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2/96)

<12화>

‘아연아, 아버지가 네게는 참 미안한 게 많다. 그만큼 너에게는 내가 해 줄 수 있는 만큼 최대한 해 주고 싶어. 그러니까 뭐든 갖고 싶은 게 있으면 망설이지 말고 말하렴.’

적어도 강준은 제 딸에게 물질적인 지원만큼은 아끼지 않았고, 희수는 그 경제적 지지의 규모를 딸을 향한 마음의 크기로 해석했다.

지금 아연이 살고 있는 청담동 빌라도 마찬가지였다.

강준이 마련해 준 게 아니었다면, 희수가 그녀의 독립을 그냥 두고 볼 리 없었다. 자고로 결혼하기 전의 여자는 가정의 신실한 보호와 감시 아래 신부 수업을 단단히 받은 후, 잘 간수된 물건처럼 결혼과 함께 고스란히 남편의 품으로 건네져야 한다고 믿는 희수였으니.

아연을 향한 경제적 지원이 딸을 향한 애정인지, 아니면 아버지로서의 공백과 그로 인한 죄책감을 메우기 위한 자기방어적 기제인지는 알 수 없었다. 뭐가 됐든 관심도 없고.

다만 덕분에 하고 싶었던 일도, 숨 막히는 본가로부터의 독립도 이룰 수 있었으니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러니까 이 정도면 은수저가 맞다. 검게 변색되어 닦아도 닦아지지 않는 은수저.

“다 마셨으면 우리 이제 슬슬 다시 일해 볼까요?”

아연은 빈 커피 잔을 들어 보이며 밝게 말했다.

“네! 사장님은 컨디션도 안 좋으신데 그냥 앉아 계세요. 제가 얼른 설거지부터 하고, 테이블 점검 싹 하고 올게요.”

규영이 씩씩하게 대꾸하면서 의자에서 일어나려는 아연의 어깨를 꾸욱 눌러 다시 앉혔다. 종종거리며 싱크대로 향하는 규영의 뒷모습을 응시하는 아연의 얼굴에 따스한 미소가 번졌다.

* * *

“하읏!”

아연은 턱을 치켜올리며 가느다란 신음을 흘렸다. 뻣뻣해진 허벅지가 바들바들 떨려 왔다. 바짝 휜 등줄기로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그, 그만…….”

“조금만 더.”

“아, 안 돼……. 너무 아파…….”

아연의 애원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손길이 허벅지 아래를 가볍게 받쳐 올린다. 아연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뒤통수에 무거운 한숨이 푹 내려앉았다.

“자, 너무 힘들면 천천히 제자리로 돌아오세요.”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아연은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위에 매달릴 수 있게 봉이 달려 있는 필라테스 기구인 트래피즈 테이블 위였다. 그녀의 자세가 갑작스럽게 흐트러지자 놀란 강사가 얼른 아연의 몸을 부축했다.

“오늘 너무 이상한데요? 평소에 잘하던 동작도 갑자기 하나도 안되고. 어디 몸 안 좋으세요?”

“죄송해요.”

아연은 헐떡거리며 간신히 대답했다. 강사가 가쁘게 오르내리는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거렸다.

“죄송하긴요. 저야 우리 회원님 걱정돼서 그러죠. 아까 걸으실 때 보니까 허리도 조금 안 좋은 것 같던데.”

“아아, 네. 조금 삐끗했어요.”

“며칠 안 나온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강사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농담조로 말했다. 듣는 아연은 괜스레 움찔 놀라고 말았지만.

권성현과 일을 치르고 난 직후엔 운동은 생각조차 못 했다. 여기저기 쑤시고 뻑적지근한 몸 상태는 물론이거니와, 목과 가슴 근처에 자잘하게 남은 자국 때문이었다.

가슴선이 과감하게 파인 필라테스복을 입으면 겉으로 드러나는 부위에 떡하니 남아 있는, 누군가가 열렬히 물고 빨았던 흔적.

다행히 며칠 지나니 자국은 금세 희미해졌다. 이따금 찡하게 골반을 울리는 둔통은 있었지만, 운동을 하면 오히려 찌뿌둥한 몸이 쫙 풀리면서 통증도 좋아질 줄 알았다.

그것이 저의 완전한 착각이었음을 절실히 체감하며 아연은 찔끔 흘러나온 눈물로 젖은 눈가를 닦아 냈다.

아직 몸 상태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는지 운동은 무리였다. 평소에 곧잘 해내던 자세도 온통 엉망이었고, 강사로부터 ‘조금만 더’ 소리를 들었을 때는 정말이지 비명을 지를 뻔했다.

“딱히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닌데, 요즘 일이 좀 바빠서요. 몸이 많이 상했나 봐요.”

“아무래도 이 상태로 더 이상의 수업은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은데, 여기까지 할까요? 오늘 수업은 진행하지 않았던 걸로 하고, 다음에 몸 상태 좋아지면 다시 스케줄 잡도록 하죠.”

“네? 아뇨. 제가 따라가지 못해서 그런 건데 오늘 건 진행한 걸로 해요.”

“아이, 우리 회원님 또 딱딱하게 구신다. 오늘 제대로 하신 거 하나도 없는데, 오히려 저 자존심 상해요. 이래 봬도 저 자부심으로 레슨하는 사람인 거 알죠? 다음에 다시 하는 걸로 해요.”

강사는 2년 넘게 개인 레슨 중인 소중한 단골손님의 어깨를 살갑게 두드리며 눈을 찡긋했다.

“네에. 감사하고 죄송해요.”

아연은 이마에 촉촉이 배어난 땀을 수건으로 닦아 내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몸도 마음도 누군가가 마구잡이로 휘저어 놓은 것처럼 엉망이다.

그날 이후로 아연은 줄곧 성현을 피해 다니는 중이었다.

마침 오후 시간에만 카페에 출근하던 민재가 풀타임으로 근무하게 된 덕분에, 아연은 성현의 출근 시간을 훌쩍 넘기고 나서 가게에 나갔다. 퇴근 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카페 바깥에 퇴근하는 회사원들의 모습이 하나둘 눈에 띄기 무섭게 미리 카페에서 도망치듯 사라지고 있었다.

대책 없이 피하기만 하는 게 유치하고 한심한 반응이란 건 알지만, 어떤 얼굴로 성현을 다시 보아야 할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하아.”

아연은 또 한 번 땅이 꺼져라 한숨지었다. 괜히 수건을 퍽퍽 때리며 탈의실로 향하는데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권성현인가 싶었다. 그러나 흠칫 놀라 핸드폰 화면에 뜬 발신자를 확인한 아연의 어깨가 어쩐지 조금 처졌다.

“아니네……. 얘는 또 웬일이지?”

전화를 건 사람은 성현과 마찬가지로 그녀와 동창 사이인 준성이었다.

‘뭐야, 나 왜 실망해?’

얼른 허튼 생각을 털어 낸 아연은 수건을 목에 걸고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댔다.

“여보세요?”

- 한아연, 잘 지냈어?

“응. 나야 뭐 똑같지. 넌?”

잠시 안부 인사를 주고받은 후, 준성은 전화 건 목적을 늘어놓았다. 어느 정도 예상했듯이 곧 동창 모임이 있으니 나오라는 말이었다.

다섯 명으로 이루어진 모임의 구성원은 모두 같은 고등학교와 대학을 나왔다. 사실 아연이 이 모임의 일원이 된 것은 성현 때문이었다. 그를 제외한 나머지 셋과는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별다른 교류가 없었다.

초중고를 에스컬레이터식으로 진학하는 사립 학교의 구조 때문에 학창 시절 내내 아연의 출생 배경에 대한 수군거림이 그녀를 지겹도록 따라붙었다.

아내를 두고 여배우와 바람난 국회의원의 도덕적인 흠결. 그리고 그 천박한 외도의 결과물.

어쩌면 사춘기 소녀의 자격지심이었을까. 아연은 스스로 벽을 세우고 주변에 곁을 내주지 않았고, 그녀의 마음속 담장 안을 드나드는 사람은 소꿉친구인 성현이 유일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성현을 매개로 하여 아연은 덤처럼 그의 친구들 틈에 섞이게 되었다. 그들은 아연을 둘러싼 소문에 대해서는 어떠한 호오도 드러내지 않았고, 별다른 내색도 없었다. 그 무덤덤한 태도와 약간의 무관심이 오히려 아연을 그들 사이에 서서히 스며들 수 있게 했다.

다 같이 모이는 것은 1년에 한두 번이 고작이지만, 마지막으로 만났던 게 벌써 작년 일이니 꽤 오랜만의 연락이었다. 게다가 그들 중의 한 명이 결혼을 앞두고 제 예비 신부를 소개하는 자리라고 하니 웬만해서는 참석했겠지만…….

문제는 지금 웬만하지가 않은 상황이란 거지. 보나 마나 권성현도 올 거 아냐.

“글쎄. 그날 바빠서, 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아연은 넌지시 불참의 의사를 비치며 피식 웃었다. 충동적으로 저지른 일탈의 여파는 생각보다 곳곳에서 고개를 들이밀고 있었다.

- 야, 한아연. 모임 언제인지 아직 말도 안 했는데 그날 바쁜지 어떻게 안다고 이래? 너무 티 나게 빼는 거 아냐?

“아니, 그게 아니고, 카페가 요새 계속 바쁘거든.”

- 도진한 결혼하기 전에 마지막 모임인데 핑계 대는 거야? 생각해 보니까 우리 얼굴 본 것도 벌써 1년 넘었다. 진한이 결혼식 치르고 곧바로 미국 나갈 거라던데, 이번에 못 보면 또 얼굴 보기 힘들걸? 결혼식 때는 사람 많아서 정신없을 거라 대화도 어려울 거고.

“그렇긴 한데……. 봐서 같이 일하는 직원들이 괜찮다고 하면 참석할게.”

- 아, 됐고! 너 그날 안 나오면 우리가 네 카페로 쳐들어갈 테니까 그렇게 알아.

모임 중 그녀를 제외한 나머지 네 명이 제 카페로 쳐들어오는 모습을 상상하니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중에서도 특히 권성현과 도진한, 그 두 사람이 함께 나타나면 어딜 가든 엄청난 눈길을 끌며 떠들썩한 반향을 일으키기 마련이었으니.

보기 드문 커다란 체격에 얼굴까지 근사하게 잘생긴 두 남자가 나란히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홀리는 분위기를 형성하곤 했다. 친구들끼리는 이미 면역이 생겨 익숙해졌다지만, 주변에서 넋을 놓고 바라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예기치 않게 귀찮은 일이 생기는 경우도 허다했다.

태강의 권성현과 DH의 도진한. 대외적으로는 경쟁 구도가 뚜렷해 사이가 좋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 재벌가의 두 자제가 실제로는 퍽 가까운 친우지간이라는 사실은 충분히 흥미로운 기삿거리였다. 그 증거가 되는 사진 한 장을 건지기 위해 어슬렁거리는 기자들까지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동창 모임은 주로 프라이빗한 공간에서 이뤄지는 게 암묵적인 약속인데, 사방이 통유리로 된 제 카페에 두 사람이 나타난다면 어떤 사달이 벌어질지 사뭇 두렵기까지 했다.

이미 권성현 효과로 카페는 인력난에 허덕이는 상태였다. 직원을 추가로 뽑자니 손님들이 몰리는 것은 출근 시간에 반짝 집중되어 있고, 아침 시간에만 일할 사람을 뽑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 상황에서 기자들의 벌게진 눈에 드는 것만큼은 사양하고 싶었다.

“알았어. 늦게라도 갈게. 시간이랑 장소는 문자로 알려 줘.”

아연은 결국 체념 섞인 백기를 들었다.

- 그래. 그럼 그날 보자.

수화기 너머로 해맑은 준성의 음성이 울렸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