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17/96)

<17화>

“네가 혼자 세운 건데 알아서 처리해. 난 바빠서 이만.”

아연은 허둥지둥 바깥으로 나갔다. 문 뒤쪽으로 성현이 키득거리는 소리가 놀리듯이 들려왔다.

닫힌 문을 노려보던 그녀는 씩씩거리다가 돌아섰다. 카운터에서 고개를 쭉 빼고 이쪽을 염탐하던 규영이 고개를 홱 돌렸다. 아무래도 내내 이쪽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아. 바보 아냐, 진짜.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야겠다는 생각에만 사로잡혀서 그를 탈의실로 끌고 들어갔는데, 괜한 호기심만 키운 꼴이었다. 여러모로 낭패였다.

좁은 공간이 주는 긴장감으로 머릿속은 엉망으로 뒤엉켰고, 제가 방금 무슨 말을 늘어놓았는지도 제대로 정리가 되지 않았다.

당최 언제부터 권성현과 단둘이 있는 것에 이렇게까지 몸이 얼어붙어 버리게 된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인정해야 했다. 몸은 제 것 같지 않게 말을 듣지 않았고, 뇌는 완전히 포화 상태였다는 걸.

그것만으로도 절망스러운데, 남들 눈을 피해 단둘이 은밀한 공간으로 찾아들어 간 것이 더욱 수상해 보인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나니 스스로가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요새 왜 이렇게 멍청하게 구는 건지. 어딘가에 넋을 놓고 온 것만 같았다. 아마도 그날 권성현의 집에 정신머리를 떨어뜨리고 온 게 틀림없어…….

아연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꾸며내고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카운터 안쪽에서 부산스럽게 움직이던 규영이 흘끗 돌아보더니 배시시 웃는다. 뜻 모를 웃음이었지만 아연 또한 태연하게 미소를 보냈다. 억지로 끌어당긴 입꼬리가 바르르 떨렸다.

* * *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

기다란 손가락 위에서 만년필이 호선을 그리며 회전했다. 끄트머리에 달린 다이아몬드가 조명을 받아 반짝거렸다.

3일.

카페에서 아연을 본 것을 마지막으로 3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여전히 아침의 카페에선 아연의 자취를 찾아볼 수 없었다. 성현은 날짜를 가늠하듯 책상 위의 캘린더를 지그시 응시했다.

이상하리만치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이었다. 그는 대체로 늘 권태롭고 지루한 일상을 살아왔는데, 어쩐지 근래 들어 그것이 견딜 수 없을 만큼 크게 느껴졌다.

어째서.

한아연이 나를 피하기 때문에?

성현은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미간을 작게 찌푸렸다. 아연이 저를 밀어낸다는 사실이 그를 적잖이 짜증 나게 만든다는 것을 부정할 생각은 없지만, 그게 제가 느끼는 시간의 흐름까지 좌지우지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냥 약간 신경에 거슬리는 정도지.

아마 문제는 시간이 지나도 개선의 여지가 전혀 보이지 않는 타락한 몸뚱어리에 있을 것이다. 개선은커녕 점점 더 제멋대로 날뛰고 시도 때도 없이 세우는 데다, 이제는 자진해서 타락의 길을 걸어 내려가는 중이었다.

3일 전, 그는 처음으로 한아연을 생각하면서 자위했다.

“씨발…….”

성현은 만년필을 내팽개치듯 내려놓고 잔뜩 구겨진 미간을 엄지로 꾹 짓눌렀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상스러운 욕설이 흘러나왔다.

잠들기 전 침대에 누워 아연을 떠올렸기 때문일까. 자연스럽게 기억은 제 하체를 힐끔거리던 그녀의 얼굴을, 부끄러운 듯 붉어진 뺨을 불러일으켰다.

‘네가 만져 주면, 금방 가라앉을 텐데.’

현실에서의 한아연은 알아서 처리하라며 매몰차게 쏘아붙이고 도망 나가 버렸지만, 그의 망상 속에서는 조금 달리 흘러갔다.

그 작고 가녀린 손가락이 귀엽게 꼼지락거리며 벨트를 풀어 내리고, 다급하게 바지 앞섶을 헤치고는 좆을 꺼내어 놓는 요사스러운 모습 따위를 상상하다니.

자신이 왜 이렇게까지 색욕에 돌아 버렸는지 스스로도 어이가 없고 진저리가 날 지경이었지만, 본능적으로 좆을 움켜잡고 흔드는 제 손을 도무지 멈추지 못했다.

한아연을 안았던 기억, 부드러운 살결을 마음대로 만지작거리고 품 안에 꽉 가두어 제 아래에 짓누르던 모든 감각은 시간이 지날수록 휘발되기는커녕 아예 인이 되어 깊숙이 박였다. 이제는 그 기억이나 곱씹으며 혼자 수음하는 변태가 되어 버린 것이다.

사람을 완전히 망가뜨려 놓고 정작 책임 소재가 분명한 당사자는 황당한 죄책감을 운운하며 저를 멀리하는 상황이 어처구니가 없을 뿐이었다.

평생을 순결하게 살아온 순진한 남자를 제멋대로 망쳐 버리고 타락시킨 게 미안하다면, 제가 품어 줘야 할 게 아닌가.

‘죄책감 들어. 네 얼굴 보는 게 불편해.’

한아연이 무엇을 우려하는지, 그 겁 많은 머리통으로 잔뜩 걱정하는 바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네가 나 한 번만 봐주면 안 돼? 당분간 서로 거리 좀 두다가, 다시 편해지면 보자. 응?’

너 하나만 잊은 척해 준다면 편해질 것 같다는 뜻을 담은 눈동자. 간절히 애원하는 눈길로 그를 올려다보던 한아연이 떠오르자, 순식간에 또 아랫도리가 뻐근해졌다.

“하, 정작 불편한 게 누군데.”

성현은 허탈하게 실소를 흘리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쪽이야말로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의 커다란 불편을 겪는 중이었다. 한아연을 상대로 혼자 좆물을 뺀다는 비참하고 참담한 수치심은 이루 말할 것도 없고.

이 겁쟁이를 어떻게 구슬려야 할까.

성현은 깊게 팬 미간을 신경질적으로 문질렀다.

“팀장님, 잠시 들어가도 될까요?”

그때 노크와 함께 문밖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성현이 짧게 대답하자 묵직한 문을 빼꼼히 열고 비서인 주희가 들어섰다. 긴장한 뺨을 발그레하게 붉힌 주희는 떨리는 입가를 길게 늘인 채 책상 가까이 다가갔다.

조금 전까지 머릿속을 음란한 생각으로 가득 채우고 제 소꿉친구를 어떻게 꾀어내면 좋을지 음흉한 계획을 세우던 사람으로는 전혀 보이지 않는, 수려하고 단정한 성현의 얼굴 위로 자연광이 만들어 낸 음영이 물결처럼 일렁였다.

성현은 우아한 자세로 앉아 놀라우리만치 잘생긴 얼굴을 주희를 향해 비스듬히 기울였다. 창문을 통해 들이친 금빛 햇살이 그의 부드러운 머릿결 위에서 찬란하게 부서졌다. 주희는 짐짓 눈이 부신 듯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태강그룹의 아름다운 황태자.

이보다 더 완벽하게 그를 수식하는 언어는 없었다.

그를 지척에서 모시게 된 행운을 쥐게 되었다는 사실이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그의 곁에 가까이 갈 때마다 혼이 빠져나가는 것처럼 정신이 흐려질 정도였다.

주희는 아득해지는 정신줄을 부여잡고 성심껏 허리를 숙여 묵례했다.

“여기, 내일 업무 보고 브리핑 자료와 오전에 요청하신 업무 조정 리스트입니다.”

주희가 품에 조심스럽게 끌어안은 자료를 흘끗 쳐다본 성현이 여상하게 물었다.

“김 실장님은요?”

“지원팀에서 업무 요청이 있어서 잠시 자리 비우셨어요. 팀장님께서 원하신 자료 기다리실 것 같아 먼저 내용 확인하십사 가져왔습니다.”

지난 3개월간 임원 OJT 기간을 거친 후, 그는 이제 막 전략기획팀 팀장으로 발령받았다. 그를 보필하는 비서실에는 로열패밀리의 밀착 수행과 업무 보좌를 겸하는 김 실장과 그런 비서실장의 업무를 서포트하는 비서인 이주희가 배치되었다.

“알겠습니다. 책상에 두고 나가세요.”

“네에. 혹시 더 필요하신 건 없으세요? 출출하시면 다과 좀 내올까요?”

성현은 무신경한 낯으로 고개를 돌렸다. 숨길 수 없는 귀찮은 기색이 역력했다. 주희는 순간 그의 냉랭한 분위기에 움찔했지만 애써 웃는 표정을 유지했다.

그가 눈을 스윽 들었다.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주희의 입술 끝이 파르르 떨렸다. 무언가 실수했다는 직감이 그녀의 온몸을 경직시켰다.

“괜찮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김 실장님과의 업무 구분은 확실히 하는 게 좋겠네요.”

주희는 두 손을 맞잡고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잠시 후 그의 말뜻을 이해한 주희의 뺨이 화르르 달아올랐다. 굳이 김 실장의 업무 영역을 침범해 가면서까지 쓸데없이 서류를 나르며 들락거릴 필요 없다는 의사 표시였다.

“아……. 네, 저기, 죄송합니다. 이런 게 월권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어요…….”

당황한 주희가 허둥거리며 변명했다. 더듬더듬 말을 이어 가는데 책상 위에서 드르륵, 핸드폰이 진동하는 게 보였다.

발신자를 확인한 성현은 통화 버튼을 누르며 주희를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그만 나가 보라는 의미. 두어 번 입술을 달싹이던 주희는 이내 입술을 꾸욱 깨물고는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응.”

문이 조용히 닫히는 것을 확인한 성현이 핸드폰을 귀에 가져가며 대답했다.

- 권성현, 전화 연결이 왜 이렇게 어렵냐? 내가 부재중 남긴 거 봤을 거 아냐. 근데 전화도 안 해 주고. 태강그룹 후계자랑 통화하기가 이렇게 비싸다, 비싸.

수화기 너머의 준성이 서운함을 토로하며 투덜거렸다.

“못 봤어.”

- 어련하시겠어. 우리 태강그룹 황태자님이 매일 뜨겁게 뉴스 달구는 것만 봐도 얼마나 바쁠지 눈에 선하니까, 내가 이해해 드려야지.

준성의 비꼬는 말에 성현은 피식 웃으며 의자에 몸을 느슨히 기댔다. 준성은 그간의 근황을 부지런히 전하고는 성현에게 물었다.

- 내일 나올 거지? 한아연은 좀 늦게 온다는데 너도 그때 같이 오나 해서.

등받이에 기댄 채 팔걸이의 가죽을 문질거리던 성현이 멈칫했다.

- 권성현? 듣고 있어?

“한아연이랑 통화했어?”

- 어. 카페 바쁘다며? 핑계 대면서 안 나오려고 하길래 내가 막무가내로 떼썼더니 늦게라도 오겠다고 하더라. 얘기 안 해 봤어?

“…….”

- 웬일이야? 한아연 스케줄 꿰고 다니는 놈이. 둘이 싸웠냐?

준성의 목소리가 빙글거렸다.

“싸우긴. 애도 아니고.”

성현은 다시 의자에 깊숙이 등을 기대며 피식 웃었다. 전화기 너머 준성의 수다가 이어졌지만 대부분 의미 없이 귓등을 스치고 지나갔다. 빙글 의자를 돌린 성현의 시선은 붉은 노을에 잠긴 마천루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몸의 혈류가 빠르게 도는 게 느껴졌다. 핸드폰을 쥔 손끝에 지그시 힘이 들어갔다. 이유 없이 숨이 거칠어지고 있었다. 익숙지 않은 감각에 성현은 신경질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분명하게는 김준성이 저를 거치지 않고 한아연과 통화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불쾌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왜? 한아연이 누구와 통화하든 그는 그것을 통제할 권한도, 그딴 걸 신경 쓸 이유도 전혀 없다.

그것을 머리로는 알지만, 머리 아래로는 논리 따위 좆도 신경 안 쓰고 제멋대로 굴고 싶은 황당한 독점욕이 날뛰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명치가 뻐근했다. 앞으로는 한아연한테 할 말 있으면 나한테 전화하라고 윽박지르고 싶은 어이없는 충동이 목구멍 바로 아래까지 파도치듯 넘실거렸다.

성현은 전화기 너머로 준성이 혼자 떠들도록 내버려 둔 채 눈을 내리뜨며 허탈한 실소를 터뜨렸다.

한아연이 저를 완전히 망가뜨려 버린 게 확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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