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대가 있음에 (57)화 (57/63)

#57화

며칠이 지났을까, 오랜만에 현경을 찾아온 부실은 왠지 모르게 전보다 가라앉은 모습이었다.

“별당마님이, 글쎄…….”

지난 며칠간 집안이 발칵 뒤집혔던 이야기를 현경에게 늘어놓으면서도 ‘세상에, 이럴 수가!’와 같은 추임새며 한숨도 잊지 않고 폭폭 뱉어냈다.

“와, 사랑하는 이를 잊지 못해 떠난 거 아니에요.”

“그러게.”

“에휴, 선비님은 어쩐다.”

현경은 부실의 마지막 그 말은 흘려들었다.

아란은 생각보다 일찍 마을을 떠났다. 현경은 부실의 말을 잠자코 들으면서 이제 자기도 이곳을 정리하고 아란을 기다릴 준비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벌써 눈도 오기 시작했는데 어디로 가셨을라나.”

“모시던 분이 없어져서 너도 이제 심심하겠다.”

“그냥, 이제 별당 드나들 일도 없고 그래서 언니 보러 왔어요.”

“나 없으면 놀아줄 사람은 있니.”

“내가 언니 놀아주는 거죠, 뭔가 단단히 착각하시네.”

부실은 콧방귀를 뀌며 현경의 말에 대꾸를 했지만 이내 현경을 곁눈으로 보고는 슬쩍,

“언니도 어디 가요?”

하고 그 불안한 속내를 흘린다. 현경이 말없이 빙긋 웃고만 있자, 부실은 서운해 하다가도 이내 어깨를 으쓱거렸다.

“좋겠어요 다들, 나도 이리저리 여행이나 다녔으면.”

“떠돌이 신세가 뭐 좋다고.”

“언니는 어디로 가는데요?”

“음, 기다려야 할 사람이 있어서.”

“어디서 기다리기로 했는데요?”

“어, 그러게, 그걸 안 정했네.”

부실이 작게 혀를 쯧쯧 찬다. 그러고 보니 아란과 다시 만날 장소를 정하지 않았다. 아란이 머물 암자를 어찌 알아낸다, 현경이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럼, 언니는 언제 떠나게요?”

“이제 슬슬 떠나야지.”

“오늘 보고 못 보려나.”

“서운하니?”

현경이 손을 뻗어 부실의 머리를 쓰다듬으니 부실이 현경의 손을 퉁명스레 치워냈다. 매번 툴툴대긴 해도 현경이 없으면 제법 쓸쓸할 것 같아 부실은 시무룩해졌다. 괜히 곶감이 담긴 소쿠리를 발로 툭 차대는 부실을 보며, 현경은 부실의 손을 잡고 장난스레 흔들었다.

“부실이가 내 생명의 은인인데, 고맙다는 말을 이제야 하네.”

“치, 한참은 늦네요.”

“뭐 갖고 싶은 것 없어?”

“왜 다들 떠날 땐 그런 말을 해요?”

부실이 결국 속상한 마음에 울음을 터뜨렸다. 부실을 안고 어르며 현경이 고맙다 고맙다 말하니, 어린아이는 더 크게 울었다. 가지 말라는 말은 소용없다는 걸 아이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나 집에 가요.”

시무룩한 뒷모습으로 평소보다 일찍 방을 나서는 부실을 보며 현경이 따라 나섰다.

“마을까지 데려다줄게.”

평소 같으면 신나했을 텐데 마지막 배웅이라는 생각에 부실은 여전히 기운이 없어 보였다. 산비탈을 내려가는 내내 말없이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부실은 마을에 다다르니 제법 의젓하게 작별인사를 건넸다.

“잘 살아요.”

아마 나름 좋은 말을 골라했을 텐데 현경은 부실의 그 담백한 인사에 웃음이 났다.

“오냐, 너도 뜨끈한 밥 먹고 건강해라.”

현경이 빙긋 웃으니 그제야 부실도 표정을 조금 풀었다.

“참, 마지막이니 선물 하나 줄게.”

현경은 다시 산을 오르려다 말고 부실을 불러 세웠다. 그리고는 돌멩이 하나를 집어다 땅에 뭔가를 써내렸다. 뭔가 싶어 멀뚱히 그 모습을 보던 부실은 씨익 웃는 현경의 얼굴과 땅바닥에 쓰인 글자를 번갈아 보았다.

“자, 내 이름이야.”

“써놓으면 내가 어떻게 알아요.”

“나중에 너 크면 읽겠지. 아무튼 난 알려 줬다. 그냥 산에 살던 언니로 기억하면야 어쩔 수 없고.”

“하여간 심술은.”

“잘 지내.”

현경은 손을 흔들어 작별인사를 했다. 그 뒷모습을 보며 입을 쑥 내밀고 있던 부실은 다시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요 글자를 어디서 봤더라.”

어디선가 본 듯한 글자에 부실은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지난번에 별당마님이 써주었던 글자 중에 저거랑 비슷한 게 있었던 것 같은데. 어떻게 읽었더라?

“가앙, 현, 경, 어?”

부실은 순간 아란의 옅은 미소가 스쳤다. 급히 고개를 들어 현경을 보았지만 이미 나무들 사이로 현경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뒷머리를 긁적이며 쪼그려 앉아 다시 글자를 찬찬히 내려다보던 부실은 계속 머리에 맴도는 이름 석자에 계속 고개를 갸웃거렸다.

집에 돌아와 부엌으로 향하면서도 부실은 뜨거운 줄도 모르고 부뚜막 언저리에 걸터앉았다. 부엌은 저녁 준비가 한창이었다.

“집안 분위기 심란한데 또 어디 갔다 이제 오니.”

어미의 타박에도 부실은 멍하니 턱을 괴고 앉아 있었다. 어미는 분주한 와중에 바쁘게 손을 놀리며 소반이나 좀 닦으라 하며 행주를 쥐어 주었다. 부실은 설렁설렁 행주로 상을 차릴 소반들을 닦기 시작했다.

“별당마님은 어디로 가셨을까?”

“쓸데없는 말 말고, 행여나 주인어른 앞에서 그런 말 꺼내지도 말어.”

“어매는 옛날에 아부지 배타고 나가면 아부지 기다렸어요?”

“그야 얼굴 보는 날보다 기다리는 날이 훨씬 많았지.”

“그럼 어매는 어디에서 아부지 기다렸어?”

가마솥 뚜껑을 열어 다 된 밥을 확인하던 어매가 싱긋 웃는다. 하얗게 피어오르는 김이 부실 어멈의 얼굴을 가려 아주 잠시 보였을 뿐이라 부실은 조금 아쉬웠다.

“집에서 기다렸지, 바닷가에 마중 나갔다 같이 들어오기도 하고.”

부실은 두 사람을 나란히 떠올려 보았다.

“양반네들은 같은 이름이 흔하지?”

“뭘 들었기에 오늘 요상한 말만 하니.”

“어매는 맨날 나 하는 말마다 요상타 하지.”

그렇게 또 한동안 혼자 중얼거리던 부실은 금방 내일부터는 뭐하고 놀아야 하나, 따분한 고민으로 생각들을 거두었다.

해가 짧아 금세 어둑해진 하늘 위로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고, 집 안엔 구수한 밥 내음이 돌았다. 얼마 전 다시 쌓아놓은 담벼락 기와 위로 냄새를 맡고 찾아온 도둑고양이 한 마리가 걸터앉아 하품하듯 긴 울음소리를 내었다.

산자락에서 맞이하는 아침은 좀 더 점잖고 은은하게 퍼지는 물결처럼 조용히 밝아왔다. 잎사귀 하나 없이도 빽빽하게 들어찬 나뭇가지들이 산 아래의 모습을 가렸지만 맑은 하늘만은 온전히 트여 있으니, 고요하고도 활기찬 빛이 뜰에 가득했다.

귓가에 들리는 소리라고는 사부작거리는 자신의 발자국 소리나 산새들의 울음소리, 바람소리가 전부인데도 소복소복 쌓이는 눈 소리마저 크게 들려오는 새벽의 고요함과는 또 다른 느낌이 들었다.

어쩔 수 없이 떠나온 발걸음이긴 했지만 이곳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며 아란은 시끄러웠던 마음이 정리되는 듯했다. 암자의 좁은 뜰을 혼자 거닐며 새 소리를 듣거나 옛 생각에 잠기면 하루해는 금방 서쪽으로 저물어가고 잔잔히 들려오는 풍경소리도 어느덧 잠기운을 재촉하곤 하였다.

아침 예불을 드리고 나오는 비구니 스님이 뜰 안을 거니는 아란에게 다가왔다. 합장을 하며 인사를 한 아란에게 서신 한 통을 건네는 스님은 이내 그 인자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지난밤 산길을 지나던 시객이 불공을 드리고선 남기고 간 글입니다.”

“저에게 말입니까?”

아란은 궁금한 얼굴이면서도 선뜻 서신을 열어보지 못하고 망설였다.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스님은 고개를 조용히 끄덕였다.

“그 어두운 밤에도 얼굴빛이 환한 분이셨습니다.”

말을 남기고 타종을 하러 가시는지 스님은 다시 합장하고는 언덕으로 천천히 향했다. 아란은 소중히 쥐고 있던 서신을 들어 살며시 코끝에 대보았다. 왠지 이 작은 서신에서 그리움의 향이 나는 것 같았다.

방으로 돌아와 설레는 마음으로 서신을 펼쳐든 아란의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날도 어두운데 이 첩첩산중 외딴 암자엔 언제 다녀가셨을까. 조용한 암자에 이처럼 수줍은 연서를 남기고 가셨으니 이를 낭만이 있다 해야 할까. 행여 스님이 글을 보시진 않았을까 아란은 괜히 얼굴이 붉어졌다.

그 후로 찾는 사람이 없어 길도 제대로 나 있지 않은 작은 산속 암자엔 매일같이 불공을 드리러 오는 시객이 하나 있었다. 그 시객은 밝은 낮보다는 푸른 새벽이나 붉은 저녁 때 쯤 조용히 왔다 조용히 사라지기에 그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아란은 아침이면 선돌 위에 놓인 자신의 신발 주위만 포근한 것을 보고 시객이 다녀간 것을 알 수 있었다. 날이 얼어 꽃을 구할 수 없었다며, 꽃처럼 고운 글씨를 남기고 가는 날도 때때로 있었다. 아란은 그 시객의 발걸음이 지칠까 낮에 산책을 나가는 길이면 험한 돌을 치우며 매일매일 길을 쓸었다.

그러다 눈이 하얗게 쌓였던 어느 날엔가, 눈 대신 아란의 신발 위에 놓인 서신 한 쪽을 마지막으로 시객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정월 초하루에 새 날이 밝아오니

그 옛날 꿈같던 곳에서 그리운 목소리 기다리면

그대와 함께 봄을 맞이할 수 있을까’

아란은 창틀에 올려둔 손에 끼워진 옥가락지를 만지작거리며 어느덧 약조한 시일이 다되었음을 바람으로 느꼈다.

갑작스레 마을로 돌아온 현경을 알아본 마을 어르신들은 특별할 것도 없이 느릿하게 인사를 해왔다.

“경이 왔느냐, 과거 준비는 잘하고 있더냐.”

마을은 현경이 지나온 세월과 그간 겪은 고초들이 무색하리 만큼 변함없는 모습이었다. 세간에 떠도는 시끄러운 말들도 이 깊은 산골까지 닿지 않는지 이곳에서 현경은 돈후부 판관나리도 아니었고 대역죄인도 아닌 그저 오랜만에 다시 고향을 찾은 자식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현경을 맞이해 줄 아비가 없는 것이 다만 안타까웠다.

주인 없이 몇 년이나 방치되었을 초가집이 혹여 쓰러지진 않았을까 걱정하며 서둘러 언덕을 오르니, 현경이 살던 집은 사람의 손길이 살뜰히 닿은 듯 말끔했다.

마당에 나무 평상도 나무 기둥도 전부 그대로인데 부서졌던 문지방이며 찬바람이 들던 방문은 오히려 말끔히 수리되어 있었다. 다른 누군가가 사는 것일까.

“누구 계십니까.”

현경이 조심스레 소리를 내보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집 안엔 쌓여있는 먼지 한 톨 없이 깔끔했다.

방 안을 둘러봐도 열일곱 현경이 떠나온 그때 그대로인데, 이게 무슨 영문일까 싶어 현경은 마루에 앉아 멀뚱히 강무의 방 쪽을 돌아보았다. 금방이라도 현경이 왔느냐 하며 저 문을 열고 아버지가 나올 것 같았다.

현경은 마당에 나아가 어린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평상에 등을 대고 누워 언덕 아래로 뉘엿뉘엿 지는 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음이 울적해지려 했다.

“경이 게 있냐.”

언덕 아래에서부터 대장장이 덕구의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경은 몸을 일으켜 평상 아래로 내려왔다. 작은 술병 하나를 놓아두고 덕구가 평상 위에 걸터앉았다.

“아저씨 오셨어요.”

“밥이라도 맥여 보내려고 했더니 고새 집에 와있었구먼.”

“조금 이따 제가 해먹으면 돼요.”

“이제 고향에 내려와 지내는 거여?”

“예.”

“강무는…….”

“…….”

“결국 갔구먼.”

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 덤덤히 말하는 덕구의 말에 현경은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깊게 숨을 내뱉은 덕구는 술 한 모금을 들이키더니 대뜸 등을 돌려 턱짓으로 집을 가리켰다.

“느그 아부지가 너 온다고 잘 다듬어 놓으라 했지.”

“아버지가요? 언제요?”

“삼 년이 더 넘었지, 마을 떠나기 전에.”

“…….”

“어쩐지, 안 올 사람처럼 그러더니만. 진짜로 안 오네.”

덕구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술 한 모금을 더 들이켰다. 덕구의 머릿속에 그날따라 이상하리 만치 불안해 보였던 강무의 얼굴이 텁텁하게 떠올랐다.

“한동안 많이 웃는다 싶었더니.”

어쩌다 도성에서 현경의 서신이 오면 강무는 그 까무잡잡한 얼굴 위로 슬그머니 미소를 짓곤 했다.

뒤늦게 현경의 혼인소식을 마을에 전했던 강무는 마을 사람들의 타박에도 껄껄 웃었다. 딸 가진 양반네 하나가 먼저 사위로 찍어뒀는데 이런 경우가 어디 있냐며 술김에 강무의 멱살을 잡는 거친 장난도 웃어넘기며 그날따라 술도 흠뻑 취하곤 했었는데.

그러던 사내가 어느 날에는 파랗게 질린 낯빛으로 해가며 미친 듯이 말을 잡아타고 마을을 떠나는데, 대체 도성에서 보내온 서신이 뭐길래 저러나 덕구는 혀를 찼었다.

오래 지나지 않아 까슬해진 얼굴로 돌아온 강무는 완전히 분위기가 달라져 있었다. 현경이 크고 나서는 한껏 유해지고 부드러운 인상이었던 그가 다시 이 마을에 처음 왔을 때처럼 날이 선 눈빛을 하고 그 얼굴엔 언뜻 살기마저 도는 듯했다.

마을에도 내려오지 않고 집 안에만 하루 종일 있던 강무는 덕구를 불러 집을 수리하기 시작했다. 부서진 처마와 낡은 문을 말끔히 수리했다. 쌀독을 채우고 땔감을 사다 광을 채워놓았다. 하지만 오히려 강무의 눈은 어딘가 텅 비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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