끗 쳐다보았다. 민재가 그녀에게 소중하고 고마운 직원임은 틀림없지만, 손님을 끄는 것에는 전혀 힘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권성현의 잘난 낯짝에 길들여져서 하늘 모르고 높아진 손님들의 눈에 찰 리가 없지.
아연은 규영이 설거지해서 건네주는 컵을 마른 수건으로 닦으며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요 며칠 성현이 카페에 발길을 끊은 탓에 특수 효과를 누리지 못하고 있었지만, 마냥 아쉬워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성현이 타인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라면 질색을 하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가 설마 자신의 음흉한 속내를 알고 있으면서도 기꺼이 미끼가 되어 주었으리라곤 미처 생각지 못했다.
‘네가 나한테 빚을 좀 졌으면 좋겠어. 가능하면 많이. 평생 가도 다 못 갚을 만큼.’
어쩌면 그녀보다 더 음흉한 속내를 품고서.
그 말을 들은 날 꿈자리는 또 얼마나 뒤숭숭했던지. 아연은 밤새 식은땀에 푹 젖은 채로 커다란 그림자 아래에 짓눌린 것처럼 끙끙거렸었다.
머릿속을 헤집는 생각에 깊숙이 빠져서 기계적으로 컵을 닦는데, 문득 카페 유리문이 열리며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 웬일이야. 안 오신다 했더니, 오늘 딱 나타나다니!”
카페 입구를 확인한 규영이 반가움에 호들갑을 떨었다. 아연은 마지막으로 물기를 닦아 낸 컵을 선반에 얹어 놓고 몸을 돌렸다.
성현이 카페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여유로운 걸음걸이. 그의 발아래에서 오후의 햇살이 눈부시게 부서지는 것 같았다.
며칠 만에 카페에 모습을 나타내서인지 성현의 슈트 차림이 어쩐지 낯설게 느껴졌다. 아연은 새삼스럽게 경직된 뺨을 슬쩍 손등으로 눌러 보았다.
“어서 오세요! 오랜만에 오신 것 같아요. 그동안 안 오셔서 그렇지 않아도 궁금해하던 차였는데.”
반갑게 맞이하는 규영을 향해 성현은 매너 좋은 눈인사를 건넸다. 카운터 앞에 선 성현을 올려다보기 위해 규영은 고개를 바짝 들었다. 자신도 모르게 수줍은 듯 올라갔다 내려가는 뒤꿈치에서 본능적인 설렘이 느껴졌다.
“샷 추가한 따뜻한 아메리카노 맞으시죠?”
“오늘은 다른 볼일이 있어서요.”
“아, 저희 사장님 보러 오신 거세요?”
“네. 사장님 바쁜가요?”
성현이 눈꼬리를 장난스럽게 휘어뜨리며 물었다. 순간 규영의 눈이 혼몽하게 흐려지고 무심코 입술이 벌어졌다.
“바쁠 리가요……. 전혀요. 시간 많아요.”
규영은 홀린 듯한 대답으로 졸지에 아연을 한가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다. 흡사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흐리멍덩해진 얼굴의 규영을 잠시 내려다본 성현은 제 알 바 아니란 듯이 무심하게 고개를 돌려 아연에게 물었다.
“점심은?”
“아, 그렇지 않아도 마침 사장님 식사하실 시간인데 이런 우연이!”
아연이 대답하기도 전에 금세 최면에서 깨어난 규영이 기세 좋게 끼어들었다.
“사장님, 친구분이랑 식사하고 오세요. 가게는 저랑 민재 씨한테 맡겨 두시고, 천천히 여유 있게 드시고 오셔도 돼요. 요새 영 기운 없어 보이셨는데, 그게 다 식사를 제대로 안 챙겨 먹어서 그런 거예요!”
기운이 없어 보인다는 쓸데없는 소리까지 늘어놓으며 규영은 아연의 등을 떠밀기 시작했다. 카운터 밖으로 아연을 몰아내고 자연스럽게 아연의 앞치마까지 풀어서 벗겨 내 버렸다.
테이블을 정리하다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돌아보는 민재를 스쳐 지나 아연은 순식간에 카페 바깥으로 쫓겨났다. 문 앞까지 아연을 배웅하고 들어간 규영이 유리문 너머에서 미묘한 미소와 함께 손을 흔들고 있었다.
“직원 중에 적어도 하나는 눈치가 좋네.”
등허리를 커다란 손이 감싸 왔다.
“눈치 좋은 게 아니라, 아무래도 규영 씨가 이상한 오해를 한 것 같은데…….”
“무슨 오해? 친구끼리 점심이나 먹자는데 달리 오해할 구석이 있나?”
성현은 능글맞게 받아치며 아연을 이끌었다. 그가 차 쪽으로 다가가자 뒷좌석 옆에 대기하고 있던 김 실장이 꾸벅 허리를 숙였다. 아연도 얼떨결에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운전 내가 할게요. 김 실장님도 알아서 식사하고 오세요.”
곧장 상황을 이해한 김 실장은 아연을 향해 조수석 문을 활짝 열어 주었다. 그리고 운전석에 앉아 있던 기사에게서 차 키를 받아 공손하게 성현에게 건넸다.
“네. 그럼 식사 맛있게 하시고 회사에서 뵙겠습니다, 본부장님.”
김 실장은 오래간만에 얻게 된 자유 시간에 들뜬 기색이 역력했다.
아연은 떠밀리듯이 조수석에 올라탔다. 아연이 벨트를 맨 것을 확인한 성현은 차를 부드럽게 출발시켰다.
사이드미러 안에서 한결 개운해진 얼굴의 김 실장이 점점 멀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