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1/96)

<11화>

규영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묻자 아연은 간신히 웃음 지으며 손사래를 쳤다.

“괜찮아요. 그냥…… 생리통이 조금.”

“에구, 약은 드셨어요?”

“약 먹을 정도는 아니고요.”

“이따 민재 씨 나올 테니까, 사장님은 들어가서 쉬세요. 점심시간 전까지는 저 혼자서도 충분할 것 같은데.”

본의 아니게 거짓말을 해서 그런지 규영의 염려 어린 배려가 몹시 부담스럽고 미안했다. 사실은 어젯밤 그렇고 그런 짓을 저질러 버린 바람에 후유증에 시달리는 중이라는 말을 털어놓을 순 없는 노릇이니, 아연은 그저 난감한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그나저나 사장님 친구분은 오늘도 정말 근사하시더라고요.”

갑자기 성현이 화제에 오르자, 아연은 더욱 난감하고 민망해져 손안의 커피 잔을 만지작거렸다.

“아, 아까는 어떤 손님 나가시는데 사장님 친구분께서 문을 잡아 주시더라고요. 물론 기본적인 매너라지만, 요즘 기본적인 매너도 없는 사람들 많잖아요. 하물며 그 얼굴, 그 몸에 그런 매너라니. 사장님은 음료 만드시느라 못 보셨죠?”

“으응, 못 봤네.”

“제가 그 손님이었으면 순간적으로 다리가 풀려서 걷지도 못했을 거예요. 그때 매장 안에 있던 사람들 다 숨죽이고 그것만 쳐다보고, 분위기 묘했다니까요?”

규영이 재미있다는 듯 키득거리곤 레모네이드를 쪼옥 빨아 삼켰다. 아연도 마주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태생적으로 풍기는 위압적인 분위기와 나른하면서도 오만해 보이는 표정 때문인지 주변에선 그를 오해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사실 성현은 자연스러운 매너가 몸에 배어 있는 편이다. 그 매너 덕분에 함께 있을 때면 아연이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사람을 편하게 만들었다.

귀찮다는 듯 툴툴거리면서도 결국은 하라면 하라는 대로, 달라면 달라는 대로 그가 다 내주고야 만다는 것을 사실 아연은 알고 있었다.

그러니 친구 다루는 버릇이 잘못 들어서는, 어제 그런 당치도 않는 미친 짓을 벌였지.

아연은 지끈거리기 시작한 이마를 가볍게 감싸 쥐었다.

“사장님, 컨디션 더 나빠지시기 전에 여기 약 드세요. 아! 맞다. 근데 저 얼마 전에 손님들이 대화하시는 거 들었는데, 사장님 친구분 재벌이라면서요?”

규영은 친절하게 아연에게 진통제를 건네주면서도 종알종알 말을 멈추지 않았다. 약보다는, 제 앞에서 권성현 이야기 좀 그만해 주었으면 좋으련만.

“사장님이 회사 다니신다고 말씀하셔서 그냥 필요 이상으로 잘생긴 회사원인 줄로만 알았더니, 무려 태강그룹 후계자라니! 제가 뉴스를 잘 안 봐서 몰랐는데, 그 얘기 듣고 나서 포털에 검색해 봤다가 얼마나 충격받았는지 몰라요. 말씀 좀 해 주시지.”

“아아, 친구가 싫어할 수도 있어서. 내가 나서서 소문내기는 좀 그렇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어차피 포털에 검색하니까 프로필까지 나오던걸요? 그분 보러 카페 오시는 손님들은 다 아는데 저만 몰랐지 뭐예요.”

규영은 재빨리 핸드폰을 꺼내어 인터넷 창을 켜더니 성현이 언급된 기사 사진을 내밀었다.

그는 지난 20년간 재계 3위 밖으로 밀려난 역사가 없는 거대 기업 태강의 창업주이자 회장인 권민환의 장손이었다. 그의 아버지인 권윤재가 부회장직에 있고, 남동생인 유현이 미국 유학 중이니, 현재로서는 그가 태강의 가장 강력한 후계자 후보로 점쳐지고 있었다.

아연 역시 태강의 후계자 구도를 예측하는 경제면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성현의 위로는 누나가 두 명 있는데, 두 사람은 모두 각자의 병원 운영에만 매진하며 회사 경영에는 관심이 없었다. 대신 그들의 남편이 모두 태강그룹의 요직을 맡고 있어 매형과 처남 간의 경쟁 구도를 그리는 기사였다. 거기다 미국에서 경영 수업을 받고 있는 유현이 향후 한국에 돌아오면 후계자 후보가 하나 더 늘어나는 셈이었다.

대한민국 경제의 흐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기업인 만큼 태강의 후계자 구도에 관한 관심은 끊이지 않고 주기적으로 뉴스의 경제면을 달궜다. 그중에서도 이제 막 재계에 데뷔한 성현에 대한 관심은 가히 열광적이었다.

출생과 동시에 손에 쥘 수 있는 모든 것을 움켜쥐고 태어난 태강의 황태자. 강력한 배경과 그에 버금가는 훌륭한 외모. 기자들에게는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이 아닐 수 없었다.

이미 대한민국의 국민 대다수가 그 얼굴에 익숙한 권민환 회장과 권윤재 부회장과는 달리, 그동안 상대적으로 매스컴에 노출이 되지 않았던 성현은 재계 진출과 동시에 뜨거운 감자로 급부상했다.

그렇게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면서 핏줄 중심의 후계 구도에 부정적인 기사가 터지는 일도 빈번해졌다.

「경영 능력도 검증되지 않은 황태자, 재계 데뷔와 동시에 임원직을 꿰차다!」

「세습 경영의 운을 틔운 태강, 과연 그룹의 명운은 어떻게 흘러갈 것인가.」

언젠가 성현에게 괜찮냐고 넌지시 물었던 적이 있다. 그러자 그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얼굴로 피식 웃을 뿐이었다.

‘능력 좋은 사람이 맡는 게 당연한걸, 뭐. 틀린 소리도 아니지.’

그런 그의 초연하고 심드렁한 태도에선 날 때부터 모든 걸 당연하게 누려 온 태생적인 여유가 배어 나왔다. 전혀 아쉬울 것 없는 환경이 주는 권태로움과 나른한 분위기.

저를 두고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세간의 이야기에는 하등의 관심조차 두지 않고, 오히려 그는 최근 들어 언론에 얼굴이 공개되기 시작하면서부터 겪는 불편을 몹시 성가셔했다. 아연이 카페 직원인 규영에게조차 그에 관한 이야기를 삼간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근데 그런 대단한 사람이랑 친구 사이라니. 사장님도 알고 보면 재벌가 셋째 딸, 뭐 그런 거 아니죠? 그런 거면 저한테는 꼭 미리 말씀해 주셔야 해요! 안 그러면 저 진짜 배신감 느낄 거예요.”

“그런 거 아니에요. 난 그냥 평범한 축에 속해요.”

아연은 난감한 미소를 띠고 규영의 말을 부정했지만, 이내 자조 섞인 실소가 새어 나왔다. 으레 사람들이 표현하는 것처럼 권성현이 다이아몬드 수저쯤을 잡고 태어난 로열 중의 로열이라면, 아연은 은수저 정도는 쥐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서울의 노른자 땅, 오피스가 밀집된 상업 지구에 자리 잡은 60평대 카페를 소유한 스물아홉의 여성. 겉으로 드러나는 프로필만 보아서는, 스스로를 그저 평범하다 일축하기엔 오히려 재수 없어 보일지도 모른다.

아연의 아버지인 강준의 도움이 없었다면 서울 한복판에 이만한 규모의 카페를 차린다는 건 꿈도 못 꿀 이야기였다. 당시 모친인 희수는 고귀한 집안의 자제인 제 딸이 겨우 카페에서 음료나 팔며 돈을 벌겠다니, 이 무슨 격 떨어지는 소리냐며 펄쩍 뛰었었다.

‘아무리 세상이 변했다 한들 결국은 물장사에 불과하잖니.’

누가 들으면 몰매 맞을 소리까지 서슴지 않으며 격한 반대표를 던졌다.

그러나 카페 창업에 강준의 큰 도움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그녀는 곧바로 태도를 바꾸었다. 희수는 어떤 방식으로든 제 딸이 자신의 남편으로부터 무엇 하나라도 더 갈취해 내는 것을 몹시 달가워했기 때문이다.

아연에게 아버지란 존재는 굉장히 심플하게 정의된다.

검사장 출신 현직 국회의원 한강준.

아연의 부모는 그녀가 기억하는 가장 어린 시절부터 이미 별거 중이었다. 아니, 실은 정상적인 결혼 생활을 영위한 적이 없다고 표현해야 바람직하려나.

대대로 국회의원을 지낸 지체 높은 집안에서 고귀하게 자라난 한강준은 어느 날 아름다운 여배우 홍희수를 만나 폭풍 같은 사랑에 빠졌다. 거기까지는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는 이야기이나, 다만 문제는 그가 이미 아내가 있는 유부남이라는 데에 있었다.

결혼 후 5년 넘게 본처와의 사이에서 아이가 없었던 강준은 희수의 몸에 아이가 들어서자 본처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혼을 원하지 않았던 본처와 지지부진한 이혼 소송이 시작되었고, 그사이 희수는 아이를 낳았다.

그렇게 내연녀의 아이로 태어난 아연이 아장아장 걷는 나이가 되었을 즈음, 이혼 소송은 강준의 패소로 끝났다. 강준은 또다시 이혼 소송을 청구할 예정이란 말로 좌절한 희수를 달랬으나, 이혼 소송 소식보다 먼저 날아온 것은 본처가 임신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아마도 그들은 전쟁 같은 사랑을 했으리라.

아연의 어렴풋한 기억 속에선, 이따금 집에 강준이 찾아오는 날이면 희수가 악에 받친 비명을 지르며 물건을 집어 던지는 소리가 온 집 안을 울리곤 했었다. 그리고 그녀의 악다구니가 열에 달뜬 신음 소리로 변하는 데에는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아연은 희수가 비명을 지를 때보다 더 허옇게 질린 얼굴을 이불 속에 처박아야 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귀를 꽉 막은 채 오들오들 떨었다. 부모님의 사이가 좋아졌다는 소리니까 그렇게 끔찍하게 생각할 것 없다고 하염없이 되뇌며.

강준은 집에 어린 아연이 있다는 사실조차 잊은 것처럼 제 용건을 마치면 또다시 모녀를 남겨 두고 훌쩍 떠나갔다. 그런 사람이 한 달에 한 번씩은 꼭 아연을 집 바깥으로 불러냈다. 희수는 함께하지 않았으며, 만남의 장소는 그때마다 제각각 달랐지만 늘 호텔 안에 있는 카페였다.

눈앞엔 화려하고 다채로운 색깔의 아름답고 먹음직스러운 디저트류가 줄지어 있었고, 맞은편엔 자로 잰 듯 딱딱한 차림의 강준이 자주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며 앉아 있었다. 한 시간이 채 되지 않는 만남의 끝엔 꼭 두툼한 봉투가 건네졌다.

아버지와의 만남 후 집에 돌아오면 거실을 서성거리던 희수가 부리나케 달려와 아연의 손에 든 봉투를 낚아채 갔다. 신경질적인 손짓으로 봉투 안에 든 돈의 액수를 확인하는 동안, 아연은 죄진 아이처럼 주춤거리다가 화장실로 달려가 꾸역꾸역 목구멍 안으로 밀어 넣었던 음식을 죄다 토해 내곤 했다.

나이가 들수록 다달이 건네지는 액수가 커지고 어느 순간부터는 봉투가 아닌 통장으로 꽂히게 되었을 뿐, 부녀간의 관계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더는 먹기 싫은 음식을 억지로 입에 욱여넣을 만큼 멍청하지 않다는 정도만이 유일한 변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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