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혀 위에 녹아내리는 달콤한 아이스크림. 채 다물지 못한 입술에 살며시 내려앉은 그의 입술은 뜨겁고 말랑했다.
쪽. 쪼옥.
그는 아이스크림을 받아먹는 것처럼 살포시 벌어진 아연의 입술을 할짝거렸다. 그가 가볍고 간지러운 압력으로 핥아 댈 때마다 눈꺼풀이 움찔거렸다.
얼마 후 입술에 달콤함을 바르듯 나긋하게 느릿느릿 지분거리던 움직임이 떨어져 나갔다. 아연은 손등으로 젖은 입술을 훔쳤다. 눈동자가 거세게 뒤흔들리고 미간에 실금이 그어졌다.
“……뭐야.”
“뭐 어때. 이 정도는.”
“아이스크림을 이렇게 먹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이렇게 먹으니까 맛있네. 그동안 왜 안 먹었나 싶을 정도로.”
성현은 능청스럽게 대꾸하며 입맛을 다시듯 혀로 입술을 스윽 핥았다. 그러는 와중에도 노골적으로 아연의 입술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연은 뒤늦게나마 최대한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수저를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분명히 말하지만, 난 아이스크림만 먹으러 온 거야. 다른 허튼 생각은 전혀 없으니까, 너도 이상한 짓 할 생각…….”
“이상한 짓이라니. 우리 많이 하던 거잖아. 우리 본가엔 아직도 너랑 내가 입술 비비는 사진이 벽에 걸려 있어.”
성현의 말에 맥이 탁 풀렸다. 많이 하긴 뭘 했냐며 대차게 반박하려던 말은 입 속으로 허탈하게 사그라들었다.
그가 말하는 ‘입술 비비는 사진’이라면 아연의 집에도 있었다. 서랍장 어딘가 깊숙이 잠들어 있는 사진 앨범 안에.
정확히는 두 사람이 같은 유치원에 다닐 적, 학예회 때 로미오와 줄리엣 연극 무대에서 찍힌 우스꽝스러운 사진이었다. 심지어 어린 권성현은 뽀뽀하기 싫다고 엉엉 울고 있었다.
“이 와중에 언제 적 사진을 얘기하는 거야.”
아연은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가 무엇에 겁을 집어먹었는지 뻔히 알면서, 까마득하게 먼 어릴 적의 이야기를 들출 건 무어란 말인가.
쪽.
아연의 턱을 가볍게 감싸 쥐고 제 쪽을 향하게 한 성현이 다시 입술을 붙여 왔다. 장난치듯이 짧게 빨리고 풀려난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대체 사람 말을 듣고는 있는 건지, 또다시 말이 통하지 않는 벽과 대화하는 듯한 꽉 막힌 기분에 기가 쭉 빠져나갔다.
“이상한 짓은 안 할 테니까.”
“…….”
“혀 한 번만 넣어 보자.”
아연이 황당한 눈길을 쏘아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이미 얼굴을 그녀에게 바짝 기울인 성현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오로지 아연의 입술만을 집어삼킬 듯이 응시하고 있었다.
“넣긴 뭘 넣어. 그런 변태 같은 소리 하면 누가 들어줄 것 같…….”
비스듬하게 내리뜬 시선이 혼몽하게 배회한다. 더불어 아연의 말소리도 서서히 잦아들었다. 거부할 수 없는 기에 눌린 것처럼. 어쩌면 홀린 것처럼.
몇 번의 접촉으로 발그스름하게 부풀어 오른 붉은 입술의 유려한 선을 그가 엄지로 덧그렸다. 손끝에 힘을 주어 지그시 누르자 안쪽의 선홍빛 살갗이 엄지 아래에 뭉개졌다.
갈증이 인 듯 임계점에 다다른 그의 입술이 성급하게 부딪혀 왔다.
아랫입술을 머금은 열기가 입술 안쪽의 여린 살을 뜨겁게 달궜다. 비비고 뭉그러뜨리는 감각에 시야가 핑그르르 도는 것 같았다. 입술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온 혀가 입 안을 헤치고 아연의 혀를 찾아 감겨들었다.
아연의 눈썹 앞머리가 산을 그렸다. 하아. 숨기지 못한 더운 숨이 두 사람의 입술 틈으로 새어 나갔다. 일전에 덤벼들듯 한 키스와는 다른 의미로 그녀를 하나하나 함락시켰다.
성현은 음미하듯이 천천히, 몹시 느릿하게, 그러나 일말의 자비 없이 아연을 헤집었다. 혀의 돌기까지 예민하게 일어난 모든 감각을 남김없이 흡수해 나갔다.
오히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정신없이 몰아붙이는 짐승 같은 키스가 감사해질 지경이었다. 권성현의 냄새가, 움직임이, 온도가 너무나도 생생해 버거웠다. 도무지 이런 건 견딜 수가…….
“그만, 그만해.”
아연은 돌연 성현의 가슴팍을 밀어내며 고개를 틀었다. 밀면 미는 대로 대수롭지 않게 물러난 그는 방금 한 키스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멀쩡하고 단정하기까지 한 얼굴이었다.
그에 반해 턱까지 차오른 숨을 몰아쉬고 가슴을 크게 오르내리며 진정하려 애쓰는 것은 오로지 아연뿐이었다. 억울하기도 해라. 아연은 손등으로 입술을 거칠게 닦아 내며 말했다.
“여기까지만 해.”
“왜?”
“말했잖아. 너랑 이런 짓 계속 이어 갈 생각이 없다고.”
“그렇게 말하기엔 꽤 적극적으로 입을 벌려 주고, 혀도 내줬다고 생각하지 않냐?”
불시에 정곡을 찔린 것처럼 아연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그래. 자연재해 앞의 한낱 초라한 인간처럼 거부할 새 없이 휘말려 버린 게 문제였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라 하더라도, 뒤늦게나마 체면을 차리고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려는 아연의 허튼 노력 따윈 그의 앞에선 무용지물이었다. 대화할수록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것처럼 제 머릿속만 얼얼해질 뿐, 그에겐 어떠한 타격도 미치지 않는 게 분명했다.
“죄책감이고 나발이고 집어치우고.”
머리를 움켜쥐고 끙끙거릴 정도로 내내 그녀를 괴롭게 했던 죄책감을 하등 하찮은 것으로 치부하는 걸 보면.
“너도 아쉽잖아. 지금도 꽤 궁금할걸. 침대까지 갈 것도 없이 여기서 바로 나랑 붙어먹으면 얼마나 기분 좋을지.”
“맹세코 그런 생각 한 적 없어. 그딴 건 그다지 궁금하지도 않…….”
“나한테 뒤로 박히는 건 어떨지.”
“…….”
아연은 경악한 눈을 들었다. 사람을 놀라 자빠지게 할 만한 천박한 언사를 늘어놓은 주제에, 태연하게 미소 짓는 성현의 얼굴에 기가 막힐 따름이다.
얼빠진 얼굴로 어버버 하는 사이, 코앞까지 다가온 성현이 야살스럽게 속삭였다.
“나랑 뒹군 거, 좋았잖아. 아냐?”
“그래. 아니. 난 별로. 괜찮았지만, 아니야.”
이젠 도무지 무슨 말을 지껄이고 있는지조차 인식하지 못한 채 자동으로 흘러 나가는 제 목소리를 들을 뿐이었다.
성현은 그런 아연이 귀엽다는 듯 피식 웃으며 입술을 깨물더니 손을 뻗었다. 커다란 손이 아연의 뒷목을 완전히 감싸고는 야릇하게 문지른다.
“네가 이 동그란 머리통을 얼마나 복잡하고 쓸데없는 생각으로 가득 채운지 알아. 시답잖은 결론으로 흘러가는 걸 보면 같잖고. 난 네 표정만 보면 그 속이 훤히 보이거든.”
“…….”
“너랑 내 사이가 달라질까 봐 무서운 거잖아.”
“맞아. 무서워. 알면 좀 치워.”
아연은 뒷덜미를 쓸어내리는 손을 짜증스럽게 밀쳐 냈다. 그러나 언제나 그녀가 미는 대로 밀려나 주던 단단한 팔이 이번에는 쉽사리 물러나지 않았다.
“무책임하게 굴지 마. 먼저 부추긴 쪽이 누군지 잘 생각해 봐.”
성현은 그녀의 가녀린 목줄기를 손쉽게 한 손아귀에 쥐고는 엄지로 여린 살갗을 어루만졌다. 흡사 사랑스러운 애완동물을 쓰다듬기라도 하는 것처럼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몸이 벌겋게 달아서 앞뒤 안 가리고 들쑤신 쪽이 대체 어느 쪽인지는 다행히도 잊지 않은 얼굴인데, 어쭙잖은 핑계 대 가면서 발 뺄 시도라면 네가 포기해.”
다정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다정하지 못한 말을 속살거린다. 퍽 살가운 어조와는 달리 매서운 협박. 그럼에도 나긋나긋한 말투만큼은 상냥한 회유에 가까웠다.
“넌 이미 엎질러진 물에 등을 돌리면 마치 없었던 일이 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귀여운 위선을 떠는 겁쟁이지만, 우리가 또 한 번 잔다고 해서 사실 별로 달라지는 건 없을 거야. 네가 그렇게 지레 겁을 먹고 몸을 사린 보람도 없을 정도로.”
귀여운 위선. 사납게 빈정대는 말이 환청처럼 귓가를 먹먹하게 어른거렸다.
“우린 앞으로도 계속 같이 밥 먹고, 금요일 밤에는 소파에 늘어져서 영화 따위를 보고,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이면서 시간을 보낼 거니까.”
단조로우면서도 다채로웠던 그와의 지난 일상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 갔다.
“거기에 섹스 하나가 더해진 것뿐이야.”
지금 이 순간, 권성현은 그야말로 오만한 황태자의 낯을 하고 있었다. 저 좋을 대로 편리하게 살아온 곱상한 도련님 같은 반듯한 얼굴에 선명한 균열을 일으키는 질 나쁜 미소가 삐뚜름하게 걸려 있다.
저런 얼굴이라면 이렇다 할 논리 없이 어떠한 개소리를 늘어놓더라도 저도 모르게 납득하며 고개를 크게 주억거리기 십상일 터였다.
하마터면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할 뻔했던 아연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곤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네가 지금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궤변을 늘어놓는지 알고 있어? 세상에 어떤 친구가, 섹스를 해.”
“여기 있잖아.”
“…….”
“네가 순진한 날 침대로 꾀어내서 하룻밤 놀잇감으로 쓰고 버린 덕분에, 우리가 서로 아주 잘 맞는 몸을 가졌다는 건 충분히 알았고.”
아연은 기가 막혀서 코웃음을 쳤다. ‘순진’이야말로 지금의 권성현과 가장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하룻밤 놀잇감으로 쓰고 버렸다는 말에도 그다지 동의할 순 없었지만, 실제로 ‘그날’ 잠깐 유사한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으니 그 문제는 잠시 뒤로 미뤄 두더라도.
서로 잘 맞는 몸을 가졌다는 의견에 대해서도 토를 달고 싶진 않았다. 불리한 화제에 관한 대화를 이어 나가 봐야 제 손해만 극명해질 것이 분명했으니까.
“난 꽤 상처받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친구잖아.”
성현은 전혀 상처받지 않은 얼굴로 뻔뻔하게 말했다. 오로지 아연에게 더 큰 죄악감을 부여하기 위해 선택한 표현임이 틀림없었다.
“이미 한 번 잔 거, 두 번 자고 백 번 잔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을 거라는 소리야.”
말문이 턱 막혔다. 한 번 두 번에서 갑자기 백 번으로 뛰어넘는 게 황당한 건 말할 것도 없고, 그가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날것의 욕구가 몹시 선득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