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6/96)

<16화>

아연은 금붕어처럼 입만 뻐끔거렸다. 그러다가 순간 그날의 한 장면이 뇌리를 스쳤다. 드르륵, 열린 서랍 안에 고이 놓여 있던 콘돔.

“콘돔!”

“응?”

“콘돔은?”

“콘돔이 뭐.”

“처음이라며. 침대 옆에 콘돔 있었잖아. 내가 바보인 줄 알아? 그런 말에 속아 넘어가게. 그런 거짓말을 왜 해? 처음인 사람이 집에 콘돔은 왜 있는데?”

아연은 그의 약점을 쥔 것처럼 쉼 없이 쏘아붙였다. 잠자코 듣고 있던 성현이 맥없이 피식 웃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너랑 섹스하게 될 줄 알았나 보지.”

아연의 턱이 아래로 뚝 떨어졌다. 저도 모르게 멍청한 표정이 지어지고 말았지만 수습할 여력이 없었다.

처음이라니. 권성현이 동정이었다니. 권성현의 처음을 제가 그렇게 충동적으로, 이기적으로, 물불 안 가리고, 한 번만 달라고 어린애처럼 떼를 써서 홀랑 잡아먹은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그게 처음이었다니…….

죄책감이 더욱 짙어졌다.

자신의 경우는 오롯이 제 선택이었지만, 그의 경우는 잠깐 정신을 판 사이에 애먼 상대에게 순결을 내준 꼴이 아닌가.

숙연해진 아연은 은근하게 몸을 붙여 오는 성현을 피해 자세를 비틀었다. 그러곤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나, 그날 이후로 매일 집채만 한 바위에 깔려 죽는 꿈을 꿔.”

갑자기 웬 뚱딴지같은 꿈 얘기를 꺼내나 싶어 성현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갑자기 꿈은 왜.”

“후유증에 시달린다고.”

“뭐?”

성현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후유증이라니. 섹스의 후유증이라면 저도 충분히 겪고 있었다.

제가 매일 밤 꿈속에서 상스러운 상상력을 발휘해 가며 한아연을 올라탄 채 이런 짓 저런 짓을 저지르는 것과 대충 일맥상통하는 꿈이기는 했다. 단지, 아연의 꿈속에선 그녀를 깔아뭉개는 게 사람이 아니라 무식하게 커다란 바위라고…….

그래서 좋다는 거야, 싫다는 거야.

“그러니까, 권성현 넌 나한테 너무 무겁고.”

“…….”

“전체적으로 너무 커.”

“키가, 아니면 좆이?”

그의 태연한 되물음에 아연이 인상을 왈칵 찌푸렸다. 뭐 이런 변태가 다 있어……. 권성현과 하는 대화에 이렇게 진이 빠지는 것도 처음이었다.

“전체적이라고 했잖아. 그날 얼마나 숨이 막혔는지 알아? 그리고 무엇보다…… 그러고 나서 자꾸 너희 아빠 얼굴이 머릿속에 맴돌아. 미칠 것 같아.”

처음으로 성현의 입이 충격으로 벌어졌다.

그는 제 귀를 의심했다. 한아연이 어떤 변명을 앞세우든 얼마든지 잘 받아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생각했지만, 머리통을 망치로 후려 맞은 것처럼 얼얼했다.

제 얼굴이 아닌 제 아버지 얼굴이 그녀의 머릿속에 맴돈다니, 뭐 이런…….

자연스럽게 아버지의 얼굴이 연상되자, 성현은 다급하게 머리를 가로저어 생각을 몰아냈다.

“나랑 섹스하면서 우리 아버지 얼굴을 떠올렸다고 말하는 거야, 너 지금?”

아연이 경악에 찬 얼굴로 성현을 보며 가깝게 붙어 있던 그의 몸을 저만치 떼어 냈다. 세상에 다시없을 심각한 변태를 다 보았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아니, 그런 말이 아니라……. 그걸 어떻게 그렇게 변태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내 말은, 어쩐지 우리가 엄청나게 나쁜 짓을 저지르고 있는 느낌이 든단 말이야.”

오래된 기억 속 언젠가 성현의 집에 놀러 갔다가 그의 아버지 서재에 숨어든 적이 있었다. 지금은 주변의 성화에 못 이겨 끊으셨다고 들었으나 당시 그의 아버지, 윤재는 소문난 애연가였다.

서재와 연결된 테라스에서 성현과 아연은 생애 처음으로 담배를 입에 물어 보았다. 호기심으로 반짝거리는 두 눈을 마주 보고 철없이 키득거리며 불붙인 담배 하나를 나누어 빨았다.

그가 시범을 보이듯 먼저 한 모금을 깊게 빨고 아연의 입술 위에 그것을 가져다 대었다. 따라 해 보란 듯이 턱짓하고는 그녀의 입술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날, 성현이 제 입에 물려 주었던 담배 필터의 감촉을 생생히 기억한다.

약간은 축축한 담배 끝이 닿는 순간, 입술이 찌릿찌릿했었다. 긴장으로 경직된 뺨을 움직여 숨을 들이쉬니 목구멍을 찌르는 매캐한 연기에 자동으로 잔기침이 터져 나왔다. 따끔거리는 목을 감싸 쥐고 연신 콜록대자, 성현이 키득거리며 아연의 등을 다정하게 두드려 주었다.

‘이놈들, 여기서 뭣들 하고 있어!’

그때 언제 들어왔는지 그의 아버지가 테라스의 유리문을 열며 호통쳤다. 아연은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도 잔기침을 멈추지 못해 두 손으로 입술을 틀어막았고, 성현은 화들짝 놀라 손가락 사이에 끼고 있던 담배를 떨어뜨렸다.

낙하한 담배가 그의 허벅지 위에 떨어져 바지에 탄 듯한 구멍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작은 화상 자국이 생겼다.

시간이 흘러 상처는 점점 희미해지다가 사라졌고, 그날 보았던 그의 아버지의 노기충천한 얼굴도 어느새 기억 속에서 지워졌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날 이후 최근 며칠간 아연의 머릿속에 계속 윤재의 얼굴이 떠올라 그녀를 괴롭게 만들었다. 마치 나쁜 짓을 하다가 부모에게 들킨 아이처럼 뻣뻣하게 굳어서는 지레 겁을 집어먹고 마는 것이다.

“별걸 다 걱정하네.”

그제야 성현은 안심한 얼굴로 피식 웃었다. 조금 전 아연이 머릿속에 아버지 얼굴이 맴돈다는 황당한 소리를 지껄였을 때는 가슴이 철렁했었다. 설마 늙은이를 좋아하는 지저분한 취향인가 싶어 난감했지만, 완전히 오해였다.

게다가 ‘우리가 나쁜 짓을 저지르고 있는 것’ 같다니. 표현을 해도 뭐 저렇게 꼴리게 해.

“며칠 동안 살금살금 피해 다니면서 생각해 낸 변명이 겨우 그거야?”

“변명이 아니라, 난 심각해. 죄책감 들어. 네 얼굴 보는 게 불편해.”

아연은 모아 붙인 무릎을 만지작거리며 침울하게 중얼거렸다.

“헛생각 그만하고.”

그의 손가락이 아연의 턱 끝을 들어 올렸다. 무릎을 내려다보고 있던 시선이 따라 올라갔다.

“더 그럴듯한 변명으로 쥐어짜 봐.”

턱을 감싼 상태에서 엄지가 입술을 쓸었다. 손가락 아래에 지그시 뭉개지는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아연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아찔한 긴장감에 마른침을 꿀꺽 삼키는데, 턱을 붙잡은 손의 힘이 스르르 풀어졌다. 성현은 맥없이 저를 올려다보는 아연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고는 카우치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연은 아무렇지 않게 돌아서는 성현을 따라 일어서며 말했다.

“네가 그랬잖아. 내가 실수한 거라고.”

정신없이 몰아붙여지며 그가 귓가에 속삭이던 수많은 말들 중 그 말만큼은 너무나도 생생하게 뇌리에 박혀 있었다.

‘한아연, 너 실수했어.’

‘날 건드리지 말았어야지.’

으르렁거리듯 뇌까리는 목소리에 가슴이 선득해졌었다.

“네가 나 한 번만 봐주면 안 돼?”

“…….”

“당분간 서로 거리 좀 두다가, 다시 편해지면 보자. 응?”

성현은 못마땅한 얼굴로 아연을 쳐다보았다.

젠장. 한아연은 자기의 저런 표정이 사람을 얼마나 꼴리게 하는지 좀 알아야 돼.

마음 같아서는 앞뒤 안 가리고 달려들어 다짜고짜 입술부터 가져다 붙이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성현은 간신히 욕정을 억눌렀다. 비록 신체 상태는 발정 난 개새끼나 다름없었으나, 진짜 개새끼가 되기에 좋은 장소는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이 카페의 엄연한 사장인 아연의 사회적 체면을 고려한 그는 오늘은 최대한 신사답게 굴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당분간 서로 거리를 두자느니 하는 황당한 헛소리를 들어줄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간절하게 그를 올려다보는 아연의 말간 얼굴이 좀 불쌍했다.

“생각해 보지, 뭐.”

이 정도에서 선선히 물러나 주려는데, 등 뒤에서 그의 옷자락을 붙잡는 다급한 손길이 느껴졌다.

“권성현. 잠깐만.”

“또 왜.”

성현은 신경질적으로 돌아보았다. 아연이 어쩐지 붉어진 얼굴로 머뭇거리며 물었다.

“나가려고?”

“어.”

그럼 나가야지. 키스도 마음대로 못 하게 하면서, 이 쪽방에서 뭘 하라고 붙잡아, 붙잡길.

좁은 방 안에 딱 붙어 앉아 있는데 만지고 싶은 만큼 만지지 못하고 샅샅이 빨아 대지 못하는 게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색욕에 눈뜬 제 몸뚱어리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그러고 나간다고?”

아연이 눈으로 성현의 하체를 빠르게 훑었다. 벨트 버클 아래, 발기한 성기의 윤곽이 미처 감춰질 수 없을 만큼 확연히 부풀어 있었다.

저러고 나가겠다니. 제정신인가?

아연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성현의 팔을 이끌어 다시 카우치에 앉혔다.

“나 먼저 나갈 테니까 나중에 나와. 좀 이따가. 어, 그러니까…… 흥분을 가라앉히고.”

어린아이 달래듯 조곤조곤 구슬리더니, 어디선가 티슈를 가져와 건네주기까지 한다.

“자, 혹시 필요할 수도 있으니까.”

장소 분간 못 하고 세워 버린 모습을 보이고도 부끄럽지도 않은지 뻔뻔하리만치 무덤덤하던 그의 얼굴에 작은 균열이 생겼다.

하. 성현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입술이 삐뚜름하게 미소 지었다.

“이건 왜 주는데. 나더러 여기서 자위로 해결하라고?”

아무래도 둘 중에 변태를 따지자면, 한아연이 저보다 한 수 위인 것 같았다.

아연은 크게 당황한 얼굴로 허둥거리며 손사래를 쳤다.

“아니, 설마 네가 무슨 들짐승도 아니고, 바깥에 사람들 다 있는데 그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냥 혹시나 해서 준 거야. 필요한데 없으면 불편할 테니까. 오해하지 마.”

“네가 만져 주면, 금방 가라앉을 텐데.”

성현이 상체를 뒤로 느슨하게 기대며 장난기 다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보란 듯이 다리를 넓게 벌리는 모습이 유혹하듯 색정적이었다. 들짐승보다 더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는 모습에 등줄기가 쭈뼛 서며 식은땀이 스멀스멀 배어 나왔다.

지금까지 제가 주절주절 늘어놓은 이야기는 대체 뭐로 들은 건지 모를 만큼, 그는 좌우를 가리고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마 같았다.

가만히 서 있다가는, 발에 차여 죽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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