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 (21/96)

<21화>

아연이 뒤늦게 주변을 둘러보는 사이, 성현은 어느새 멀어져 갔다. 깨끗하게 닦인 호텔 로비의 유리창 너머로 도어맨과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는 그를 바라보며 아연은 어깨에서 흘러내리려는 재킷을 연신 끌어 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연에게 다가온 성현은 말없이 그녀의 앞에 서더니 제 재킷의 앞섶을 깊숙이 여며 주었다. 그러고는 마치 그의 옷 안에 갇힌 것처럼 꽁꽁 둘러싸인 아연을 만족스러운 눈길로 내려다보았다.

성현은 차 뒷좌석에 나란히 올라탄 후에도 어떤 의무감에 휩싸인 것처럼 행동했다. 앉는 바람에 짧게 올라간 치마와 벌어진 재킷 사이로 아연의 허벅지가 허옇게 드러나자, 그는 그녀의 어깨에 걸쳐진 재킷을 끌어당겨 다리가 전혀 보이지 않도록 덮어 버리기까지 하였다.

다른 사람이 쳐다보는 것이 신경에 거슬리기 때문이라더니, 누군가의 음흉한 시선으로부터 그녀를 보호하듯이 구는 게 황당할 정도였다. 차 안에서 아연의 허벅지를 볼 수 있는 사람이라곤 그 자신뿐이었으면서.

“자, 여기. 네 옷 다시 가져가.”

대리 기사가 무사히 주차장에 차를 세워 준 후 떠나고,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복도에서 아연은 그의 옷을 돌려주며 말했다.

“계속 입고 있지, 왜.”

“이제 곧 집인데, 뭐.”

성현은 묘한 표정으로 말없이 제 옷을 받아 들었다. 먼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던 여자 한 명과 함께 두 사람은 승강기에 올랐다.

빌라 건물의 펜트하우스에 사는 성현은 가장 높은 층수인 20층 버튼을 눌렀다. 아연이 뒤이어 13층 버튼을 누르자 성현의 눈이 가늘게 찌푸려졌다.

“집에 들렀다 가.”

그가 아무렇지 않게 13층 버튼을 툭 눌렀다. ‘13층이 취소되었습니다’ 하고 엘리베이터 내에 기계음이 울렸다. 이제야 아늑한 저만의 공간에 들어갈 수 있다는 안도감에 젖어 있던 아연은 짜증 난 얼굴을 홱 들어올렸다.

게다가 집이라니? 자기 집이 언제부터 우리 집이었다고, 은근슬쩍 호칭하는 것조차 아연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왜.”

아연은 이를 악물고 애써 차분한 음색으로 물었다. 엘리베이터 안에 두 사람뿐이었다면 우격다짐이 일어나는 한이 있더라도 다시 13층 버튼을 눌렀을 테지만, 보는 눈이 있기에 체면을 생각한 것이다.

물론 그 체면이란, 권성현의 체면을 의미했다. 비교적 운신이 자유로운 저와는 달리 그는 언론에 얼굴이 꽤나 알려진 인물이니, 굳이 타인의 관심을 끌 만한 행동을 할 필요는 없었다.

“집에 그거 있어.”

음, 하고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성현이 답했다. 아연은 그다지 궁금하진 않았지만, 어디 한번 들어나 보자는 심정으로 되물었다.

“뭔데.”

“네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 저번에 맛있다고 했던 거.”

하. 어이가 없어서 방심하는 사이 헛웃음이 터졌다. 고작 생각해 낸 핑계라는 게 아이스크림이라니. 누굴 겨우 아이스크림 하나로 꼬여낼 수 있는 어린애로 아는 건지.

“그, 치약맛 나는 거.”

성현은 유혹하듯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연은 콧김을 거칠게 내쉬며 또 한 번 새어 나올 뻔한 실소를 간신히 삼켰다. 술 마신 다음 상큼달콤한 아이스크림이라니, 사실 몹시 끌리는 조합이긴 했다. 하지만 겨우 아이스크림을 미끼로 한 유혹에 휘말릴쏘냐 싶은 마음으로 팔짱을 끼워 올렸다.

“먹고 갈 거지?”

그가 매혹적인 악마처럼 속삭이며 슬쩍 손을 뻗어 왔다.

제발 날 좀 내버려 두었으면.

아연은 눈을 질끈 감았다. 팔꿈치를 가볍게 쥔 손가락이 깃털처럼 옅은 압력으로 둥글게 원을 그리곤 놀리듯이 멀어졌다. 그 장난스러운 손장난이 마음의 벽을 치듯 가슴 앞에 굳게 교차하고 있는 팔짱을 단번에 무력화시켰다.

아연은 홀린 듯한 기분으로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들릴까 말까 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스크림만.”

성현은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이윽고 한 걸음 바짝 다가선 그가 아연만 들을 수 있을 만큼 나지막한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

“다른 맛있는 것도 많이 줄 수 있는데.”

* * *

다른 맛있는 것도 많이 줄 수 있는데, 라니!

스푼으로 멍하니 아이스크림을 퍼 올리던 아연은 귓가에 울리던 야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를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말을 듣고 아무 대답도 내놓지 못한 채 붕어처럼 입만 뻐끔거리던 제 모습은 또 얼마나 멍청했던지.

무슨 정신으로 그의 집까지 쫓아 들어온 것인지 기억마저 흐릿했다. 성현의 손에 이끌려 널찍한 복도를 지나 층고가 높은 거실에 들어선 뒤, 기다란 소파 위에 앉혀진 아연의 손에 쥐어진 것은 그녀의 얼굴 크기 정도는 족히 돼 보이는 커다란 아이스크림 통이었다.

성현은 친절하게 뚜껑까지 열어 그것을 아연의 품에 안겨 주고는 “잠깐 씻고 올게”라는 말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졌다.

그러니까, 흐릿했던 정신이 마치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순식간에 제자리를 찾은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이를테면 아이스크림은 얌전히 기다리란 의미로 주고 간 미끼였다.

그것을 뻔히 알면서도 열심히 수저를 놀리고 있는 자신은 눈앞의 달콤한 미끼에 눈이 멀어 뾰족한 낚싯바늘이 몸을 꿰뚫을 것을 알면서도 덥석 입에 문 어리석은 물고기나 마찬가지고.

점차 머릿속이 선명해졌다. 현실감이 빠르게 밀려들며 동시에 견딜 수 없을 만큼 숙연해졌다.

인간은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는 말이야말로 자신의 처지에 딱 들어맞는 격언임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두 번째 실수를 치르기 직전이었으니, 여전히 회생의 기회는 남아 있었다.

‘붙잡히기 전에 도망쳐야겠다.’

아연은 품에 안고 있던 아이스크림 통과 스푼을 거실 테이블에 던지듯이 내려놓았다. 텅 하는 소리가 드넓은 거실에 울려 퍼졌다. 커다란 아이스크림 통을 끌어안고 있느라 차갑게 식은 손으로 무릎을 그러쥐고 다리에 힘을 주어 일어나려는 찰나.

“더 먹지, 왜.”

뒤에서부터 어깨를 꾸욱 내리누르는 힘이 느껴졌다.

허억, 아연은 숨을 몰아 삼켰다. 철렁 떨어진 줄 알았던 심장이 두근두근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뭐야. 무서워.

덫에 걸린 토끼. 혹은 사냥꾼의 총구에 겨누어진 사냥감.

아연은 일종의 공포심마저 덧씌워진 얼굴을 천천히 돌렸다. 아름다운 낯짝의 사신이 그림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속 두려움마저 훤히 보인다는 듯이.

“……까, 깜짝이야.”

그가 등 뒤까지 다가오는 동안 어떻게 눈치채지 못했을까 싶을 정도로 좋은 냄새가 아연을 덮치듯 둘러싸며 후각을 자극했다. 피곤한 몸과 쇠약해진 정신이 극도의 긴장 상태에서 잠시 풀어지기에 충분할 정도로 안정감을 주는 향기였다.

성현이 바깥에서 주로 고수하는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헤어스타일과는 달리, 이마 위로 자유분방하게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물기를 흠뻑 머금고 있었다. 규칙적인 진자의 운동을 보면 사람이 최면에 걸리기 쉬운 것처럼, 눈앞에서 흔들거리는 그의 새까만 머리카락에 감각이 점점 희미해졌다.

머리끝이 머금고 있던 물방울이 똑 하고 낙하했다.

그것이 제 쪽으로 떨어지는 모습이 늘어진 필름처럼 느리게만 보였다. 손톱만 한 물기 자국이 생긴 어깨가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흰 반소매 티셔츠와 검은색 트레이닝팬츠를 입은 성현은 물기가 남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소파를 돌아 어느새 아연의 옆에 털썩 앉았다. 아연은 구경꾼처럼 넋 놓고 앉아서 그가 한 치 앞까지 다가와 앉는 것을 바라볼 뿐이었다.

하필이면 ‘그날’과 똑같은 옷을 입고 눈앞에 나타난 그의 저의가 무엇일까, 따위의 허튼 생각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성현의 냄새, 눈빛, 숨소리, 움직임. 모든 게 아연을 휘감고 꼼짝 못 하게 만들었다. 깜빡깜빡. 눈꺼풀을 깜빡거리는 것마저 버거울 정도로, 모든 의지가 느슨해지고 있었다.

애석하게도 그 순간 수많은 여자들의 얼굴이 아연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카페에서, 외부 모임에서, 대학교에서, 일찍이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성현의 주변을 둘러쌌던 셀 수 없이 많은 이름 모를 희생자들. 마치 끈에 묶인 꼭두각시 인형처럼 보이지 않는 힘에 이끌리듯 그에게 집중되던 시선들.

이제 와 그들을 희생자라고 부르는 것은, 그들이 딱히 제 의지로 그에게 넋을 놓았던 건 아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저 역시도 무심코 그들과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으니까.

이상한 것은 이제껏 제게는 ‘면역’이라는 게 있었다는 사실이다. 아연은 오랜 시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성현을 보아 왔지만, 의연한 태도를 곧잘 고수했었다. 그러다 그 ‘충동의 밤’을 보낸 이후 갱생의 여지 없이 완전히 무너져 버린 것이고.

‘이건 다 저 잘나 빠진 낯짝 때문이야.’

모든 잘못을 뻔뻔하게 미소 짓는 저 근사한 얼굴에 미뤄 두고, 아연은 어색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 슬그머니 스푼을 집어 들었다.

표면이 녹아들기 시작한 아이스크림을 크게 떠서 입에 한가득 집어넣었다. 소파 등받이에 기대앉아 팔을 길게 걸친 성현은 그런 아연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사뭇 흐뭇해 보이기까지 한 얼굴이었다.

“너도 먹을 거야?”

아무 말 없이 아이스크림을 몇 번이고 떠먹던 아연은 고요한 정적에 등을 떠밀린 사람처럼 불쑥 물었다.

“응.”

의외였다. 단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성현의 평소 입맛을 아는 아연은 의아했지만 되묻는 대신 아이스크림을 떠서 그에게 내밀었다.

“아니. 이렇게는 말고.”

성현이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지그시 아연의 손을 감싸 쥔 그는 먹여 주는 것처럼 스푼을 그녀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아연은 얼떨결에 입술을 벌렸다. 차가운 아이스크림을 담은 스푼이 입술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그가 입술을 겹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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