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훈장님, 비 와요.”
한 아이의 말에 평상 위에 앉아 천자문을 소리 내어 따라 읽던 아이들이 일제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방울방울로 떨어지는 부슬비였지만 행여 책이 젖을까 아이들은 냉큼 처마 아래로 후다닥 뛰어 들어간다.
빗줄기는 어느새 굵어져 후두둑 소리를 내며 마당을 적시기 시작했다. 마루 위에서 아이들과 바느질을 하던 아란은 고개를 들고 마당을 내다보았다.
“갑자기 비가 오네요.”
아란과 눈이 마주친 현경은 도포자락을 털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아란이 현경더러 아이들을 데리고 마루로 올라오라고 손짓하자, 현경이 웃으며 아이들에게 말했다.
“오늘은 훈장님께 읽어 달라고 해볼까?”
아란은 천천히 바느질을 하면서 천자문 한 구절을 소리 내어 읊었다. 바느질을 따라하던 여자아이들도 그 소리를 흉내 내어 따라하기도 하였다. 현경은 옆에서 그 모습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구절의 뜻을 말로 풀어 설명해 주었다.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을 번갈아 돌아보는 아이들의 동그란 얼굴들 뒤로 어느새 비는 그쳐 있었다.
강연이 끝난 후에도 아이들은 재미난 구경이라도 난 듯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마루에 모여 앉아 있었다. 밤톨만한 아이들 틈에 앉아 바늘을 쥔 채로 아란의 손길을 쫓는 현경의 시선이 유난히 바빠 보였다.
“이 다음에는 어떻게 해요?”
“에이, 스승님 하는 건 삐뚤빼뚤해요.”
마루에 앉은 아이들이 현경을 놀렸지만 현경은 그저 바늘 끝에 집중하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우리 아부지가 바느질은 여자들이 하는 거랬는데.”
“너희도 여기 앉아서 한 번 해봐라, 이게 보기보다 무척 재밌다.”
언젠가 아란이 바느질하는 모습을 보면서 현경도 은근히 해보고 싶어하는 눈치길래, 매듭짓고 홈질하는 정도는 알려줬더니 이제 제법 야무지게 잘 따라오는 게 기특했다.
손가락이 울긋불긋해지도록 바늘에 찔리면서도 재밌다 하니, 손재주는 없어도 현경의 얼굴은 즐거워 보였다. 엉성하고 정갈하지 않아도 현경이 연습 삼아 처음으로 완성한 조각보는 아란의 베갯잇이 되고, 현경의 자랑이 되기도 했다.
“분이가 스승님보다 잘한다.”
어느새 현경의 바느질 솜씨를 두고 평을 하는 아이들 장난에도 현경은 요놈들 하고 맞장구만 쳐줄 뿐 싱글싱글 웃기만 한다. 아이들과도 다정하게 놀아주는 현경이라 공부하러 온 아이들도 감히 장난을 걸면서도 그 곁에 올망졸망 모여앉아 떠나질 않았다.
“스승님은 근데 왜 바느질 하세요? 훈장님이 옷도 다 만들어 주신다면서.”
“훈장님 버선은 내가 만들어 드리고 싶어서 그러지.”
현경이 아란을 돌아보며 말하자, 아란도 바느질을 하다 말고 눈을 맞춰온다. 서로 마주보고 웃는 둘을 보며 아이들은 얼레리 꼴레리 하며 놀리다가도 금방 따라 웃는다. 그럴 때면 현경은 아란 곁에 좀 더 붙어 앉으며 아이들을 재촉했다.
“해 진다, 너희들 인제 집에들 가라 어서.”
언덕 아래로 왁자지껄 떠들며 내려가는 아이들 뒷모습이 작아지면 현경은 그제야 앓는 소리를 내며 아란 무릎을 베고 벌렁 누워 버린다.
“이러다 또 아이들에게 들켜 놀림 당하시려구요.”
“놀리라고 하죠. 뭐, 어때요.”
현경은 그러면서도 은근슬쩍 싸리문 쪽을 계속 힐끔거렸다. 일전에도 한 번 강연이 끝나고 평소처럼 아란에게 어리광을 부리고 있는 모습을 한 아이에게 들켜 체면이 말이 아니었던 현경이었다.
다음날 강연 중에 아이들이 은근히 보내는 개구진 눈빛에 현경 옆에 있는 아란도 그 민망함을 피할 수 없었다.
글을 배우러 오는 아이들은 현경을 스승님이라 부르고 아란을 훈장님이라 불렀다. 처음엔 아란이 글을 안다는 소문을 듣고 나이 지긋한 어느 댁 안방마님이 찾아온 것이 시작이었다.
“저, 나도 글 좀 배워 볼 수 있을까?”
“글 배우시려구요?”
“우리 영감이 이제 나이가 드니 눈이 침침해서. 평생 글 공부 하던 사람인데, 눈이 안 보이니 적적해 하고 그래서.”
“아.”
“내가 대신 옆에서라도 읽어 줄까 하구.”
글을 배우는 것이 어디 하루아침에 되는 것도 아니고, 아이들처럼 그 배움이 빠른 것도 아니었지만 차근차근 글자를 알아가는 여인을 보며 아란은 그 시간들을 소중하게 여겼다.
평생을 학자의 아내로 살아왔지만 정작 글을 배울 기회가 없던 마을 여인들이 하나둘 아란을 찾아오기 시작했고, 자연히 어미를 따라 아이들도 집에 모여들었다.
글 가르치는 사람 하면 다들 훈장인 줄을 아니, 아란은 어느새 훈장댁이라 불리게 되었다. 아란은 그 말을 수줍어해서 현경더러 하라 했지만 현경은 훈장보다는 선생 소리를 더 듣기 좋아하는 것 같았다. 마을 사람들이 부를 땐 강선생이라 하고, 아이들을 모아다 놓고 글을 가르칠 땐 스승님 하고 부르게 하니, 아이들은 또 곧잘 그 말을 따라하여 그때마다 현경은 어깨를 으쓱거리곤 했다.
“강선생, 훈장댁이 우리 마누라 글 가르치셨대?”
“왜, 우리 집에 몇 번 오시는 거 같긴 하던데.”
“아, 마누라가 집에서 빨래도 안 허고 책만 끼고 있잖애.”
“그럼 엽이 아버지가 대신 좀 해주면 되지.”
“안 그래도 내 팡팡 두들기다 오는 참이지, 이거 봐, 훨씬 뽀얗지.”
툴툴거리던 엽이 아비는 금방 하얀 이를 드러내 보이며 씨익 웃었다. 빨랫감을 자랑해 보이며 골목으로 들어가는 엽이 아비는 아내와 아들을 모두 글공부 시키고 대신 밥을 짓고 빨래를 하기 시작했다. 내심, 그 일이 나무를 깎던 목수 일보다 재밌는지 불만스러워 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우리 부인 미움 받나 싶어 놀랐네.”
“그래도 엽이 어머니 오시는 날엔 늘 마중오시던데요.”
현경이 아궁이 앞에 앉아 불을 피우는 동안, 아란이 장작 몇 개를 더 가져와 말을 거들었다. 조금 전 시장서 종이 사오는 길에 엽이 아비 만난 이야기를 했더니, 아란은 알고 있었다는 듯 조용히 웃는다. 그리곤 현경 옆에 나란히 쪼그려 앉아 몸을 붙인다.
“따뜻하네요.”
아란이 타닥타닥 불길이 오르는 아궁이 쪽에 손을 뻗으며 말하자, 현경이 장난하듯 그 위에 나란히 손을 겹쳐두었다.
“그러네요.”
아란은 평상 위에 앉아 반짇고리함을 정리해 한쪽으로 밀어두고는, 아까부터 계속 똘망똘망한 눈으로 저를 올려다보는 현경과 눈을 맞추었다. 공부하러 온 마을 사람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간 후에 현경은 이렇게 아란과 둘이서 한가로이 보내는 시간들이 좋았다. 특히나 이렇게 눈을 맞추고 있을 때면 마치 눈동자 속에 든 행복함이 마음속 가득 쏟아져 내리는 기분이라 생각했다.
웃을 듯 말듯 실룩거리는 현경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리던 아란은 현경의 하얀 이마 위 발그레한 자국을 만지작거렸다.
“망건이 너무 옥죄지 않으세요?”
“괜찮은데, 자국 났어요?”
“예쁜 이마에 자국 났네.”
아란은 관자에 매인 망건 끈을 풀면서 작게 중얼거렸다.
현경의 이마는 하얗고 반질반질한 게 참 예쁜데 아란과 방 안에 있을 때 말고는 늘 사내차림을 하고 있어야 하니, 아란은 망건 밑으로 그 고운 이마가 가려지는 게 조금 아까웠다.
날이 푹해지면 땀도 많이 나고 더워하니까, 좀 결이 부드러운 것으로 장만할까 하고 아란은 홀로 마을 장터로 나왔다. 망건장이 노인 앞을 둘러보다가, 문득 매화 무늬 관자가 예뻐서 집어 들었다. 남들 보는 눈이 있어 안 그런 척해도 은근히 예쁘고 귀여운 걸 좋아하는 현경이기에 사다 주면 좋아할 것 같았다.
나온 김에 저녁 찬거리 할 고기도 조금 사려고 푸줏간을 찾으니 주인이 공손하게 아란을 반겼다. 뭉텅뭉텅 고기를 끊어내는 거친 손과는 달리 순박한 눈매의 사내는 아란이 치른 값에 비해 덤을 얹어 제법 묵직한 양을 건네주었다.
“선생님 안주거리 하시라고 더 드려요.”
옆에 있던 그의 아내가 아란을 보며 선하게 웃었다.
저녁 무렵이 되자 장터 골목엔 고소한 기름 냄새가 풍겼다. 성격이 수더분하여 수다 떨기를 좋아하는 양반댁 마님들도 장터에 둘러앉아 한창 이야기꽃을 피우다 아란을 보고선 반갑게 말을 걸어왔다.
“훈장댁, 오늘은 웬일로 혼자 오셨네요.”
“예, 찬거리 좀 사다 이제 올라가요.”
마을 사람들은 언제나 서로의 시선이 닿는 곳에서 함께하는 두 사람을 보며 그 애틋한 마음을 어여쁘고 귀하게 지켜보았다. 대장장이 덕구 부부뿐만 아니라 마을 아낙네들도 현경과 아란의 집에 쌀은 떨어지지 않았는지 땔감은 충분한지 자식처럼 살펴주었다.
덕분에 평생을 별당 규수로만 살아온 아란도 도성보다 풍요롭지 않은 이 마을에서 사는 게 더할 나위 없이 따뜻하고 부족함이 없게 느껴지곤 했다.
“어 오늘 고기반찬이네.”
평상 위에 얌전히 앉아 아란을 기다리던 현경은 언덕 아래로 아란의 모습이 보이자 손을 흔들다가 금방 내려와 아란의 손에 든 것을 받아들었다.
아란은 쪼르르 다가와 반겨주는 현경을 보며 언덕을 오르다 지친 숨을 크게 쉬었다.
“아 묵직하다, 우리 둘만 먹을 건데 이렇게 많이 사셨어요.”
“조금만 사려 했는데 서방님 안주하시라고 더 얹어 주더라구요.”
“그러면.”
“대신, 조금만 드셔야 합니다.”
현경의 얼굴이 아까 전보다 더 환하게 밝아지며 이젠 입이 아주 귀에 걸리도록 웃는다.
신난 현경이 고기 덩어리를 부엌에다 가져다 놓고 단지를 고르고 있다. 산 속에 홀로 살 때는 아예 땅 속에 술독을 묻어놓고 마셨다더니, 아란 몰래 어딘가에 또 술독을 파묻어 놓은 게 분명했다.
가끔 부엌에서 혼자 홀짝이는 게 마음에 걸려 그러지 마시라 했더니, 아예 부엌에다 종류별로 빈 단지들을 늘어놓고 그날 기분에 따라 하나씩 들고 가 술을 채워온다. 어디에 감쪽같이 묻어 놓았는지는 아직 아란도 모른다.
몰래 현경을 쫓아가보기도 하고 슬쩍 꾀어보기도 했지만 현경은 아란을 약 올리기만 할 뿐 알려주지 않았다.
“제가 설마 술독을 뭐 어떻게 하기라도 합니까.”
“위험해서 그러지요.”
그러니까 술독이 위험하다 이거지.
현경은 결국 제 얼굴보다 조금 더 큰 단지를 고민 끝에 골라들고 부엌을 나섰다. 어찌나 흥겹게 뛰어가던지 아란이 말릴 틈도 없이 현경의 뒷모습이 싸리문 밖으로 사라졌다.
“저렇게나 좋을까.”
아란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가마솥에 고기 삶을 물을 끓이고 저녁상 차릴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얼마 후 단지 가득 술을 채우고 돌아온 현경이 평상 위에 술 단지를 조심히 올려둔다.
삶은 고기를 썰고, 밥을 푸고, 묻어둔 찬을 꺼내니 진수성찬이었다. 바람도 선선하니 평상 위에 자리를 펴고 마주한 두 사람의 말소리가 두런두런 울렸다.
“밥 한술 뜨시고 약주하셔야죠.”
아란의 잔소리에도 현경은 은근슬쩍 잔에 입을 대고 헤헤 웃는다. 아란이 그 입에 고기 한 점 밀어 넣으니 웃으면서 잘 받아먹는다. 벌써 몇 잔을 비웠는지 모르겠지만 저렇게 싱글벙글인 것을 보면 현경은 오늘 기분이 꽤나 좋은 모양이었다.
“술이 그렇게나 좋으세요?”
“제가 술보다 더 좋아하는 게 있지요.”
“술보다 더 좋아하시는 게 뭔데요.”
“귀한 술?”
현경이 새초롬한 표정으로 농담을 하니 아란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향기는 그윽하나 그 맛이 쓰니, 술을 입에 대지 않던 아란도 오늘은 슬그머니 현경의 잔을 탐내 했다. 조금 따라 목으로 넘기니, 역시나 씁쓸하니 절로 얼굴이 찌푸려진다.
“도통 맛을 모르겠네요.”
“그 맛이지요. 모르는 맛.”
엉뚱한 말을 하며 현경이 천진하게 웃기에 아란도 따라 맑게 웃는다. 그 미소가 살랑살랑 불어드는 바람만큼이나 현경의 마음을 간질였다.
“좀 쉬었다 드세요.”
가득 따른 술잔을 놓지 않고 있으니 아란이 그 손을 잡고 살살 달래었다. 현경이 그대로 고개를 숙여 제 손 위에 올려진 아란의 손가락에 입 맞추었다.
“술맛이 달아요.”
말은 그리 능청스레 했지만 얼굴이 발그레하니 꼭 술기운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현경은 이제 술잔대신 아란의 손을 감싸 쥐고 그 손등에 입술을 댄 채로 아란을 바라보았다. 슬쩍슬쩍 잡은 손을 이끌어도 당겨오지 않더니 아란은 마지못해 하며 현경에게 이끌려 와주었다. 아란은 손등 위로 현경의 웃는 입매가 고스란히 느껴져서 간지러웠지만 먼저 손을 빼진 않았다. 그렇게 말없이 얼마간 두 눈이 마주친다.
“참, 드릴 게 있는데.”
“뭔데요?”
“아까 장에 나갔다가 산 것인데, 잠깐만 기다리세요. 방 안에.”
아란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니 아란의 손을 잡고 있던 현경도 따라 일어난다.
“어디 가시게요?”
“방 안에 무엇이 있어요?”
현경이 은근히 물어오니 아란이 그제야 무심코 앞서 걷다가 뒤를 돌아본다. 취했나 싶더니만 금방 눈망울이 초롱초롱하여 여전히 어린아이 같다.
어느새 코끝에 닿을 듯 다가온 현경의 눈망울에도 아란은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이런다니까. 눈을 보고 있으면 이렇게 얼굴이 가까운 줄을 잊곤 한다. 묘한 긴장을 늦추면 그대로 아득하게 빨려들 것 같은 기분에 아란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그 바람에 현경은 바싹 마르던 입술을 축였다.
“방 안에 들어가면, 볼 수 있어요?”
천연덕스레 물어오는 목소리에 아란은 새어나오는 웃음을 꾹 참았다. 아란을 바라보는 현경의 눈빛엔 사랑스러움이 가득했다. 방으로 이끄는 손길은 언제나처럼 더없이 정중했고 다정한 눈빛에 아란도 기꺼이 응했다.
“무얼 보고 싶으신데요?”
“당신.”
불빛 없이도 서로를 알 수 있으니 불을 밝히지 않아도 되고. 마음이 동하니 온기를 나눌 것 없이 그저 한 몸과 같았다. 닿을 때마다 수줍지만 낯설진 않으니 항상 처음과 같아도 익숙하다는 말이 틀림없으리라. 그 마음 서로 어루만지며 토닥이다 보면 어느덧 새벽은 밝아오기 마련이었다.
아란은 눈을 뜬 후에도 곧바로 일어나지 못하고 늑장을 부려 보았다. 겨우 몸을 일으켜 중천으로 향하는 햇빛을 가늠하다 보니 그제야 머리맡에 놓인 종이에 시선이 닿았다. 이른 아침에 먼저 잠이 깨었을 현경이 써내려간 연서의 반듯한 글씨는 그 사람만큼이나 다정하기도 했다. 그 내용은 그보다 더 따뜻해서 저를 안아오던 그 품이 생각나 아란은 이부자리에 앉아 연서를 몇 번이나 읽고 또 읽었다.
‘함께 보냈던 지난 계절의 온화함은 이 세상의 말로 다 그려낼 수 없기에
돌아오는 계절에도 함께라면 붓을 들지 않아도 그대가 곧 시가 될 것입니다.
그대와 눈을 맞추고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해와 달과 비와 바람 모두 그 두 눈에 담겨 평생을 들여다 볼 텐데
그 가련한 약조마저도 그대 앞에서만큼은 강인하기를
가벼운 흰소리 대신 그대 곁에서 고운 마음이 되기를
그대가 있음에, 지금 이 순간에도.’
아란은 옷을 입고 문 앞에 섰다가 다시 자리에 앉아 붓을 들었다. 현경이 써내려간 마음은 곧 아란의 마음과 같았기에 무엇을 더하고 덜할까 했지만, 그래도 연서의 마지막 글귀를 채워 넣고 장에서 샀던 매화무늬 관자 한 쌍을 올려두었다.
방문을 열고 나서니 말끔히 정리된 평상이 보였고, 부엌에서는 훈기가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었다. 아란은 부엌 아궁이 앞에 쪼그려 앉아 아침 준비를 하고 있을, 봄 햇살보다 온화하고 고운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로 향하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방 안 연서에 얹어진 아란의 정갈한 글씨 위로 어느새 아침 햇살이 한 겹 더 얹어져 있었다.
‘함께 보냈던 지난 계절의 온화함은 이 세상의 말로 다 그려낼 수 없기에
돌아오는 계절에도 함께라면 붓을 들지 않아도 그대가 곧 시가 될 것입니다.
그대와 눈을 맞추고 목소리를 들려줄 수 있다면
해와 달과 비와 바람 모두 그 두 눈에 담겨 평생을 들여다 볼 텐데
그 가련한 약조마저도 그대 앞에서만큼은 강인하기를
가벼운 흰소리 대신 그대 곁에서 고운 마음이 되기를.’
그대가 있음에, 지금 이 순간에도
그대가 있음에, 앞으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