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대가 있음에 (58)화 (58/63)

#58화

“이 정도면 비 안 새고 찬 바람 안 들 테지.”

“왜, 집에 누가 오는가?”

“덕구 자네, 부탁 하나만 듣지.”

“무슨 부탁.”

“혹시 나중에 우리 현경이 오거든, 안사람이랑 가끔 좀 들여다보고 해주게.”

“아, 경이가 오려는가 보네. 각시랑 같이 오나?”

“…….”

“헌데, 자네는?”

“나는 잠시 가봐야 하는 곳이 있어서.”

그때 강무가 잠시 다녀올 곳이 있다 말하지 않고 가야 할 곳이 있다 하는 말이 마음에 걸렸던 덕구였다. 참으로 별것 아니었는데, 그날따라 왜 그 말이 자려고 누운 밤에도 머릿속을 떠나질 않던지.

그게 마지막이었다. 강무가 조용히 마을을 떠난 지 한 달이 지나고 석 달이 지나도 강무는 돌아오지 않았고, 강무의 말처럼 현경이 마을에 돌아오지도 않았다.

일 년 쯤 지났을까, 감자골에서 가장 큰 어르신인 장씨 할머니 꿈에 강무가 나왔고, 그때 덕구는 강무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썩어버린 쌀을 버리고, 주인 없는 집을 쓸고 닦았다. 그렇게 세월이 마냥 흘렀고, 정말로 현경이 혼자 마을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덕구는 애써 다듬은 편자 하나를 깨뜨리고 말았다.

“어찌된 일인지, 너도 입 꼭 다물 테냐.”

“…….”

“그래, 알았다.”

“죄송해요, 아저씨.”

“아녀, 뭐가 죄송해.”

“…….”

“행여 자책하지 말어라, 니 잘못 아녀. 원래 강무가 옛날부터 너한테만큼은 쩔쩔 매잖여.”

“…….”

“너 행복하기만 바라고 산 아비다, 훌훌 털고 너만 웃고 살면 돼. 강무 그 사람 마음은 내가 잘 알지.”

“예.”

“그래, 고생혔다.”

어깨를 툭툭 다독이며 덕구가 뱉은 말 한마디에 현경은 결국 참았던 눈물을 쏟았다. 덕구는 입에 머금은 술을 꿀꺽 넘기며 술에 취한 강무의 모습을 떠올렸다. 처음 본 모습이었다. 참으로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얼큰히 취해서는 우리 현경이가, 하던 얼굴을.

“경이 각시는 언제 오냐, 얼굴 보고 싶은데.”

“어르신이 그러시면 현경이는 오죽하겠어요.”

장씨 할머니는 오락가락하는 정신에도 현경을 볼 때마다 경이 각시는 언제 오나 하고 중얼거리며 그 흐릿한 눈으로 현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옆에 있던 동네 아낙이 현경의 눈치를 보며 장씨 할머니를 달랬다.

햇볕 좋은 마을 어귀 평상에 앉아 장씨 할머니 옆에서 설화책을 읽어 주던 현경이 빙긋 웃었다.

“어르신, 우리 각시 보고 싶어요?”

“응.”

“금방 데려올게요, 정월 초하루에 만나기로 했거든요.”

“정월 초하루에 내가 항상 우리 영감 맛난 떡 해줬지.”

“아, 맛있었겠다. 어르신 그럼 전 각시한테 뭐 해줄까요?”

“책 마저 읽어줘.”

“책이요?”

“아니, 아니.”

“아, 어르신 책 마저 읽어 드려요? 어디 보자. 선녀가 오색구름 타고 다시 하늘로 올라가는데.”

“에이, 그만 조잘대라. 너 하는 얘기는 다 거짓부렁이다.”

장씨 할머니는 별안간 버럭 소리를 내며 현경의 손등을 찰싹 내리쳤다. 없는 정신에도 기운은 세차서 현경이 벌게진 손등을 매만졌다. 그럼에도 헤헤 웃으며 책을 들이미는데 장씨 할머니는 입을 오물거리면서도 그런 현경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까는 제가 읽어주는 게 제일 재밌다 하셔 놓고 또 그러신다. 봐봐요. 인제 제일 재밌는 구절이에요, 옥황상제가…….”

“옆에 있어 주믄 좋겠는데.”

“네?"

“그냥 옆에 있어만 주믄, 우리 영감처럼 어디 가지 말구.”

“…….”

현경은 잠시 멍한 표정이었다. 장씨 할머니는 또 금방 배가 고프다며 어린아이처럼 칭얼대기 시작했다.

“밖에 너무 오래 계셨네. 이제 들어가요, 어르신.”

옆에서 소쿠리를 탈탈 털던 동네 아낙이 장씨 할머니를 모시고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현경은 서책을 덮고서 잔잔히 웃었다.

아직 동이 터오지 않은 새벽에도 집집마다 더운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멥쌀 찌는 훈기가 새벽 안개처럼 골목 안에 가득했고 여인들은 분주했다.

마을 사내들은 모두 정갈한 옷으로 갈아입고 사당에 모여 제를 올릴 준비를 했다. 현경도 강무의 위패 앞에 술 한 잔을 올리고 한동안 앉아 있었다. 그러다 동이 틀 무렵, 서둘러 마을 어귀로 나섰다. 말 고삐를 잡아다 오르는데 사당에서 촛대를 들고 나오던 마을 청년 하나가 현경을 발견하고는 불러 세운다.

“얼레, 현경아 정초 새벽부터 어딜 그리 급히 가냐.”

“각시 데리러 간다.”

“여기서 기다린다는 거 아니었어?”

“보고 싶어서 못 기다리겠으니 내가 모시러 가야지.”

“참나, 어머니가 너 주라고 떡 싸놓으셨는데 와서 가져가기나 해라.”

“나중에, 금방 동 트겠다 얼른 다녀올게!”

“고놈 참.”

청년은 순식간에 멀어져 가는 현경을 보며 낄낄 웃다가 이내 부러운 듯 입맛을 쩝 다시며 다시 집으로 향했다. 집에 들어서니 곱게 싼 보자기를 들고서 누이가 발을 동동거리고 있다.

“현경 오라버니는 왜 안 와?”

다짜고짜 몰아치는 말에 청년은 퉁명스레 자신의 누이를 본 체도 하지 않는다.

“현경이 각시 데리러 가던데.”

그러자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누이의 얼굴이 굳어졌다.

“씨이.”

“하여튼 넌 언제 철들어서 시집갈래.”

“너나 빨리 장가 가버려라! 만날 한량놀음하다 과거는 언제 볼래!”

“저, 저 기집애가 오라버니한테 너라니!”

오누이 투닥거리는 소리가 담장 넘어가니, 길을 지나던 마을 사람들까지 키득거렸다. 대장간에 불을 넣던 덕구도 껄껄 따라웃었다.

“뭐가 그리 재미나요.”

물을 길어오던 덕구의 아내가 궁금한 표정으로 물어왔다.

오늘 새 식구 오려나 본데. 누구요? 경이 각시.

해가 산자락에 걸터앉아 이제 막 그 얼굴을 빼꼼 내보였다.

산을 내려가는 발걸음을 배웅하듯 타종소리가 은은하게 뒤를 따라왔다. 점점 그 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가늠하며 아란은 아직 새벽안개가 가시지 않은 산길을 천천히 걸었다.

이 산을 처음 올랐을 때 보았던 오래된 은행나무가 보였다. 메말라 보였던 가지 끝에도 얼마 후 움틀 준비를 하는 순들이 오돌도돌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암자에 머무는 동안에는 이상하게도 시간이 빨리 흐르기를 재촉하진 않았다. 이보다 더 오랜 시간을 홀로 보내오면서도 그랬듯이, 낙엽은 물들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기도 전에 이미 붉어져 있었고, 눈은 언제 내렸는지도 모르게 신발 콧등을 덮어두곤 한다는 걸 아는 탓이었다.

다만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이 비어만 가던 전과는 달리 아란은 눈보다 더 도톰하고 포근하게 제 마음에 쌓이는 무언가를 느꼈다. 뭐라 말로 하기 어려운 그 마음은 산자락을 내려와 저 멀리 일주문이 보이면서부터 설렘이 되어 제 몸을 감쌌다.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일주문 밖에서 말고삐를 쥐고 서있는 그 사람에게 다가갈수록, 아란은 먼 길을 돌아왔음에도 새로운 시작처럼 가슴이 벅찼고, 모든 게 변했지만 여전히 변함없는 그 모습에 평온해짐을 느꼈다.

“지나가는 나그네인데, 초행길이라 길눈이 어두우니 함께 동행해도 되겠습니까.”

더없이 정중하게 말을 걸어오는 현경의 눈망울엔 장난기가 가득 어려 있어 아란을 웃음 짓게 했다.

“초면에 어찌 낯선 이와 동행을 할 수 있나요.”

“이렇게 우연히 만난 것을 보면 예사 인연이 아니니, 함께 가기에 부족함이 없지요.”

“저는 꿈같은 곳에 기다리는 정인이 있어 갈 길이 바쁩니다.”

“그렇다면 마침 가는 길이 같네요.”

“어디로 가시기에 가는 길이 같다 말하십니까.”

“부인께서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아란은 소리 내어 웃었다. 현경도 따라 웃으며 말에 올라 아란에게 손을 뻗었고, 아란은 그 손을 단단히 잡고 말에 올랐다. 말발굽 소리가 숲길을 지나 널따란 들에 닿았다. 잔뜩 움츠리던 작은 어깨가 현경의 품에 기대어 왔다. 현경이 작게 웃어도 그 작은 들썩임이 아란에게도 전해져 왔다.

“우연히 만나 좋네요, 품이 참 아늑하십니다.”

“전에는 기대라 해도 그렇게 질색을 하시더니.”

현경이 한 손으로 아란의 허리를 끌어다 안았다. 고삐를 쥔 다른 한 손을 요령껏 놀리며 아란의 배 위에 둔 손을 꿈지럭댔더니 아란이 간지러운지 푸스스하고 웃었다. 배 위에 올려진 현경의 손 위로 아란이 자신의 손을 포개어 놓고선 작게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마을 입구에 도착하자 말에서 내린 아란이 마을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어렴풋했지만 기억 속 그대로 여전히 조용하고 한적한 마을이었다. 현경이 말꾼에게 말을 넘겨주고 아란 쪽으로 돌아오더니 주름진 아란의 치마를 툭툭 털어준다.

“갈까요?”

다정스레 함께 걸어 들어가는 사람이 있어, 아란은 고작 두 번째 온 곳인데도 낯설지가 않았다. 마을 안으로 들어서자 평상에 모여 앉아 있던 나이 지긋한 선비들이 마을로 들어오는 현경을 넌지시 보다 그 옆에 있는 아란을 알아보고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경이 각시 왔는가.”

“아이구, 현경이 각시 데려온다고 날아가더니, 이제 왔네.”

그 말에 건너편에서 이마에 땀을 훔치던 대장장이가 눈을 크게 뜨며 이내 두 사람을 반겼다. 그 걸걸한 목소리에 마을 사람들은 누가 왔다고? 하며 하나 둘 고개를 내밀었다. 아란은 그 살가운 환영이 나쁘지 않아 부끄러운 와중에도 자꾸만 웃음이 났다.

“우리 각시 닳겠네.”

이젠 간지러운 소리도 서슴없이 하는 현경의 말에 역시나 얼굴이 붉어지는 건 아란 몫이었다. 그 모습도 사랑스럽게 보며 웃던 현경이 마을 사람들 틈에서 빠져나와 아란을 데리고 골목을 나섰다.

“괜찮아요?”

“전에는 몰랐는데, 다들 씩씩하시네요.”

워낙 작은 마을이라 반상의 구분 없이 어울리는 마을 분위기에 혹여 아란이 당황했을까 현경은 걱정했다. 아란은 그저 현경을 따라 걷는 길목 끝에 대나무가 보이니 반가운 마음뿐이었다.

덜 녹은 눈 위에 늘어선 대나무 숲은 유난히 더 푸르게 보였다. 옛날처럼 저들끼리 가지를 부딪치며 내는 소리가 두 사람을 반겼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지 않으면 꼭 다른 세상에 와 있는 기분이 들었다.

“조금 늦었지만, 다시 왔네요.”

“부인과 다시 오고 싶었는데.”

“꿈에서도 그리 말하셨어요.”

“그랬나요.”

현경이 신기하다며 맑게 웃었다. 꿈에서도 그리던 곳, 서로에 대한 첫 기억을 나눈 곳에서 다시 마주한 두 사람은 남다른 감회에 젖어들었다. 바위 뒤에 숨어 저를 몰래 지켜보던 아홉 살 난 소녀는 훌쩍 자라서 더욱 깊어진 눈으로 아란을 바라보고 있었다. 분홍빛 치맛자락을 하늘거리며 고운 소리를 흥얼대던 열네 살 소녀는 이제 그 눈빛에 마음이 두근거렸다.

현경이 아란의 손을 끌어다 잡고는 그간 간직하던 그리움을 빼내어 아란의 손에 끼워주었다. 이제 늘 곁에 있을 것이기에 그 마음을 아란에게 맡겨두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야 붙어 있는구나.”

마치 하나의 옥돌을 깎아낸 것마냥 꼭 닮은 한 쌍의 가락지가 나란히 끼워진 것을 보며 아란이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듣고 조용히 웃던 현경이 작게 심호흡을 했다.

“옥은 그 영롱함이 천 년을 가도 변함이 없다 하지요.”

“…….”

“사람 마음도 항시 그러하다면 참 좋을 텐데.”

“허나 하루가 멀다 하고 시시때때로 변하는 것이 사람 마음 아니겠습니까.”

“만약 한 천 년을 살아도 변하지 않는 마음이 있다면요?”

“가벼운 흰소리가 아니라면, 그것 참 고운 마음이겠지요.”

“지금 제 마음이 그렇다면 부인께선 웃으실까요.”

“천 년이나 사시게요?”

아란이 장난스레 되묻는다. 현경은 진지한 얼굴로 다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농담이 아니었나 보네. 아란은 자꾸만 웃음이 났지만 현경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다음에 이어질 말을 얌전히 기다려보았다.

“그러면 백 년만 이렇게 살아보지요.”

“천 년이 백 년이 되었네요.”

“생각해보니 제가 신선이 아니라 천년은 좀.”

“이렇게 어물어물 백년가약을 하시고.”

아란은 작게 웃으며 현경의 손을 놓았다. 뒤를 돌아 사박사박 대나무 숲길을 걸어가는데, 바위에 걸터앉아 그 뒷모습을 가만 보던 현경은 아란이 썼던 시를 떠올린다.

“또 혼자 무슨 생각하셨어요.”

아란이 다시 돌아와 눈시울이 붉어진 현경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볼을 감싸자, 현경이 아란을 끌어안았다. 이제 더 이상 꿈속을 서성이지 않아도 된다는 그 말에 결국 아란의 눈가도 붉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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