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지금처럼 혼자 있을 때면 왠지 모를 불안감을 품고 있는 떨떠름한 자아가 여지없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사실 그조차도 지난 일주일간은 그다지 여의치 않았다. 낮에 카페에서 일할 때는 이따금 그런 생각에 젖어 멍해지거나 심각해지곤 했지만…….
밤만 되면 언제 그런 생각을 했냐는 듯 신나게 붙어먹기나 했지.
아연은 자조적으로 되뇌고는 맥주를 들이켰다.
못 이기는 척 그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치고는 저도 너무 즐기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흘러넘치는 성욕을 어찌하지 못해 하루도 빠짐없이 흘레붙는 꼴이라니.
그보다 더 한심한 것은, 일주일 만에 겨우 혼자만의 시간을 갖게 된 의미 있는 밤인데 의연해지기는커녕 당연하다는 듯이 성현을 떠올리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생각을 털어 내듯 머리를 가로저은 아연은 집 안의 정적을 채우고자 텔레비전을 켰다. 의미 없이 채널을 몇 번이고 돌리다가 맛집 소개 프로그램을 틀어 놓고 테이블 위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가장 최근의 메시지는 희수로부터 온 연락이었다. 일정이 꼬인 탓에 맞선을 잠시 미루자는 맞선 상대의 사정을 전하며 한껏 불만과 잔소리를 늘어놓는 내용을 아연은 담담하게 훑어 내렸다.
[우리는 뭐 시간이 남아돌아서 맞선 날만 손꼽아 기다린다니? 기가 막혀서. 기분은 나쁘다만, 한편으로는 너 사람 꼴로 만들어 놓을 시간을 확보한 것 같아서 다행스럽기도 해. 그런 의미에서 엄마가 다음 주에도 스파 예약해 두었으니까…….]
아아, 맞선.
어찌 보면 이 모든 일을 충동질한 원흉인 맞선의 존재를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사실이 어처구니가 없을 따름이다.
아연은 피로감이 묻어나는 손길로 메시지창을 껐다.
맞선이라든가 모친의 예민한 성정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은 순간이었다. 이미 머릿속은 충분히 포화 상태였으니까.
‘지금까지 그래 왔듯 앞으로도 우린 계속 친구일 거고, 그냥 우리 사이에 섹스라는 재미가 더해진 것뿐이야.’
‘언제까지?’
‘너한테 전적으로 선택권을 줄게.’
일종의 유예.
아연은 무력한 선택권을 쥔 자신의 손바닥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대체 권성현은 무슨 생각일까. 아니, 대체 난 무슨 생각인 걸까.
스스로의 마음조차 종잡을 수 없었다. 그저 맥없이 휩쓸려 가다가도, 불현듯 무언갈 강하게 움켜쥐고 싶은 마음이 치솟곤 한다. 그게 무엇인지도 정확히 알지 못하면서.
아연은 고요하게 숨죽이고 있는 핸드폰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하루 종일 그로부터 아무런 연락이 없었지만, 성현이 보통 매주 수요일마다 본가에 들러 저녁 식사를 한다는 것을 아는 그녀였다.
슬쩍 시간을 가늠해 보니, 지금쯤이면 식사를 끝마치고도 남았을 법한 시간이었다.
물론 어딜 갈 때마다 행선지를 알리길 바라는 것은 절대, 결단코 아닐뿐더러, 시시콜콜한 연락을 해 오길 기다리는 건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부담스럽기만 하지…….
‘자기 행선지를 알려 주는 권성현이라니, 가당치도 않지. 하나도 안 어울려.’
어쩐지 그걸 떠올리는 것만으로 소름이 끼쳐서 아연은 돌연 한기가 돈 몸을 슥슥 쓸어내렸다. 그런 뒤 핸드폰을 소파에 던져두고 테이블 위에 어질러져 있던 카탈로그를 펼쳤다.
직원인 민재가 제안했던 공방의 디저트를 주문하는 것과 관련해, 며칠 전 직접 공방에 방문해 작업 환경과 제조 과정을 확인한 후 몇 가지 조건을 조율했다.
처음엔 세 가지 종류의 케이크로 시작해 매출 추이를 지켜보고 주문을 확대하는 쪽으로 결정지었기 때문에 주문할 케이크의 종류만 정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아연은 맥주를 홀짝이며 공방에서 받아 온 카탈로그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예상보다 공방의 규모는 꽤 컸고, 만드는 케이크의 종류도 다양했다.
이제 곧 여름이 깊어질 테니까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잘 어울릴 만한 걸로…….
아연의 시선이 카탈로그 첫 페이지를 채 읽어 내리기도 전, 그녀의 평화를 방해하듯 핸드폰이 울렸다.
아연은 카탈로그를 무릎에 내려놓고 핸드폰 화면에 뜬 ‘권성현’이란 세 글자를 낯설게 바라보았다.
밤 10시가 다 되어서 걸려 온 전화.
가슴 언저리가 싸해지는 기분이 든다. 저조차도 이런 제 자신이 황당하고 어리둥절할 지경이었다.
왜? 내가 왜? 대체 어째서? 내가 설마 연락을 기다렸나?
아연은 당혹감에 낮게 탄식을 흘리며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친구니까 궁금할 수도 있지. 오늘은 어째서인지 아침에도 카페에 들르지 않았으니까. 매일 찾아오던 단골손님이 갑자기 안 보여도 궁금하고 걱정이 되는데, 이 정도는 당연히 궁금해할 수 있어…….
열심히 변호를 해 보았다. 그럴수록 초라한 자기변명에 불과하단 느낌이 점점 더 짙어졌지만.
권 회장님이 쓰러지셨다고 했으니까 아침부터 병원에 들렀을 수도 있고, 당연히 회사도 바빠졌겠지. 그런데 그게 뭐. 섹스만 더해진 친구 사이에 일일이 그런 걸 보고할 필요도, 내가 그걸 궁금해할 필요도 없잖아. 시간 맞고 몸 동할 때 섹스나 하면 그만이지.
생각이 삐딱하게 흘러가자 갑자기 몹시 억울해졌다. 일방적으로 휘둘리는 기분.
제 조부가 갑자기 병원에 입원했는데도 성현은 다음 날, 그다음 날에도 빠짐없이 몸을 진득하게 붙여 왔다.
아연은 그런 성현을 세상에 다시없을 불효자 보듯 바라보았다. 인류애적인 측면에서 예의상, 그리고 사람으로서 최소한의 체면을 차리자는 뜻에서 엄격한 얼굴로 ‘오늘만큼은 자제하도록 하자’고 제 상식적인 의견을 피력했지만, 어느새 결국은 또 성현의 아래에 깔려서 체면도 잃고 달뜬 신음을 흐느끼고 있었다.
세상에 모든 옳고 그름이 엉망으로 흐트러진 듯 아연은 혼란한 정점에 서 있었다. 뒤흔들리는 배의 갑판 위를 아슬아슬 걷는 것처럼 중심도 없이 휘청휘청. 심지어는 누가 강제로 떠민 적도 없는데 자발적으로.
그런 주제에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듯이.
수신 알림이 깜빡거리는 핸드폰을 아연은 난처하게 응시했다. 끈덕지게 이어지는 벨 소리가 꼭 권성현 같다. 적당히 안 받으면 포기할 법도 한데, 고집하고는…….
처음부터 말도 안 되는 개소리에 가까운 관계라는 확신은 있었지만, 저도 모르게 은근슬쩍 휘말려서는 의식할 겨를도 없이 깊숙이 발을 들였다.
이제는 더 이상 모른 척 빼지도 못할 만큼 멀리 흘러와 버렸다.
그 와중에 ‘둘 중 하나라도 정신을 똑바로 차리면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 따위로 부질없는 자기 위로를 시도해 보았지만, 아무래도 둘 다 제정신이 아닌 지 오래인 것 같다는 어렴풋한 확신이 가슴 언저리에 스며들고 있었다.
“여보세요.”
아연은 어쩐지 포기한 듯 맥 빠진 음성으로 전화를 받았다.
- 뭐 해.
예의상의 인사 같은 건 가볍게 무시한 채 본론부터 건네 오는 무례하고 합리적인 전화 예절은 참 한결같았다.
단 두 글자에서 전달되는 짜증스러움에 그가 어울리지도 않게 오랫동안 인내하며 기나긴 신호음을 참아 왔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냥. 카페 생각.”
전화기 너머 성현이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저 갑작스럽게 둘러댄 핑계일 뿐이고, 사실은 머리가 지끈거리도록 그의 생각에 빠져 있었다는 것을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아연의 뺨이 화르르 달아올랐다.
- 역시 사장님이라 그런지 다르네. 퇴근한 후에도 자나 깨나 가게 생각.
“앞날이 창창하게 펼쳐진 누구랑은 다르게 우리 카페는 늘 위태로워서.”
- 앞길 창창한 누군가가 혹시 나야?
“그럼 누구겠어.”
샐쭉하게 대답하자, 비웃을 거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진지한 음색이 돌아왔다.
- 글쎄. 창창한 거랑은 별개로 욕심이 많아서 만족을 모르는 게 문제지, 나는.
뜻 모를 말에 아연은 입을 다물었다. 아니, 어렴풋이 알 것도, 모르는 것도 같지만 되묻기 두려운 종류의 그런 미묘한 감정이 두 입술을 딱 달라붙게 만들었다.
- 어쨌든. 카페 생각은 왜.
저도 자세히 설명할 마음은 없었는지 성현은 자연스럽게 화제를 전환했다. 아연은 무릎에 내려놓은 카탈로그를 흘끗 쳐다보았다.
“디저트를 몇 개 들여놓으려는 참이라. 민재 씨라고, 우리 가게 직원 알지? 민재 씨가 다니는 공방을 추천해 줬거든. 가격도 괜찮게 맞춰 줄 것 같고.”
- 그 모지리 얘기라면 관심 없어.
뒤에 주절주절 늘어놓은 이야기는 듣지도 않고 대뜸 한다는 말이 무슨 애 같지도 않은 소리다.
“네가 물어봐 놓고 웬 트집이야. 모지리는 또 무슨 소린지.”
- 주제도 모르고 널 쳐다보는 눈깔이 모자라 보이잖아. 넋 빠진 얼굴은 멍청해서 불쾌하고.
그의 신랄한 비난에 졸지에 욕을 먹고 어딘가에서 귀가 간지러울 민재를 향한 가엾은 마음이 샘솟을 지경이었다. 저 좋을 대로 살아온 태강의 황태자답게 그는 도무지 참는 바가 없었다.
다만, 이제껏 주변 사람들에게 관심조차 기울이는 일이 없던 무감한 성현이었기에 요즘 들어 종종 그가 보이는 신경질적인 기색이 낯설기만 했다. 대다수가 아연의 주변 인물들을 상대로 짜증을 부리는 경우였기에 더더욱.
저번에는 준성과 언제 그렇게 친해졌냐는 둥 이상한 소리를 지껄이더니 오늘은 난데없이 민재를 향한 트집이라니. 무슨 질투라도 하듯이…….
그럴 리가.
아연은 제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즉시 단호하게 부인했다.
권성현이 질투라니. 세상에 둘도 없이 안 어울리는 단어의 조합이었다.
그런 생각을 떠올린 것만으로도 찝찝해져서 아연은 어색하게 헛기침을 내뱉었다.
“대체 민재 씨를 얼마나 봤다고 그런 불만이 쌓인 건지 모르겠지만, 우리 가게의 성실한 직원이야. 착하고, 일 잘하고, 그만하면 얼굴도 준수하고.”
그러니까 이제까지의 경험상 성현이 질색할 만한 ‘얼굴이 어쩌고’ 하는 말 따위를 덧붙인 것은, 어쩌면 제 어딘가에 자리한 약간의 가학성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가 내보이는 낯선 반응들이 난감하고 당혹스러우면서도, 가슴 언저리가 왠지 모르게 간지러워지는 느낌이 아주 나쁜 기분은 아니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