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화 (20/96)

<20화>

서로 잠시 거리를 두자고 애원 아닌 애원을 했던 건 정작 자신이었다.

이대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은근슬쩍 지나가길 바랐던 건 나 아니었나?

그 후로 성현은 제게 불필요하게 연락을 취하지도, 카페에 찾아오지도 않았다. 제 부탁을 지나치리만큼 잘 들어주는 것뿐인데, 마치 일방적인 투명인간 취급이라도 당한 것처럼 왜 이토록 기분이 가라앉는 건지. 그녀 스스로도 이러한 변덕이 이해가 되지 않아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어쩌자는 거야, 한아연. 한심하게 굴지 마.’

뜨거워진 속을 달래려 물 잔에 손을 가져가던 아연은 중간에 마음을 바꾸어 와인 잔을 집어 들었다.

준성이 고심하여 골랐다는 컬트 와인은 향과 색이 진하고 보통의 와인보다 도수가 약간 더 높았다. 향을 음미하는 것을 생략하고 곧바로 입가에 기울였다. 우연인지, 다시 성현과 눈길이 닿았다.

“…….”

성현이 작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걸 보니 오히려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그래. 어쩌면 자신은 단지 그의 무시에 면역이 없었던 건지도 모른다.

언제부터 성현의 시선 하나하나에 이렇듯 기민하게 반응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잘 벼린 날을 삼킨 것처럼 입 안이 껄끄러워졌다. 그가 아무렇지 않게 저를 없는 사람 취급 하는 만큼 그녀도 천연덕스럽게 행동했지만, 자꾸만 경직되는 뺨을 감추기 위해 아연은 와인을 벌컥벌컥 삼켜야 했다.

“다들 적당히 먹은 것 같은데, 자리를 좀 옮길까?”

식사가 마무리된 테이블을 둘러보며 준성이 말했다. 그러고는 테이블 위에 팔을 걸친 채 와인 잔을 쥐고 있던 아연의 손등을 툭툭 두드렸다.

아연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의자에 기대어 있던 등을 곧게 폈다. 줄곧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느라 대부분의 대화는 귓등으로 스쳐 보낸 채로 식사가 끝나 버린 것이다.

허무와 안도가 뒤섞인 한숨이 새어 나왔다. 집의 푹신한 침대가 몹시 그리워졌다.

눈을 감았다 뜨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집까지 옮겨져서 따뜻한 물에 샤워를 마친 깨끗한 몸으로 묵직한 이불 아래 누워 있었으면. 그런 실없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2차를 이어 가기로 한 장소는 같은 호텔의 라운지 바였다. 다음 목적지가 정해지자, 처음 자리에 앉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준성이 한발 먼저 일어나 그녀의 의자를 잡아 주었다.

“오늘따라 상냥하네?”

“내가 언제 너한테 상냥하지 않은 적 있었나? 나야 늘 한아연한테는 매너가 넘쳤지. 네가 몰라줘서 그렇지.”

피식 웃으며 일어나던 아연이 순간 핑그르르 도는 듯한 어지러움을 느끼며 멈추어 섰다.

와인을 너무 많이 들이켠 탓일까. 제대로 식사를 삼키지 않은 헛헛한 빈속을 술로 채웠기 때문일까. 어쩌면 둘 다인지도.

아연은 의자의 등받이를 짚으며 휘청이는 몸을 기대었다.

“괜찮아? 와인이 도수가 좀 있었어. 어지러워? 혼자 설 수 있겠어?”

준성이 다급하게 다가서며 아연의 등허리를 받쳐 왔다.

“아, 아니야. 아무렇지도 않아. 갑자기 일어나서 그런가 봐.”

괜찮다는 뜻으로 고개를 젓는데, 익숙한 향수 냄새가 훅 끼쳐 들어왔다.

아연은 숨을 멈추었다. 느슨하게 늘어졌던 신경이 돌연 긴장감으로 뻣뻣하게 당겨졌다.

커다란 몸이 만든 그림자에 집어삼켜지는 것 같았다. 제게 이리 짙은 음영을 드리운 사람이 누구인지는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한아연.”

느긋하게 옆으로 다가온 성현이 나지막하게 아연의 이름을 불렀다. 귓바퀴를 핥아 내리는 듯한 달콤한 음성에 귓가에 난 솜털이 일제히 삐쭉거리며 일어섰다.

아아, 정말이지 취한 게 분명해.

아연은 느리게 눈을 깜빡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오늘 처음으로 가까이 보게 된 성현의 얼굴이 몹시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반듯한 눈썹과 적당히 미소 짓는 그림 같은 눈매, 직선으로 쏟아지는 짙은 시선. 삐뚜름하게 미소 짓는 붉고 아름다운 입술.

아연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지만, 어떻게 말을 하는지 잊어버린 사람 것처럼 멍하니 벌어진 입술을 달싹이기만 했다.

점잖고 사회적인 가면을 뒤집어쓴 그가 제 눈에는 어쩐지 꼭대기까지 가득 찬 화를 간신히 억누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건 단지 술기운 때문일까.

“내가 할게.”

성현은 평이한 어조로 말하며 아연의 등에 닿아 있는 준성의 손을 눈짓했다. 마치 귀찮은 파리를 쫓아 버리듯 하찮게 보는 눈빛이었다.

준성은 저도 모르게 어어, 하고 얼빠진 대답을 내놓으며 손을 멀찍이 떼어 냈다.

“아…….”

아연의 등을 가볍게 받치듯 성현의 팔이 자연스럽게 감겨들었다. 그의 손끝이 닿은 곳이 정전기가 일어난 것처럼 찌릿찌릿했다. 순식간에 술기운이 달아나는 것 같기도 하고, 온몸이 알코올에 잠식된 것 같기도 했다.

“그것도.”

성현이 손을 내밀자 준성은 제가 들고 있던 아연의 가방을 그에게 건네주었다. 어느새 어중간하게 뒤로 밀려난 상태로 서 있던 준성이 떠밀리듯 대답했다.

“어어, 뭐, 그래.”

흡사 주인의 명령을 받은 하인처럼 날래고 자동적인 움직임이었다. 뒤늦게 제가 너무 비굴해 보이진 않았나 싶었던 준성은 목에 힘을 주고 고개를 들다가 흠칫 놀라 굳어졌다.

가식적인 미소를 띠고 있는 반듯한 입매와는 달리 서늘하기 짝이 없는 고요한 눈동자.

서릿발처럼 냉랭한 성현의 낯을 마주한 순간, 준성은 왠지 모를 기시감에 뒷덜미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저 눈빛, 어디서 봤더라?

기억을 더듬은 준성은 아, 하고 탄식했다. 학창 시절 성현에게서 종종 보던 것과 같은 살벌한 눈빛이었다.

한아연을 대상으로 음담패설을 일삼던 질 나쁜 놈들을 두들겨 패고 다닐 때의 권성현.

준성이 당혹감에 굳어 있는 사이, 당연하다는 듯이 아연의 옆자리를 차지한 성현은 상체를 낮게 기울였다. 그가 속삭이듯 말했다.

“집에 갈까?”

아연은 작게 어깨를 움츠렸다. 온몸의 세포가 귀와 등에만 몰려든 것처럼 머릿속이 새하얬다. 지금 당장 집에 가고 싶었던 마음이 가득했지만, 오히려 성현의 말이 너무나도 유혹적이라 선뜻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날 이후 아연의 일상은 아이러니의 연속이었다.

의자 등받이를 짚고 있던 손을 떼어 내고 아연은 몸을 똑바로 세웠다. 그러고는 제 등허리를 휘감은 성현의 팔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왔다. 그의 두껍고 단단한 팔이 감겼던 부분의 감각이 예민하게 들끓었다.

‘몸이 대체 왜 이래. 미쳤나 봐.’

홧홧해진 것은 등줄기뿐만이 아니었다. 그곳에서 시작된 뜨끈한 감각이 아랫배를 달구고 뭉근하게 맴돌기 시작했다.

아연은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휘청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었다. 유일하게 다행인 것은, 성현이 다시 몸을 붙여 오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집에 가자.”

대답 없는 아연의 반응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성현은 그녀에게 기울였던 상체를 일으켜 세우며 단정적인 말과 함께 싱긋 웃었다. 시선을 마주한 채로 ‘들어 줄까?’ 하고 묻듯 제 손에 든 아연의 가방을 눈짓한다. 아연은 역시 대답 대신 조용히 성현의 손에서 가방을 건네받았다.

“우리 먼저 갈게.”

성현은 엘리베이터 앞에 선 일행을 향해 말하며 아래로 향하는 버튼을 툭 눌렀다. 준성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시시덕거리던 욱현이 돌아서며 히죽 웃고는 놀리듯이 빈정거렸다.

“너네 또 둘이서만 놀려고 그러냐? 지겹지도 않아?”

성현은 뻔뻔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응. 안 지겹던데.”

도둑이 제 발 저린 것처럼 아연의 얼굴이 화르르 달아올랐다. 손등으로 붉어진 뺨을 훔치자, 제 예비 신부를 옆구리에 거의 끼우다시피 한 진한이 그런 아연을 흘끗 살피곤 성현을 향해 말했다.

“한아연 취한 것 같은데 잘 데려다주고, 다음에 보자.”

“권성현이 어련히 알아서 잘 모시려고. 쟤 전공이잖아. 내버려 둬, 내버려 둬. 우린 올라간다. 진한이 결혼식 때 보는 걸로.”

마침 위쪽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욱현이 준성의 목에 팔을 두른 채로 두 사람을 향해 팔을 휘휘 저어 인사하며 엘리베이터 안으로 사라졌다. 진한과 나윤마저 뒤를 따르고 문이 닫히니 왁자지껄하던 복도가 한순간에 조용해졌다.

“혼자 걸을 수 있겠어?”

고요한 분위기를 가르며 성현이 나직하게 물었다. 아연은 어깨에 건 가방을 추어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안아서 옮겨 줄까?”

장난스러운 그의 물음에 아연은 눈살을 찌푸리며 흘기듯 날카로운 시선을 쏘았다. 성현이 피식 실소를 흘렸다.

이윽고 내려가는 방향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안에는 커플로 보이는 남녀가 타 있었다.

아연은 자신과 전혀 연관 없는 타인에 불과한 남녀 관계를 재단하는 취미는 없었지만, 굳이 눈여겨볼 필요도 없었다. 좁은 한 공간에 함께 서 있는 게 민망할 정도로 서로 더 가까이 달라붙지 못해 안달이 난 게 뻔히 보였을 정도였으니까.

남의 시선에 개의치 않고 애정을 과시하는 커플 옆에 나란히 서서 어색하게 눈알을 굴렸다. 숫자판을 바라보며 엘리베이터가 로비에 도착하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리던 아연은 문이 열림과 동시에 튕겨지듯이 바깥으로 나왔다.

화려한 조명을 고스란히 반사하는 대리석이 길게 펼쳐진 로비를 걸어가는데, 아연의 어깨에 불쑥 따스한 무언가가 닿아 왔다. 아연은 흠칫 놀라 멈춰 섰다.

자신의 정장 재킷을 벗어 그녀의 어깨에 걸쳐 준 성현은 의아한 얼굴의 아연에게 바깥쪽을 턱짓하며 말했다.

“대리 기사 도착하려면 조금 기다려야 돼. 추워 보이는데 입고 있어.”

다른 사람들이 너 쳐다보는 것도 거슬리고.

그가 의도적으로 아연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가져다 대고는 작게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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