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한아연이 대체로 남자에게 관심 없는 줄은 알았지만, 대뜸 바지를 내려 보라느니, 거시기가 크다느니 말하는 것을 보곤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남자를 만나 보긴 한 모양이라고 대충 넘겨짚었었다.
그런데 관계 후에 피가 나온 것을 보니 혹시 처음인 것은 아닌가 하는 한 줄기의 의심이 피어오른 것이다. 아니라고 정색하며 허둥거리는 모습이 오히려 그의 의심을 키웠다.
‘처음이면 처음이라고 말을 하지. 그럼 조금 더 조심스럽게 했을 텐데. 물론 미친놈처럼 정신을 놓고 박아 대던 놈이 할 말은 아니지만.’
잠시 아연을 가만히 바라보던 성현은 이내 무덤덤한 낯으로 물었다.
“언제 하고 안 했는데.”
“……뭐?”
“얼마 만에 한 거냐고, 섹스.”
아연은 기가 막힌다는 듯 하,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런 걸 왜 물어. 매너 없이.”
눈도 마주치지 않고 눈알을 스르르 굴리는 것을 보니 의심은 더욱 짙어졌다. 연기력도 형편없는 주제에 끝까지 잡아떼는 모습에 코웃음이 나올 뻔했다.
‘왜 처음이면서 아니라고 하는 거지?’
부끄러워서 그러나?
성현이 눈매를 가늘게 좁히고 지그시 바라보자 아연이 눈썹을 왈칵 찌푸렸다.
“됐으니까 그만 쳐다보고 가서 씻어.”
“같이 씻을래?”
“뭐?”
“씻는 김에 거기도 좀 보여 주고. 괜찮은 건지 확인해야겠어.”
“확인은 무슨 확인이야. 진짜…… 짜증 나.”
아연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베개를 들어 성현에게 던져 버렸다. 그가 고개를 홱 숙여 피하자 빠른 속도로 날아간 베개가 벽이 부딪힌 후 바닥에 털썩 떨어졌다.
“그럼 보여 주는 건 됐으니까, 그냥 같이 씻기만 하는 건?”
“무슨, 같이 샤워를 해. 미치지 않고서야 그럴 일 없으니까, 그냥 좀…….”
“섹스도 한 사이에 샤워는 왜 못 해.”
“…….”
아까부터 자꾸 섹스, 섹스. 성현의 적나라한 말투가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디서 저런 상스러운 능구렁이가 튀어나왔지?
아연이 말없이 눈을 흘기자 성현은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하고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알았어. 그럼 먼저 씻을 테니까 누워 있어. 내가 나와서 갈 테니까 시트 그냥 놔두고.”
아연은 대충 고개를 끄덕거렸다. 성현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이 아무렇지 않은지 그대로 일어서서는 느긋한 걸음걸이로 침실에 연결된 욕실로 향했다. 걸어가는 뒷모습이 어느 박물관에서나 본 조각상만큼이나 근사했다.
욕실의 문짝만큼이나 너른 어깨, 곧은 등허리 양쪽에 탄탄하게 잡힌 근육과 깊게 파여 음영 진 등줄기, 바짝 올라붙은 엉덩이는 탐스럽기까지 하다. 그 아래로 이어지는 단단한 허벅지는 경주마의 그것을 연상케 할 정도였다. 다리는 또 왜 저렇게 긴지…….
시원스레 쭉 뻗은 다리를 보며 괜스레 혀를 쯧, 찬 아연은 그가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후다닥 몸을 일으켜 침대 시트를 벗겨 내기 시작했다.
* * *
허억.
아연은 숨을 몰아쉬며 눈을 반짝 떴다.
어스름한 새벽의 빛이 반쯤 닫힌 커튼 사이로 파고들었다. 간밤에 무슨 꿈을 꾸었는지 제대로 기억나진 않지만, 악몽이라도 꾼 것처럼 온몸이 식은땀에 젖어 있었다.
무슨 꿈이었더라?
집채만 한 돌덩이 아래에 꼼짝없이 깔려서 숨을 헐떡거리며 살려 달라고 비명을 질렀던 기억이 희미하게 뇌리를 스쳤다.
어두운 천장을 올려다본 채로 멍하니 눈을 깜빡거리던 아연은 이불을 거둬 내고 몸을 일으켰다.
“아으으.”
뻐근하게 밀려드는 통증에 저도 모르게 아랫배를 끌어안으며 허리를 푹 숙였다. 골반에서 시작된 둔통은 아직 이불 아래에 덮인 하체까지 찌잉 이어졌다.
아아.
나 어제 권성현이랑 잤지.
아연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밤사이 휘발되기를 바랐던 기억이 오히려 끈적하게 농축되어 꾸역꾸역 밀려들더니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녀는 머리통을 부여잡고 나지막이 탄식했다.
“미쳤다. 미쳤어.”
어제의 새파란 패기 따윈 흔적도 없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아니, 정확히는 성현의 커다란 몸 아래에 꼼짝없이 갇혀선 굶주린 짐승 같은 형형한 눈빛을 마주하게 된 순간, 될 대로 돼라 싶던 불같은 성미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불시에 사그라들었다. 오히려 슬그머니 겁을 집어먹게 된 것이다.
“하아, 나 이제 권성현 얼굴을 어떻게 보지?”
아연은 몸을 한껏 웅크린 채 끙 하고 신음을 흘렸다. 어젯밤 그가 욕실에 들어간 사이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쳐 나오긴 했지만, 잠깐의 회피일 뿐 언제까지고 피해 다닐 수는 없었다.
대체 무슨 정신으로 그런 짓을 저질러 버린 거지. 나 사실 엄청나게 취했던 거 아닌가?
슬그머니 술의 힘에 기대 보았지만, 아연은 이내 맥없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찮은 핑계에 불과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맥주 따위에 취한 적이 없었으니까. 그런 뻔한 변명이 권성현한테 통할 리 없었다.
어제 그녀가 집에 돌아오기 무섭게 성현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왜 말도 없이 갔느냐부터 침대 시트는 왜 벗겨 갔느냐까지, 물어 오는 그의 말투는 태연하기만 했다. 어색함과 민망함에 온몸이 쪼그라드는 것 같은 기분은 오로지 그녀의 몫인 듯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그의 기색에 아연도 덩달아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대하고 전화를 끊었지만, 과연 얼굴을 마주하고도 태연자약한 분위기를 유지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지끈거리기 시작한 이마를 짚은 채 깊은 통탄에 빠져 있는데, 협탁에 올려 둔 핸드폰이 요란한 알람을 울리기 시작했다. 아연은 얼른 알람을 해제하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이미 엎질러진 물. 머리 싸매고 누워 있을 시간은 끝났다. 정신없이 바쁜 일터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아읏.”
침대를 벗어나던 아연이 또 한 번 침음을 삼키며 허리를 짚었다.
이왕 하는 거 크면 클수록 좋겠거니, 단순하고 패기 어린 생각을 했던 어제의 자신이 얼마나 맹랑하고 천진했던 건지.
후유증이 이토록 크리라곤 미처 생각지 못했다. 골반 아래에서 은근하게 피어오르는 둔통은 잔잔하고 지속적으로 아연을 괴롭히다가, 이따금 몸을 크게 움직일 때면 아래를 뾰족한 것으로 찌르는 듯한 따끔한 통증을 일으켰다.
몸의 움직임을 최소화하여 욕실을 향해 조심스레 걸으며 아연은 원망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오롯이 제가 스스로 불러온 결과라곤 하지만, 일을 치른 건 두 사람인데 이쪽만 물리적인 후유증에 시달리는 건 어쩐지 억울한 기분이었다.
“하자고 한 건 난데, 왜 자기가 더 몰입해서는……. 으으, 뻐근해.”
언제는 도끼눈을 뜨고 당장 눈앞에서 내쫓으려고 굴었던 주제에, 성현은 어느 순간부터 완전히 미친 짐승처럼 돌변해 그녀를 벼랑 끝까지 내몰았다. 어느샌가 맹수에게 쫓기는 먹잇감이 된 것처럼 형형한 눈빛 아래 꼼짝없이 얼어붙었을 정도였다.
그의 말대로 처음에 들쑤시기 시작한 쪽은 나인데, 어째서 홀랑 잡아먹힌 기분이 드는 건지.
지그시 힘을 실어 제 몸을 짓누르던 묵직한 무게감이 떠올랐다. 도망가지 못하게 찍어 누르던 힘.
욕실로 향하던 아연의 발걸음이 서서히 느려졌다. 아연은 아랫배에 손을 얹고 슬며시 쓸어 보았다.
납작한 배를 어루만지던 커다란 손과 그때마다 느릿하게 아래를 파고들어 오던 찡한 압박감, 덫에 걸린 들짐승처럼 할딱거리는 그녀를 집요하게 관찰하던 시선.
지나온 시간을 통틀어 성현에게서 처음 보는 눈빛이었다. 정욕으로 번들거리는 짙어진 눈동자를 마주하는 순간 마음 한구석이 선득해져 왠지 모를 죄책감마저 느꼈던 그녀였다.
그가 결코 내보인 적 없는 날것으로 물든 민낯. 귓가에서 거칠게 부서지던 숨소리. 야살스럽게 속살거리던 야한 말들.
이제껏 그녀가 봐 온 소꿉친구의 전혀 다른 낯선 면모를 들춰 본 것은, 그야말로 판도라의 상자를 연 기분이었다.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여 금단의 상자를 열었던 판도라는 결국 어떻게 되었더라?
인류에게 아름다운 재앙을 불러일으킨 신화 속 인물을 떠올리며 아연은 때늦은 자괴감에 빠졌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무슨 낯으로 권성현 앞에 서야 할지.
뒤늦게 제가 저지른 이 난감한 사태를 수습할 적절한 방도를 깊이 고민하던 아연은 다시금 아랫배를 부여잡았다.
지잉, 안쪽이 진동하는 것 같기도 하고 여전히 무언가 박혀 있는 것처럼 낯선 위화감이 느껴졌다.
아연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파였다. 시작은 제 쪽이었다지만, 결국 손바닥을 마주 친 상대편에 대한 원망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대체 권성현은 무슨 생각으로…….’
그가 어떤 마음으로 제가 벌인 미친 짓에 동참했는지를 그려 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아연은 금세 납득한 표정으로 피식 실소를 흘렸다.
‘권성현도 남자니까, 섹스를 마다할 이유는 없었겠지.’
자격 없는 원망은 오래가지 않았다. 처음엔 몇 번이고 거절의 뜻을 비쳤던 것을 보면, 친구끼리 넘지 말아야 할 선에 대한 그의 의식은 오히려 저보다 더 견고해 보였다. 그 선을 무참히 무시하고 먼저 넘어선 건 그녀 쪽이었다.
그뿐인가.
‘난 너랑 해도 괜찮을 것 같은데. 해 볼래?’
떼쓰고, 유혹하기까지.
아연은 더없이 숙연해졌다.
“하아, 대책도 없이 일부터 치르고, 나야말로 짐승 아냐…….”
문간에 멈춰 서서 자괴감으로 범벅된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아연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시계를 확인했다. 이미 벌어진 일이니 우선 출근이나 하자며 마음을 다잡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또 그 생각에 머물러 있었다니, 한심하기도 하지.
아연은 눈을 감고 고개를 세게 가로저어 상념을 털어 내고는 터덜터덜 욕실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