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화 (32/96)

<32화>

한 침대에서 아침을 맞이하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매번 빠져나가는 그녀가 성현의 눈에는 그저 이상한 고집을 부리는 것처럼 보일 터였다.

이미 한바탕 몸을 섞은 마당에 한낱 부질없는 선 긋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섹스 직후 기묘한 현실감이 몰려드는 이 공간을 아연은 최대한 빨리 떠나고 싶은 마음이었다.

“집이 바로 아래인데 뭐 하러. 잠은 우리 집에서 편하게 잘래.”

“내 옆에서 자는 건 불편하단 소리로 들리네.”

“뭐……, 편할 리가 없잖아.”

“왜? 넓고 푹신하고, 귀찮게 내려갈 필요도 없고, 가만히 있으면 내가 구석구석 깨끗하게 씻겨 주기도 할 텐데.”

“그게 문제라고. 구석구석이란 말을 일부러 끼워 넣는 의도가 불순하게 들려.”

구석구석 씻겨 준다는 명목하에 여기저기 만져 대며 필연적으로 물건을 세울 게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 상태로 같은 침대에 누웠다간 언제 또 무섭도록 발기한 것을 은근슬쩍 들이대며 덮쳐 올지 모르는데 편히 잘 수 있을 리가.

아연의 경계심 어린 눈길에 성현이 피식 실소를 흘렸다. 저도 제 시커먼 속이 훤히 보인다는 것쯤은 아는 모양이었다.

“밤엔 더 이상 안 건드릴게.”

아침엔 건드리겠다는 소리 아냐?

아연이 눈매를 가느다랗게 좁혔다.

성현은 더 이상의 음흉한 의도는 없다는 것처럼 두 손바닥을 들어 보이며 결백하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러고는 이내 대단한 이유는 없다고 말하듯 어깨를 가볍게 추켜올렸다.

“데려다주기 귀찮아서 그래.”

자신도 모르게 아연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 귀찮다는 말에 기분이 삽시간에 땅 밑으로 처박히는 것 같았다.

나쁜 놈. 말을 왜 그렇게 해.

어째서 이렇게까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지 모르겠지만, 아연은 불쑥 차오르는 서운함을 목구멍 안으로 삼키며 눈을 흘겼다.

“내가 언제 나 데려다 달라고 했어? 신경 쓰지 마. 혼자 갈 거니까.”

“물론 넌 데려다 달라고 한 적 없지. 오히려 나 몰래 빠져나가기 바쁘신 한아연인데, 그럴 리가.”

성현은 달래듯이 살가운 목소리를 만들어 내며 아연을 끌어당겨 침대에 앉혔다. 그게 한껏 놀리는 것처럼 들려서 아연은 더욱 눈살을 찌푸렸다.

아연을 앉혀 두고 그녀의 발아래로 내려간 성현이 아무렇지 않게 무릎을 꿇고 앉았다.

커다란 손으로 어울리지 않는 조막만 한 레이스 조각을 집어 들고 아연의 발을 하나씩 들어 속옷에 꿰어 넣었다. 그가 인형 놀이를 하듯이 아연의 종아리를 따라 속옷 끈을 스르륵 끌어 올리며 말했다.

“왜 이렇게 기를 쓰고 집에 가려고 하는지 이해가 안 돼서 그래. 집에 뭐 좋은 거 숨겨 놓았나 싶어서.”

아연은 제게 속옷을 입혀 주는 성현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허벅지까지 속옷 끈을 쓰윽 올려 주더니 동그란 무릎에 살며시 입을 맞춘다.

소중한 것을 다루듯이 허벅지를 감싸 쥔 따뜻한 손. 무릎 위에 짧게짧게 입술이 부딪치며 전해지는 온기. 낮게 내리뜬 눈꺼풀. 길고 서늘한 눈매. 조각처럼 높은 콧날. 가지런하고 남자다운 눈썹. 매끄러운 이마 위에 흘러내린 머리카락까지.

가만히 그것들을 새기듯이 바라보고 있는데, 그 순간 성현이 눈을 들었다. 시선이 마주쳤다.

아아.

눈가가 화르르 달아올랐다. 어째서인지 가슴 언저리가 불에 덴 것처럼 화끈거렸다. 아연은 알 수 없는 기분에 휩싸여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몸을 벌떡 일으켰다.

표정을 숨기기 위해 다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녀를 따라 일어난 성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제 할 일을 하듯 아연의 머리 위로 티셔츠를 입혀 주었다. 그가 팔을 당겨 가는 대로 맥없이 내주며 아연은 불만스럽게 성현을 흘겨보았다.

자기는 아직도 벌거벗은 그대로인 주제에, 누가 누굴 입히는 거야.

그녀를 살뜰하게 챙기는 다정한 손길과는 다르게 하체는 천장을 보며 잔뜩 성이 나 있었다.

언제 봐도 위협적이고 흉흉하기만 한 자태인데, 그간 정이라도 들었는지 이제는 험상궂게 생겼다는 생각보다는 저절로 아래가 욱신거리며 입 안이 바싹 말라 왔다.

미쳤지, 한아연.

아연은 머릿속의 생각을 몰아내려 재빨리 고개를 털었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너부터 빨리 입어.”

아연의 말에 성현이 제 아래로 흘끗 시선을 내렸다.

하늘을 향해 솟아 있는 페니스는 수치를 모르고 탐욕스럽게 꺼떡거리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애써 외면하고 있는 아연과 제 하체를 번갈아 본 성현은 성가시단 투로 투덜거렸다.

“내가 귀찮다는 건, 바로 이걸 말하는 거라고.”

아연은 몸을 굽혀 브리프를 집어 드는 성현을 쳐다보았다. 확실히 귀찮아 보이기는 했다.

저렇게 시도 때도 없이 자기주장을 펼치는 데다 쉽게 수그러지지도 않는 물건을 가진 주제에 그동안 어떻게 참고 살았다는 걸까.

성현의 말처럼 자신이 정말 순진하게 살아가던 건실한 청년 하나를 섹스 중독자로 만들어 놓은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피어올랐다.

중독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사람이 너무 한순간에 손바닥 뒤집힌 것처럼 뒤바뀐 건 사실이니까.

돌이켜 생각해 보면 예전에 그녀가 알던 권성현은 쓸데없는 신체 접촉이라면 질색하곤 했다. 같이 그의 집에서 노닥거릴 때에도 그는 늘 적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을 선호했다.

이를테면 소파의 끝과 끝처럼, 아주 멀진 않아도 피치 못할 접촉이 이루어지지 않을 만큼의 적당한 거리감.

어쩌다 실수로라도 좀 가까워지면 그가 먼저 의식적으로 멀찍이 물러나는 게 눈에 보일 정도라서 오히려 뻘쭘해진 적도 더러 있었다.

그랬던 인간이 어쩌다가 이렇게 성욕의 노예가 되어서는…….

아연은 금세 숙연해졌다. 어찌 보면 제 충동적 성욕의 희생양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은가. 희생양이라고 하기엔 본인이 부쩍 더 즐기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은 차치한다손 치더라도.

“왜. 집에 가려고 보니까, 아쉬워?”

아연의 넋 빠진 시선이 제게 닿아 있는 것을 본 성현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콧등을 찡그렸다. 저렇게 웃을 때의 그는 퍽 장난스러운 소년 같은 얼굴이 되곤 했다.

“아쉽기는 누가.”

“내 좆에서 시선을 못 떼고 있잖아, 네가.”

“보고 있기 민망해서 그래. 그래 가지고 누굴 따라 나오겠다는 거야. 사람 창피하게 만들 생각 말고 그냥 집에 있어. 나 혼자 갈게.”

아연은 서둘러 침실을 벗어났다. 성현은 트레이닝팬츠를 주워 입고는 품이 큰 후드티를 목 위로 끼우며 아연을 뒤따랐다.

“보통 사람들이 내 좆만 쳐다보고 다니진 않아. 너나 그러지.”

“그렇게 발기…… 아니, 그러고 다니지 않을 때의 이야기지.”

아연은 무심코 입에서 튀어나올 뻔한 적나라한 단어를 얼른 집어삼키고 말을 이었다.

“그렇게 망측한 꼴로 바깥을 나돌아 다니면 그걸 무슨 수로 안 쳐다봐.”

“또 나왔다. 꼴리게 말하는 재주.”

아연은 기가 막힌 얼굴로 성현을 돌아보았다. 그는 짓궂게 미소 지으며 아연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기어코 집 앞까지 데려다주겠다는 심산인 것이다.

하여간 쓸데없는 것에 고집은.

언젠가 격한 정사에 진이 빠져서 기절하듯이 그의 침대에서 잠이 드는 바람에 새벽에 몰래 일어나 집에 혼자 돌아갔던 적이 있는데, 그 일을 두고 성현은 몹시 불만스러워했다.

자신이 처자는 사이에 그녀 혼자 돌아가게 한 게 매너도 없는 양아치가 된 것 같아서 기분이 좆같다나.

정작 그 말을 할 때 성현이 사용하는 상스러운 단어 하나하나야말로 양아치가 따로 없다고 아연은 속으로 생각했었다.

“아침에 당분간은 카페에 못 가.”

성현은 아연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엘리베이터에 오르며 말했다.

늦은 밤의 엘리베이터는 텅 비어 있었다. 아연을 벽에 밀어 세운 후 그녀의 어깨에 턱을 걸친 그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툭 눌렀다.

“한동안 전자 일을 겸하게 돼서, 오전에 그쪽으로 출근하게 됐거든.”

우웅, 낮은 진동을 일으키며 엘리베이터가 아래로 향하기 시작했다. 아연은 눈을 들어 엘리베이터의 숫자판을 올려다보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아침, 성현은 말없이 카페에 오지 않았다.

아연은 저도 모르게 몇 번이나 유리문 바깥을 내다보고, 울리지 않는 핸드폰을 부질없이 들여다보았다. 자신이 온종일 성현을 기다렸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나마 오지 못할 거라는 말이라도 이렇게 미리 해 주었으니 이제는 무심코 기다리게 되는 일은 없겠지.

그런 생각을 하던 아연은 문득 스스로가 우스워져 피식 실소를 흘렸다.

하루가 멀다 하고 매일 밤 몸을 섞어 대면서, 아침이 되면 또 당연히 봐야 한다는 듯이 구는 자신이 낯설었다. 아침에 잠깐 못 볼 거라는 말이 이렇게나 아쉬워할 일인지…….

“아쉬워?”

성현이 아연의 목덜미에 입술을 붙인 채로 물었다.

“……설마.”

“아쉬운 얼굴이야.”

“그럴 리가. 잘못 본 거겠지.”

“아쉬운 얼굴 맞는데. 아, 매출 떨어질까 봐 그러나.”

장난스럽게 읊조리는 성현의 말에 아연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를 카페에 손님 끌어들이는 미끼처럼 이용했다는 사실을 성현이 눈치채고 있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원체 그가 남의 시선에 익숙하면서도 무심한 데다가, 창가에 전시하듯 앉으라고 해도 무덤덤한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앉아 있길래 아무 의심도 없는 줄로만 알았는데…….

“무, 무슨 소리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아연은 일단 발뺌했다. 순식간에 낯이 화끈거리고 등줄기에 진땀이 났다.

고작 카페 손님 좀 끌어 보겠다고 20년 지기 소꿉친구를 팔아먹은 부끄러운 속내를 본인에게 고스란히 들켜 버리다니.

아아, 쪽팔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