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왔다.”
무심결에 흘러나온 목소리에는 반가운 기색이 배어 있었다. 규영은 애써 침착하게 발걸음을 옮겨 계산대 앞에 섰다. 앞치마에 닦아 내리는 손바닥에는 어느새 따끈하게 열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녀의 시선은 이제 막 카페의 유리문을 열고 들어온 인물에게 닿아 있었다.
문간에 달린 유리 종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들어올 정도로 장신인 남자의 등장에 카페 안엔 잠시 미묘한 정적이 감돌았다. 남자가 살짝 내리깔았던 시선을 들어 올리자, 나른하게 뜬 눈꺼풀 아래 고요한 갈색 눈동자가 빛났다.
그때 여자 손님 한 명이 테이크아웃한 커피 잔을 들고 가게를 나서다가, 그의 앞에서 홀린 것처럼 스르르 멈춰 섰다. 남자는 곧장 팔을 뻗어 유리문을 민 상태로 몸을 기울였다. 여자 손님은 발갛게 상기된 뺨으로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아, 감사합니다.”
그가 문을 잡아 준 사이 머뭇거리며 가게를 떠나는 여자 손님의 얼굴엔 어떤 기대감마저 떠올라 있었다. 그러나 그저 몸에 밴 매너를 기계적으로 행하였을 뿐인 듯 덤덤하게 돌아서는 남자의 얼굴은 무관심하기만 했다.
그가 커다란 보폭을 차분히 내디딜 때마다 규영의 긴장 어린 발끝이 톡톡 바닥을 두드렸다. 카페 안의 숨죽인 시선들이 일제히 그를 따라 움직이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저런 남자가 우리 카페 단골손님이라니, 정말이지 사장님은 운도 좋으시지.’
규영은 점점 가까워지는 남자를 향해 간신히 미소를 지어 보이며 옆을 흘끗 살폈다. 복덩이가 굴러 들어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정작 카페 주인인 아연은 음료를 만드는 데 여념이 없어 보였다.
아침 출근 시간에 카페를 찾는 손님의 대다수가 문을 열고 들어와 외치는 게 아메리카노이거늘, 조금 이르게 찾아온 초여름의 날씨 때문일까. 오늘따라 유난히 프라푸치노를 주문하는 손님이 많은 까닭이었다.
“샷 추가한 따뜻한 아메리카노 맞으시죠?”
“네. 고마워요.”
남자가 예의 섞인 미소와 함께 카드를 내밀었다. 그림 같은 미소에 잠시 홀린 것처럼 멀거니 서 있던 규영이 허둥거리며 카드를 받아 들었다.
단골손님의 수려한 외모에 익숙해질 법도 하건만, 말도 안 되게 잘생긴 얼굴에 눈부신 미소마저 드리울 때면 전신의 모든 빗장이 단숨에 개방되는 기분이라 넋을 놓기 일쑤였다.
“금방 준비해 드릴게요. 음료 나오면 불러 드리겠습니다.”
상냥한 미소와 함께 주문 접수를 마친 규영은 에스프레소 머신 쪽으로 향했다. 그녀가 두어 걸음 멀어지기 무섭게 남자가 몸을 기울이며 입을 열었다.
“한아연.”
계산대 안쪽에서 등을 돌린 채 음료를 만드는 데 집중하고 있던 아연의 어깨가 흠칫 굳어졌다.
아아, 어떡하지.
순식간에 불어닥친 긴장감에 짧게 숨을 몰아쉰 아연은 흘끗 뒤를 돌아보았다.
성현은 언제나의 아침처럼 근사한 정장 차림으로 카운터 건너편에 비스듬히 기대서 있었다. 한 가닥의 흐트러짐도 없이 깔끔하게 넘긴 머리가 집에 있을 때 이마 위로 편안하게 흘러내린 모습과는 괴리감이 느껴졌지만, 이제는 아연에게도 퍽 익숙해진 모습이었다.
처음 그가 출근 복장을 한 모습을 보았을 때만 해도 몹시 낯설고 어색해서 몇 번이고 웃음을 터뜨리곤 했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3개월 전, 미국에서 경영 수업을 마치고 돌아온 성현이 회사에 다니기 시작했을 때의 이야기이다. 아침마다 그가 근사하게 차려입은 모습을 보면 자동으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주문을 받는 데 시간이 한참이나 소요되곤 했다.
아연의 카페가 입점해 있는 건물 바로 옆에 그의 회사가 위치해 있기 때문에, 성현은 특별한 일정이 없는 한 일종의 루틴처럼 늘 출근 전 이곳에 들러 커피를 주문했고, 그건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주말을 제외하고 거의 매일같이 보게 되는 복장인지라 어느덧 낯설기는커녕, 가끔은 오히려 편안한 차림을 한 그의 모습이 더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니까 그 낯익은 모습을 보고도 마치 처음 본 것처럼 아연이 화들짝 놀란 것은, 오롯이 어제 있었던 ‘그 일’에서 비롯한 제 발 저린 반응인 것이다.
“왔어?”
아연은 믹서볼을 본체 위에 끼우며 슬쩍 시선을 피했다. 성현은 그녀가 들고 있는 커다란 블렌더를 보고 작게 눈살을 찌푸렸다.
“몸은?”
“어?”
무심결에 눈을 들자 곧장 시선이 마주쳤다. 성현은 카운터로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반사적으로 아연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바지에 양손을 꽂은 탓인지 정장의 앞섶이 벌어져 있었다. 목 끝까지 단정하게 채운 단추가 무색하게, 탄탄하게 성난 가슴 근육에 미어진 셔츠가 당장이라도 터질 듯이 아슬아슬했다.
“몸 어때. 아프지 않아?”
어처구니없게도 그 순간 그의 가슴 근육에 정신이 팔려 있던 아연은 뒤늦게 화들짝 놀랐다.
“그런 얘길……!”
“…….”
“……왜 해.”
저도 모르게 한 옥타브 높아진 목소리에 제가 더 놀라서 말을 멈추었던 아연은 이내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그를 타박했다.
“이상한 소리 말고 그냥 커피나 받아 가. 평소 하던 것처럼.”
불안한 눈망울로 주변을 살피며 전전긍긍하는 모습에 성현은 피식 실소했다. 그러고는 카운터에 몸을 깊숙이 기대며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네 반응이 더 이상한 거 알아? 아예 광고를 하지 그래. 어제 우리 잤다고.”
아연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무의식적으로 뻗어 나간 손이 성현의 입을 틀어막았다.
“제정신이야? 왜 이래, 정말.”
아연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러나 성현은 그녀가 허둥거리는 모습에 눈꼬리를 더 크게 휘어뜨리며 장난스럽게 웃을 뿐이었다.
옆을 힐끔 살피니 에스프레소 머신 앞에 선 규영이 의아한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규영의 눈길이 성현의 얼굴을 덮은 자신의 손에 꽂혀 있음을 알아챈 아연은 흠칫 놀라며 손을 파르르 떼어 냈다.
‘정신이 빠졌지, 한아연. 너야말로 제정신이야?’
다짜고짜 입부터 틀어막다니, 그의 말대로 더 이상한 그림을 자아내고 만 꼴이다. 저만치에서 규영이 고개를 갸웃 움직이는 모습에 아연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부디 매장 안의 손님들에게만큼은 이런 장면이 보이지 않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제 눈앞을 가로막은 성현의 커다란 덩치가 모두 가려 주었기를.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마, 제발.”
아연은 그와 시선을 맞추고 조용히 속삭였다. 최대한으로 목소리를 깔고 이를 악문 협박조였는데, 뒤에 무심코 튀어나온 ‘제발’ 때문에 애원이나 마찬가지가 되었다.
“그러지 뭐.”
대답은 착실하고 선선했다.
근데 이 손은 뭔데.
아연은 눈살을 찌푸리며 제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말랬더니, 말하는 대신 성현이 그녀의 손목을 쥐고 있었다.
단단한 엄지가 손목 안쪽의 여린 살을 야릇하게 쓸어내렸다. 별안간 소름이 끼치며 등줄기가 쭈뼛 섰다.
“괜찮으세요, 사장님?”
규영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어 왔다. 흠칫 놀란 아연이 손목을 비틀어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별 힘도 주지 않았던 건지 그녀의 손이 어렵지 않게 홀연히 빠져나가자, 성현은 아무렇지 않게 제 손을 팬츠 주머니에 꽂아 넣었다.
“아아, 응. 괜찮아요. 손에 상처가 좀 나서. 카페에서 일하다 보면 여기저기 자잘한 상처며 화상 자국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데. 그렇죠?”
묻지도 않은 변명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정말이지 쥐구멍에라도 기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연은 그에게 잡혔던 손목을 다른 손으로 문지르며 어색하게 하하 웃었다.
사장의 이상 행동에 착하게도 싱긋 마주 웃어 준 규영은 방금 내린 커피 잔을 성현에게 내밀었다.
“샷 추가한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
“잘 마실게요.”
성현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커피를 받아 들고 다시 아연을 보았다.
“간다.”
“응.”
아연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는 얼른 블렌더를 가동했다. 기계 소리가 위잉, 요란하게 울린다. 그가 피식 웃음을 흘렸으나 블렌더 돌아가는 소리에 묻혀 아연에게는 닿지 않았다.
성현이 카페를 떠나자, 마치 피리 부는 사나이에 홀린 듯 매장 안의 손님들도 그 뒤를 따라 나갔다.
대다수가 성현과 마찬가지로 카페의 단골손님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단골인 성현의 황홀한 외모에 매료되어 아침에 잠깐이라도 눈요기를 해 볼 요량으로 아연의 카페를 찾는 사람들이었다.
1년 전에 시작한 그녀의 카페는 성현이 이곳을 드나들기 시작한 시기를 기점으로 매출이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했다.
처음에는 이제야 드디어 입소문이 난 모양이라며 착각했지만, 늘어난 매출의 대부분이 성현의 출근 시간 전후에 몰려 있는 것을 확인한 뒤로는 그의 효과를 확신하게 되었다.
성현은 대부분 출근길에 들러 커피를 테이크아웃해 가지만, 가끔 시간적인 여유가 있을 때면 매장에서 마시고 가기도 했다. 그럴 때면 아연은 일부러 길에서 훤히 들여다보이는 창가의 명당자리에 그를 앉혀 두었다.
대체로 무덤덤한 성현은 그녀에게 어떤 세속적인 꿍꿍이가 있는지도 모른 채 시키면 시키는 대로 그저 그림 같은 자태로 창가에 앉아 커피를 홀짝거렸다. 그런 날에는 매출이 말도 못 하게 치솟아서 행복한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밀린 주문 때문에 울면서 음료를 만들어야 할 지경이었지만, 화를 내는 손님은 한 명도 없었다. 적어도 성현이 매장 안에 앉아 있는 동안에는.
“이제 좀 한가해졌네요.”
규영이 젖은 손을 페이퍼타월에 닦아 내며 지친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어느 유명 맛집처럼 손님들로 가득하여 복작복작하던 매장 내부는 개미 한 마리 남지 않고 조용해졌다. 성현의 출근 시간인 8시 반쯤에 가장 피크를 찍고, 그 후로 드문드문 이어지던 손님 행렬은 9시 반쯤이 되면 맥이 끊어진다.
“아침에 좋은 구경 하는 건 감사한데, 아무래도 오전 시간에 일손이 부족한 것 같아요, 사장님.”
“응. 그렇지 않아도 내일부턴 민재 씨가 풀타임 근무 하기로 했으니까 좀 나아질 거예요.”
“그래요? 다행이다. 셋이 하면 충분하죠!”
“자, 마셔요.”
아연은 규영이 좋아하는 레모네이드에 얼음을 가득 넣어 건넸다.
“앗, 감사합니다.”
규영은 해맑게 웃으며 카운터 구석에 밀어 두었던 접이식 의자 두 개를 가져와 펼쳤다. 한차례 폭풍우가 휘몰아치고 지나갔으니 잠시 휴식 겸 리프레시를 할 시간이었다. 그녀가 내준 의자에 앉던 아연이 일순 아랫배를 감싸며 끙 하고 신음했다.
“배 아프세요? 사장님 오늘 컨디션이 별로 안 좋아 보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