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도승한 전무 결혼한 것도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았는데, DH그룹은 두 해 연속으로 결혼식을 치르네요. 들리는 소문에는 그 둘째가 먼저 하려고 하는 것을 도 회장님께서 개혼은 무조건 장손이 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셨다고 하던데.”
주은이 콧등을 찡긋거리며 괜스레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은애가 딸을 나무라듯 눈살을 찌푸렸다.
“근거도 없는 소리 함부로 하는 거 아냐.”
“우리끼리 있는 자리인데요, 뭘.”
“그래도. 사람들이 재미 삼아 하는 소리에 너까지 입 댈 거 없잖니.”
은애가 단단한 눈길로 주의를 주자 주은은 재미없다는 듯 작게 콧방귀를 뀌었다.
은애는 그런 딸을 바라보며 작게 혀를 찼다. 주은은 권씨 집안 사 남매 중 가장 격식이라는 말과 거리가 있는 성격이었다.
재벌가의 두 딸이 모두 의대를 나와 개인 병원을 운영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파격에 가까웠다. 보통은 경영 일선에 나서거나 그룹의 안주인을 도와 집안의 대소사를 챙기는 재벌가 영애의 모습에서 한참 벗어난 그들의 행보는 한때 대한민국 정재계에서 소소하게 화제가 되기도 했었다.
두 사람이 모두 의학도의 길을 걷기 시작할 무렵엔 태강에서 운영하는 병원이 상급 종합병원 평가 1위 자리를 놓고 도성병원과 뜨거운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렇기에 세간에서는 태강의 권민환 회장이 손녀들에게 병원을 맡겨 규모를 더 키우려는 게 아닌가 하는 추측도 나돌았었다.
그러나 항간의 예측과는 달리 지연과 주은은 각각 개인 병원을 차리고 그룹과는 분리된 길을 걸었다. 비록 두 사람의 남편은 모두 태강그룹에 적을 두게 되었지만.
“어쨌든 이제 슬슬 성현이도 결혼 생각 해야죠.”
주은이 조용해지기를 기다린 태준은 동의를 구하듯 윤재의 얼굴을 보며 그의 의중을 살폈다. 윤재는 뜻 모를 표정으로 말없이 차를 삼키고는 성현을 바라보았다. 본인의 생각은 어떤지 묻는 것이었다.
그러나 성현이 입술을 채 열기도 전.
“회사 일에 적응하려면 더더욱 빨리 안정된 가정을 꾸려야 합니다.”
태준이 그 어느 때보다 열정적으로 말을 이었다.
“모두 잘 아시다시피 성현이의 회사 입성을 두고 혈통주의니 성골이니 하는 부정적인 기사가 쏟아지고 있습니다. 홍보실에서 언론을 관리하는 데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모든 보도를 통제할 수는 없으므로, 궁극적으로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윤재의 미간에 선명한 실금이 그어졌다.
삽시간에 식탁 위의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천성적인 사업가의 자질을 갖춘 윤재는 대다수의 일에 의연했다. 무뚝뚝한 낯빛 아래에 속내를 감추는 데 능했고, 그것이 현재 그가 오른 부회장 자리를 굳건히 지키는 데 큰 역할을 했지만, 지금만큼은 불편한 심기를 훤히 드러내고 있었다.
비공식적인 루트를 통해 알아본 바에 따르면 누군가 일부 언론과 엮여 태강그룹을 상대로 장난질을 치고 있었다.
말하자면 일종의 선동. 그룹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대응하기도 모호한 종류의 여론 몰이에 윤재 또한 그 문제에 대해 신경이 날카로워진 상태였다.
“성현이에게 힘을 실어 줄 수 있는 집안의 아가씨를 들이는 것이 가장 그럴듯한 해결 방안이 될 겁니다. 회사 내에서 성현이의 입지를 공고히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은 둘째 치고, 언론의 눈을 돌리기에도 가장 좋은 그림입니다. 사람들은 재벌가의 결혼을 좋아하니까요.”
“그런 한심한 이유로 결혼할 생각은 없습니다.”
단조롭고 심드렁한 음성. 태준은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성현이 무감한 얼굴로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있었다. 그가 손에 쥐고 있던 찻잔을 식탁 위에 탁 내려놓았다.
그리고 잠시간의 정적.
아무런 부연 설명도 이어지지 않았다. 제가 싫으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더 이상 들을 것도, 할 말도 없다는 듯한 성현의 무성의한 태도는 몹시 당연하고 당당하기만 하였다.
태준이 입술을 달싹거리며 막힌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심한 이유라니.”
“저더러 대중들을 상대로 광대놀이를 하란 말입니까, 기 사장님. 제 인생까지 걸어 가면서?”
성현이 태준을 똑바로 마주 보며 ‘기 사장님’이라는 호칭에 한 자 한 자 힘을 주었다.
태준의 눈이 커졌다. 이제껏 제가 계속해서 그를 ‘성현이’라고 편히 부른 것에 대한 노골적인 경고가 느껴졌다.
자신도 모르게 등줄기에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말문이 막힌 태준은 깊은 당혹감을 느끼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태준이 이 집안의 데릴사위로 들어온 17년 전, 성현은 나이 열두 살의 애송이에 불과했다. 풋내나 풀풀 풍기던 그 어린애가 언제 이렇게 자라서 시퍼런 안광을 쏘아 내고 있는 것인지. 사뭇 새삼스러웠다.
성현의 키가 채 성인이 되기도 전에 이미 태준을 훌쩍 넘어선 지 오래였지만, 태준이 바라보는 성현의 얼굴에는 여전히 그 어릴 적의 앳된 인상이 남아 있었다. 그렇기에 태준이 성현에게서 이러한 위압감을 느끼는 것은 실로 처음이었다.
늘 태준에게 깍듯하게 매형 대우를 하던 성현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어안이 벙벙했다. 못내 당황스러워 눈알을 굴리던 태준은 문득 비웃음을 흘렸다.
인생이라니. 고작 결혼이라는 이슈에 인생을 건다고 믿다니, 덩치만 커다랬지 그래 봤자 역시 여전히 애송이에 불과했다. 온화한 온실에서 꽃노래만 들으며 자라난 황태자.
태준은 다시 여유를 찾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짐짓 자상한 미소를 입가에 띠었다.
“이번에 결혼하는 친구가 연애 끝에 하는 결혼이라 덩달아 환상을 가지는 기분은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지레 부정적으로 생각할 건 없어. 어디까지나 어른들이 골라 준 인연인 것뿐이지, 요즘 젊은 사람들 많이들 하는 소개팅 같은 거랑 다를 것도 없으니까.”
“애초에 소개팅 같은 것도 관심 없고 싫습니다, 전.”
성현은 두 번 말하게 한 것에 짜증이 난 듯 한층 더 냉랭해진 낯으로 고개를 돌렸다. 식탁 위의 분위기가 어색하게 냉각되자 은애가 부드럽게 끼어들었다.
“그래, 내 생각엔 성현이가 아직 그렇게 많은 나이도 아니고, 외부 상황에 떠밀려서 급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본인도 별로 원하지 않는다면 더더욱이…….”
그러나 태준은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반박했다.
“마냥 적은 나이도 아니지요. 이 사람이 저와 결혼할 때 나이가 스물셋이었으니까요. 저 역시 성현이 나이엔 이미 첫째 윤수를 봤고.”
태준이 제 아내인 지연을 가리키며 미국에 유학 가 있는 첫째 아들 윤수까지 언급했다. 자신에 비하면 이미 한참 늦었다는 듯 숫제 안타까운 표정까지 지어 가며.
지연은 남편이 대체 왜 이리 끈덕지게 구는지 의아한 낯으로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결혼 배경은 지금의 경우와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다.
대학의 같은 동아리에서 만난 태준에게 첫눈에 반한 지연이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거의 우격다짐으로 추진한 결혼이었다. 그녀가 대학에 진학했을 때부터 이미 전공 선택을 두고 부모와는 견해 차이가 있었지만 지연의 고집을 꺾지 못했고, 쇠심줄 같은 고집은 결혼에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케이스랑 같은 선상에 놓고 보기는 어렵지. 엄마 말대로 성현이는 급할 거 없어요. 더군다나 할아버진 병원에 입원해 계신 와중에 논할 만한 일도 아니고.”
“그룹의 위기 상황일수록 장손의 역할이 중요하지. 아버님, 물론 회장님의 증세가 당장 위중한 건 아니지만, 나이가 있으신 만큼 저는 이번 일이 단순한 해프닝으로 넘길 사안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회사에서는 그룹 차원의 대응을 하겠지만, 일가에서는 일가 차원의 준비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태준의 말을 끝으로 다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줄곧 조용히 앉아 있던 윤재가 이윽고 고개를 들었다. 담담하게 뜬 눈동자 안에 사업가 특유의 날카로운 눈빛이 스쳤다.
“성현이 너.”
“네.”
성현은 여상하게 대답했다.
“따로 만나는 여자가 있는 거냐.”
윤재와 성현의 시선이 마주쳤다. 눈빛만으로 상대를 압도하고 손쉽게 함락시키는 태생적인 힘은 성현이 그의 아버지로부터 고스란히 물려받은 것이었다.
팽팽하게 맞부딪친 시선. 은애 또한 혹시나 하는 마음과 궁금증, 그리고 약간의 불안이 섞인 얼굴로 제 아들을 바라보았다.
“없습니다. 그런 거.”
성현은 짧은 대답으로 날 선 긴장감을 무너뜨렸다. 그의 무표정한 얼굴에는 어떠한 동요도, 흔들림도 없었다.
만나는 여자.
입 안에서 그 말을 천천히 되뇌자 자연스럽게 누군가의 말간 얼굴이 연상되었다.
제 품에 안겨 곤한 숨을 색색 내쉬며 잠에 빠진 옆모습. 장밋빛 뺨 위에 늘어진 부드러운 머리카락. 흘러내린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 주고 관자놀이에 쪽 하고 입을 맞추면 으응, 하고 어리광 부리는 듯한 소리를 내며 제게 더욱 파고들던 귀여운 몸짓.
성현은 머릿속에 떠오른 장면을 더듬듯이 되새기다가 이내 그런 스스로를 비웃었다.
만나는 여자라니. 그 말을 듣는다면 새파랗게 질려서는 핏기가 다 빠져나간 얼굴로 있는 대로 정색을 하겠지.
저와 하고 싶은 게 섹스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듯이 선을 긋는 한아연을 생각하는 스스로가 한심하고 퍽 없어 보인다 싶었지만, 어디까지나 제 머릿속에서나 벌어지는 일이었다.
겁을 먹으면 누구보다 빠르게 꼬리를 자르고 부리나케 도망갈 모습이 뻔히 보였으니까.
그는 요새 부쩍 아연을 떠올릴 때마다 토끼몰이라도 하는 것처럼 재미와 긴장, 불안과 쾌감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질색한 얼굴로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치기 바쁜 뒷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심사가 뒤틀리며 척추 부근이 지끈거렸다.
“저 먼저 일어날게요.”
성현이 대화를 일축하며 기척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 구슬려 봐야 말이 통할 리 없는 고집 센 성질머리를 익히 알아서인지 아무도 식탁에서 벗어나는 그를 붙잡지 않았다.
그 와중에 태준이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처럼 입술을 달싹거렸으나 지연이 옆구리를 세게 꼬집자 마지못해 입을 다물었다. 태준은 얼얼한 옆구리를 문지르며 아쉽다는 눈길로 멀어지는 성현의 뒷모습을 응시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