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꿈을 꾸었다. 근래 들어 성현이 꾼 꿈 중에서는 퍽 얌전하고 참한 꿈이었다.
최근에 꾼 꿈이라곤 대부분 제가 벌거벗고 있거나, 허겁지겁 누군가를 발가벗기고 있었다. 그 누군가는 당연하게도 오로지 한 사람, 한아연이었고.
보통 한아연이 등장하는 꿈에서 그는 그녀의 가녀린 몸을 부여잡고 미친놈처럼 허리를 흔들었다. 그렇게 허리를 흔들어 대면서도 차마 어찌하지 못할 만큼 심각한 갈증에 허덕이며 괴로워했다.
마치 궁지에 몰린 사람처럼 간절한 해답을 구하듯 그녀의 몸을 탐하던 평소의 그 지긋지긋한 꿈에서 벗어났다는 점은 그에게 꽤 의미가 깊었다.
아, 오늘도 역시 꿈속에서 그녀와 저 모두 벌거벗고 있다는 점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벗은 어깨에 입을 맞추며 가만히 그녀의 몸을 끌어안고 있다는 건 원래의 그 정신 나간 변태나 꿀 만한 꿈에 비하면 크나큰 발전이었다.
한아연의 몸에 단단히 홀렸던 거지.
한번 맛본 달콤한 과일에 다시는 입도 대지 못하도록 접촉을 금지당하니 해소되지 못하고 미쳐 날뛰던 성욕이 드디어 해결의 길을 찾았다는 증거이지 않은가.
밤새 이어진 만족스러운 섹스 덕분에 제 무의식 속의 음험한 자아가 어느 정도 인간성을 회복하였다는 안도감에 젖으며, 성현은 아연의 벗은 몸을 제 쪽으로 더욱 끌어당겼다. 물론 꿈속에서.
꿈에서의 그들은 여전히 몸이 연결된 채였다. 성현은 저를 빠듯하게 감싸는 내벽의 포근함에 마치 따스한 물속에 둥둥 떠 있는 듯한 편안함과 안락함을 느끼며 일종의 포만감과도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의 성현은, 텅 빈 침대 옆을 더듬거리다가 꿈에서 깨어났다.
따뜻하고 아늑한 꿈에서 졸지에 내팽개쳐진 듯한 허무함에 잠시 정신이 멍했다. 눈꺼풀을 서서히 들어 올린 성현은 제 손이 믿을 수 없다는 양 더듬거리고 있는 빈 옆자리를 바라보았다.
“하.”
허탈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대체 언제 조용히 빠져나간 것인지.
한아연이 도둑고양이처럼 살그머니 사라지는 사이, 저는 속 편하게 드러누워서 잠이나 처자고 있었다니 어이가 없었다.
하여간 고집은 더럽게 세지. 이 집에서 자고 가면 하늘이 무너지기라도 하나.
피곤에 전 몸을 해 가지고, 새벽에 일어나 아득바득 제집으로 돌아간 아연의 집념이 그에게 시사하는 바는 분명했다.
관계의 규정.
몸은 섞어도 마음은 섞지 않겠다는 고집스러운 오기.
그를 깨우지 않기 위해 살금살금 침대를 벗어나 복도와 거실 여기저기에 내동댕이쳐진 옷가지를 보물찾기하듯이 하나씩 찾아서 주섬주섬 주워 입었을 한아연을 생각하니, 가슴 한구석이 시린 한기가 관통한 것처럼 싸해졌다.
새벽 시간, 아무리 보안이 철저한 건물이라고 한들 어느 미친놈이 복도에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기에 집 밖은 늘 위험한 법이다. 그런 곳을 지친 몸을 이끌고 터벅터벅 혼자 걸어 집으로 걸어갔을 가녀린 뒷모습이 떠오르자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심기가 뒤틀렸다.
성현은 짜증스럽게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신경질적인 몸짓으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시계를 확인했다.
새벽 5시. 평소 일어나는 시간보다 한 시간은 이른 시간이었지만 다시 잠들 기분도 아니었다. 기분이 더러울 땐 늘 그랬듯이 운동으로 몸을 혹사시키는 게 가장 효과적이다.
빠르게 몸을 일으킨 성현은 무언가 회상하듯 흐트러진 침대 시트를 잠시 잠잠한 눈길로 바라보고는 시트를 벗겨 내기 시작했다.
어차피 집을 정리해 주는 손길이 따로 있으니 그냥 내버려 두어도 될 일이지만, 그는 웬만한 것들은 제 손으로 해치우는 편이었다.
제가 원하는 물건이 제자리를 벗어나는 것, 미묘한 각도로 벗어나 있는 것, 혹은 제가 원하는 방식에서 벗어난 정리 형태에 은근히 예민을 떠는 더러운 성질머리를 스스로 잘 파악하고 있는 까닭이었다.
익숙한 몸짓으로 침대 정리를 끝마친 성현은 벗겨 낸 시트를 세탁기 안에 집어넣고 나서야 뚜벅뚜벅 걸어 욕실로 향했다. 그런데 욕실 안으로 들어선 성현의 눈썹이 일순 꿈틀거렸다.
욕실 안은 평소 유지하는 정리 상태에 비하면 초토화 수준이었다. 샤워기는 바닥을 나뒹굴고, 샤워볼도 물기를 흠뻑 머금은 채 중간에 떨어져 있었다. 정액이 찬 콘돔이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는 것까지.
어젯밤 이곳에서 치른 격렬한 섹스의 흔적이 여실했다.
평소 습관적으로 물건을 제자리에 정돈하는 그에게는 거의 카오스에 버금가는 광경이었다. 한아연의 뒤에 달라붙어 게걸스럽게 그녀를 탐하는 동안에 그가 얼마나 정신이 나가 있었는지를 고스란히 나타내는 증명이 아닐 수 없었다.
피식 실소를 흘린 성현은 바닥에 떨어진 샴푸 통을 주워 들었다.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치며 허우적거리던 아연의 손에 걸려 후드득 떨어져 내리던 모습이 뇌리를 스쳤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양, 왜 그렇게까지 괴팍하게 굴었는지 제가 생각해도 좀 심각한 수준이었다.
변태라 불려도 할 말이 없지.
성현은 본인이 심하게 섹스에 몰입했다는 사실을 순순히 인정했다. 한아연과 하는 섹스가 몹시 마음에 들었다.
고로 앞으로도 계속, 마음껏, 질릴 때까지, 언제 질릴지 끝을 장담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그때까지는 그만둘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결론에 다다른 성현이 산뜻하게 미소 지으며 샤워기를 틀었다.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시원한 물줄기를 맞는 그의 입꼬리에 걸린 미소가 음험하기 짝이 없었다.
* * *
계절은 어느새 완연한 여름의 문턱을 넘어서고 있었다.
뜨거워지기 좋은 계절.
태송현의 본채는 흡사 요새처럼 보였다. 높다랗게 둘러싸고 있는 사시사철 푸르른 상록수들은 온건한 날씨를 맞아 더욱 울창해져 있었다. 빽빽하게 우거진 나무 틈으로 들이친 햇살이 무감한 표정으로 정원의 디딤석을 걷는 성현의 얼굴 위에 어스름한 그림자를 만들어 냈다.
태송현의 직원들은 고요하면서도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매주 모든 가족이 모여 식사를 하는 수요일 저녁이기 때문이다.
부쩍 길어진 해가 커다란 창을 통해 내리쬐었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저녁 식사 시간에는 저택 바깥에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지만, 오늘은 붉디붉은 해가 아직 태송현의 푸른 소나무 끝에 아스라이 걸려 있었다.
핏빛 햇살이 거실에서부터 다이닝 룸까지 길게 선을 그렸다. 본채의 내부에는 묘하게 가라앉은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가장 마지막으로 도착한 성현이 늘 앉던 자리를 채우자, 마치 그것을 신호로 하듯 조용히 대기하고 있던 직원들의 몸놀림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돌솥에 지은 밥과 뚝배기 안에서 여전히 부글부글 끓는 복국이 차례로 식탁 위에 내려졌다. 온갖 제철 재료를 이용한 갖가지 반찬들은 이미 소담스러운 모양새로 화려하게 차려진 상태였다.
식탁의 상석이자 식탁 전체를 굽어살피는 듯한 위치의 자리가 비어 있는 것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보통은 태강그룹의 권민환 회장이 준엄한 풍채로 채우는 자리였다.
침강한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듯 성현의 작은누나인 주은이 말했다.
“가족 식사에 회장님이 안 계시니까 이상하네요.”
권 회장의 며느리이자 성현의 어머니, 은애가 주은의 말에 비어 있는 자리를 보며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출장이나 간담회 같은 회사 일로 빠지신 적 외에는 처음이시지.”
“병원에서는 뭐라던가요?”
“검사 결과는 나쁘지 않다고 해. 그래도 뇌경색이 비교적 초기에 발견되어서 약으로 치료가 가능한 상태로 보인다고 하더구나. 수술 필요 여부는 앞으로 조금 더 지켜봐야겠지만.”
지난 주말 저녁, 평소와 같이 아들인 권윤재 부회장과 위스키를 한 잔 앞에 두고 담소를 나누던 권 회장이 심한 어지럼증을 호소하며 쓰러졌다. 태송현의 분위기가 미묘하게 침잠되어 있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권 회장의 신변은 그룹의 주가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기에 아직까지 그의 입원 소식은 극비에 부쳐져 있었다.
그룹 소유의 병원, 일가 전용 VIP 병동에서 특별 관리 중인 덕분에 언론의 눈을 피하고는 있지만, 원천 차단을 단정할 수 없기에 그룹에서는 내부적인 대응안을 세우고 사전 준비에 돌입한 상태였다.
온종일 전략 회의며 내부 단속에 시달린 윤재는 특히 날 선 공기를 주변에 휘감고 있었다.
권 회장이 병원에 입원해서까지 부득불 전화를 걸어 절대 가족 식사를 취소하지 말라고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면 최소한 이번 주는 생략했을 자리였다. 이럴 때일수록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입과 귀에 대한 경계와 통제를 게을리해선 안 된다는 그의 뜻이었다.
“그래도 가족까지 면회를 거부하신 건 조금 과하지 않나 싶어요.”
지난 주말 조부가 갑작스럽게 병원에 입원한 이후 두 차례에 걸쳐 면회를 거절당한 주은이 서운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맞은편에 앉은 성현의 첫째 누나 지연이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나는 여전히 건재하니 쓸데없이 들락거려서 기자들 눈에 띄지 말고 너희들 입단속이나 잘해라, 이런 의미겠지.”
지연의 말에 그의 남편이자, 권 회장의 손녀사위인 기태준 사장이 제 아내의 얼굴을 흘끗 살피고는 말없이 국물을 떠 입에 넣었다.
태준은 지금으로부터 17년 전 태강그룹 재벌 3세인 지연과 결혼함으로써 로열패밀리에 입적, 데릴사위를 자처하였다. 태강에 온몸을 바쳐 일해 왔다고 자평하는 그는 태강바이오의 사장직을 맡고 있었다.
태강바이오는 태강그룹에서 그동안 손대지 않았던 신약 기술 분야를 선점하기 위해 대규모 투자를 거쳐 세운 계열사였다.
오랜 시간 공들인 끝에 바이오의 사장 자리를 얻어 낸 태준으로서는 코스피 상장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권 회장의 일신상의 문제가 터진 탓에, 양날의 검을 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빠르면 이번 주 내로 퇴원하실 거다. 집에서 곧 뵙게 될 테니까 굳이 면회할 필요 없다는 뜻이시니 수선 떨 것 없어.”
윤재가 권 회장에 대한 화제를 일축하듯 점잖은 말투로 말했다. 그 후로는 그룹 현황과 두 사위가 각각 맡고 있는 계열사와 관련된 업무 이야기가 간간이 이어졌다.
식사가 마무리되어 갈 무렵, 잘 말린 금계국 세 송이가 띄워진 찻잔이 식탁 위에 내어졌다. 진한 차향이 다이닝 룸을 채우자, 가족 식사 자리답지 않게 딱딱한 회사 이야기만이 오가던 경직된 분위기가 다소 풀어졌다.
“그나저나 DH그룹에서는 곧 둘째 결혼식을 치른다던데, 이번에 결혼하는 친구가 성현이랑은 동창 사이이지 않습니까.”
줄곧 조용하던 태준이 넌지시 화두를 던졌다. 성현은 담담한 눈길로 그를 응시하다가 찻잔을 들어 입가로 기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