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민재 씨.”
“네?”
“잠깐 이리 와 봐요. 앞치마 뒤에 끈이 엉켜서.”
“정말요?”
민재가 당황하며 고개를 돌려 제 등 뒤쪽을 흘끗거렸다. 아연이 피식 웃으며 그의 등 뒤로 다가섰다. 종종 그가 이렇게 크게 허둥거릴 때면, 숨길 수 없는 대학생 티가 나는 것 같았다.
대학교 휴학생인 민재는 취미 삼아 배워 본 커피 로스팅의 매력에 흠뻑 빠져 카페 창업의 꿈을 가졌다고 들었다. 그의 부모님은 그가 전공인 공학을 살려 그럴듯한 회사에 취직하기를 바라는 모양이지만, 그는 패기 넘치게 학교를 휴학해 버렸다. 그러고는 돈도 모으고 일도 배울 겸 아연의 카페에서 풀타임 근무를 시작한 것이다.
더불어 케이크 공방에서 디저트 만드는 법도 배우며 여러모로 열심인데, 종종 민재가 카페에 가져와서 먹어 보라고 건네주었던 디저트들의 맛도 꽤 훌륭했다.
그가 제안한 것처럼 몇 가지 케이크를 시험 삼아 납품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란 생각을 하며 아연은 민재의 허리에 엉켜 있는 끈을 풀어 주었다. 뻣뻣하게 굳은 민재가 얼떨떨한 얼굴로 아연을 힐끔 돌아보더니 쭈뼛거리며 말했다.
“어…… 가, 감사합니다, 사장님. 끈이 엉킨지도 모르고 있었네요. 칠칠치 못하게, 죄송합니다.”
“이런 걸로 무슨 죄송까지.”
풀어낸 끈을 리본 모양으로 보기 좋게 묶으며 아연이 피식 웃었다.
카페 일에 진심인 민재는 대체로 진지하게 근무에 임했지만, 가끔은 이렇게 어리숙한 어린애처럼 굴기도 했다.
이러니 멀쩡히 다니던 학교를 냅다 휴학하고 창업을 하겠다고 나선 아들을 바라보는 부모의 못 미더운 심정도 이해는 갔다. 실제로도 집안의 막둥이라는 민재는 은근히 허술해서 자잘하게 손이 가는 구석이 있었다.
“민재 씨가 앞치마 이상하게 입고 있는 걸 본 게 벌써 두 번째인 것 같은데. 민재 씨 거는 특별히 앞으로 묶거나, 찍찍이로 되어 있는 앞치마를 사야 할까 봐요.”
아연이 놀리듯이 말하자 민재의 귓등이 화르르 달아올랐다.
“아뇨! 앞으론 조심할게요. 제가 덤벙거리는 걸 좀 고쳐야 하는데.”
“손이 커서 생두 자루 번쩍번쩍 들어서 옮기는 데는 편리한데, 끈 묶는 데는 영 불편한가 봐요. 자, 다 됐어요.”
아연이 민재의 허리에 깔끔하게 묶인 리본에서 손을 떼어 냈다.
“아, 감사…… 어? 안녕하세요. 뭐 필요한 거 있으세요?”
그런데 그때, 아연에게 감사 인사를 건네던 민재가 갑자기 목소리 톤을 달리하며 앞쪽을 향해 말했다. 손님이 뭘 찾나 싶어 민재의 등 뒤쪽에서 빼꼼히 고개를 내민 아연의 눈이 삽시간에 커다래졌다.
이 시간엔 한 번도 방문한 바 없는 남자가 삐딱한 자세로 서 있었다.
“권성현?”
아니, 아무리 회장 손자라지만 그래도 명색이 회사원인데 이렇게 근무 시간에 근무지를 이탈해도 되는 건가?
아연은 난감한 표정으로 속입술을 깨물었다. 출퇴근 시간만 피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낭패였다.
“아, 사장님 뵈러 오신 거군요. 저, 그럼 이야기 나누세요.”
뻘쭘하게 서 있던 민재가 어색하게 허리를 굽히고 카운터 쪽으로 멀어졌다. 성현이 온몸으로 내뿜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 때문인지, 민재는 뒤통수가 따갑다는 듯 재차 뒤를 돌아보았다.
성현은 치밀어 오른 짜증을 간신히 씹어 삼키며 아연을 가만히 응시했다. 아연은 졸지에 불청객을 맞이한 곤란한 심상을 고스란히 드러낸 퍽 난처한 얼굴이었다. 직원 놈의 등 뒤에 딱 달라붙어서 속살거릴 때랑은 완전히 다른 얼굴.
불쾌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뭐? 손이 커? 어처구니가 없었다.
딱 봐도 그의 손에 비하면 단풍잎 수준밖에 안 되는 볼품없는 손이었다. 한아연이 옷매무새를 정리해 주는 것에 몸을 배배 꼬아 가면서 황송해하던 직원 놈의 꼬락서니가 같잖기 짝이 없었다. 쑥스럽다는 듯이 비비적거리던 놈의 손가락 또한 몹시 거슬렸다.
아연이 제 직원에게 저렇게까지 친근하게 구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니, 애초에 카페에 저런 얼빠진 얼굴의 직원이 있었던가?
성현은 몸을 기울여 카운터 쪽으로 멀어진 민재를 바라보았다. 그쪽에서도 못내 신경 쓰인다는 듯 이쪽을 흘끔거리는 모습에 심기가 더욱 비틀렸다. 그는 찬찬히 고개를 돌려 아연을 내려다보았다.
설마 나 보라고 일부러 저 직원 놈이랑 친한 척 노닥거린 건가?
그런 어이없는 생각이 든 것도 잠시, 곧 헛된 망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아연은 그가 이 시간에 카페에 찾아올 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듯 난감한 기색이었다. 기분이 더 바닥으로 처박혔다.
그렇다면, 평소에도 저런 식으로 필요 이상 딱 달라붙어서 허리끈을 묶어 준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두 눈이 멍청하게 풀어져서는 허둥거리던 직원 놈의 반응을 봐서는 제깟 놈이 감히 아연을 상대로 주제넘은 흑심을 품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연의 허리에 단정하게 묶여 있는 앞치마를 보는 것만으로도 신경질이 났다.
내가 설마 질투를 하는 건가? 내가? 왜?
그럴 리가.
성현은 곧장 부정했다. 그러고는 짐짓 여유로운 표정을 만들어 내며 입을 열었다.
“저 새낀 뭐야.”
의도와는 다르게 졸렬한 투기가 잔뜩 묻은 한심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뇌를 거치지 않은 질문이었다.
“저 새끼? 설마 우리 직원 말하는 거야?”
아연이 미간을 좁히며 그에게 되물었다.
성현은 몹시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제가 그동안 그를 피해 다닌 게 물론 달가울 리는 없겠지만, 저 정도로 열이 받을 일인가 싶었다. 괜히 죄 없는 직원에게까지 시비를 걸 것까지는 없지 않은가.
“직원? 아무나 막 뽑았나 보네. 앞치마도 혼자 제대로 못 입는 멍청한 놈한테 무슨 일을 시킨다고.”
그의 말투가 한껏 삐딱선을 타고 있었다. 아연은 소리 없는 한숨을 폭 내쉬고는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좀 어리바리하긴 해도, 잘생겼잖아.”
“뭐?”
성현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했다. 곧은 눈썹이 치켜 올라가고 눈매가 날카로운 모양새로 길어진다.
도무지 믿기 어려운 말을 들은 것처럼 다갈색 눈동자 안에 불신과 혼란이 뒤섞였다. 어쩐지 배신감마저 느낀 듯 상당히 억울한 표정이었다.
“저게?”
성현은 혼잣말하듯 허탈하게 중얼거리며 카운터 너머에서 이쪽을 연신 흘끗거리는 민재를 쳐다보았다. 눈, 코, 입이 인간으로서 있어야 할 자리에 겨우 자리 잡은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감흥도 일으키지 않는 흐리멍덩한 인상.
한아연 눈에는 고작 저딴 얼굴이 잘생겼단 말인가.
충격도 이런 충격이 없었다. 저런 대충 생긴 면상은 당장이라도 문밖을 나서면 발에 차일 정도로 길바닥에 널리고 널렸다.
성현은 갑자기 몹시 불안해졌다. 한아연이 물가에 내놓은 애라도 된 것처럼 느껴졌다. 저렇게 보는 눈이 형편없이 낮아서야, 어디 마음 놓고 돌아다니게 놔둘 수가…….
“네가 매일 거울 속에서 보는 그 얼굴에 비하면야 초라해 보이겠지만, 실제로는 민재 씨 정도만 돼도 꽤 인기 있어.”
성현이 우뚝 움직임을 멈추었다. 이윽고 그의 입술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미소를 겨우 눌러 참는 것처럼 씰룩거렸다.
“우리 카페에 민재 씨 보려고 오는 손님도 은근히 많아. 물론 커피 내리는 솜씨가 좋아서 그런 것도 있지만.”
아연이 무덤덤한 목소리로 계속 무어라 떠들어 댔지만, 성현에게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그러니까, 결국 제 얼굴에 비하면 남루하고 볼품없는 낯짝이란 이야기였다.
그냥 네가 더 잘생겼다고 하면 될 일을 뭐 저렇게 구구절절 떠드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여유를 되찾은 성현은 몹시 너그러운 마음가짐으로 아연을 응시했다.
어쩐지 한아연이 저를 가지고 노는 듯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으나, 그마저도 기분이 나쁘지가 않았다.
“아무튼, 내가 직원을 아무렇게나 막 뽑는 사람은 아니란 뜻이야.”
“그래. 그건 됐고. 이제 우리 이야기 좀 해 볼까.”
아연은 불시에 공격을 당한 사람처럼 얼굴이 허예졌다. 불안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더니 이내 결심한 듯 성현을 다급하게 잡아끌었다. 그는 피식 웃으며 그녀가 끌어당기는 대로 느긋하게 뒤를 따랐다.
아연이 그를 데리고 들어간 곳은 카페 뒤편에 휴식처 겸 직원 탈의실로 활용하는 자그마한 공간이었다. 벽면 한쪽에 캐비닛과 얇고 긴 형태의 전신 거울이 달려 있고, 반대편에는 사람 한 명이 길게 누울 수 있는 카우치가 놓여 있었다.
먼저 안으로 들어온 아연이 뒤를 홱 돌아보았다. 성현이 기척도 없이 어느새 바로 등 뒤까지 따라와 있었다. 그 탓에 하마터면 그의 커다란 몸에 부딪칠 뻔했다. 아연은 흠칫 놀라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안쪽에 이런 곳이 있었구나. 몰랐네.”
흐음. 짐짓 신기한 것을 보았다는 듯 말하고 있었지만, 정작 성현의 눈길은 아연에게만 집요하리만치 고정되어 있었다. 그는 아연이 물러나는 만큼 훌쩍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향수 냄새가 코끝을 맴돌았다. 흐음,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쉬던 아연은 호흡을 멈추고 정신을 똑바로 차리려고 애썼다.
어째서 이 순간 그의 냄새로 가득했던 침실이 떠오르는 건지.
대체 언제부터 방 안에 권성현과 단둘이 있다는 사실이 이리도 큰 긴장감을 형성하게 된 건지.
빈주먹을 꽉 쥐는 아연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피해 으슥한 곳으로 찾아 들어온 것이었는데, 애석하게도 제 선택이 몹시 잘못된 것이었음을 깊이 실감하고 있었다.
안 되겠다 싶어진 아연은 두 팔을 뻗어 성현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거기 서서 이야기해. 그만 가까이 오고.”
“그러지 뭐.”
대답은 잘만 한다. 하지만 그가 말만 온순하게 할 뿐 뒤통수를 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연은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