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대가 있음에 (56)화 (56/63)

#56화

“흠흠, 계시오.”

“뉘쇼.”

“지나가던 나그네인데, 이곳 별당에 뛰어난 시객이 계시다기에 뵙고 싶어 왔소.”

지난번 시문회 때 자신을 내쫓았던 노복이 나오자 현경은 잠시 당황했다. 하지만 곧 어디 이번에도 한 번 쫓아내 보시지, 하고 괜히 눈에 힘주어 부릅뜨고 노복을 노려보았다.

다행히 기억을 못하는지 현경을 시큰둥하게 보던 노복은 잠시 기다리라 하고 대문 안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대문이 열리고 노복이 별말 없이 현경을 별당으로 안내했다. 생각보다 너무 쉽게 별당으로 바로 들어가는 것에 오히려 현경이 머뭇거릴 정도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낯선 이들도 아무나 이렇게 바로 별당에 들어갈 수 있는 건가, 현경은 기분이 조금 언짢아졌다.

노복이 방 안의 아란에게 손님이 왔음을 고하자, 현경은 노복의 안내에 따라 별당 안으로 들어섰다. 얼씨구, 문도 이렇게 쉽게 열어주고. 현경은 여전히 꽁한 표정으로 방 안으로 걸어갔다. 아란은 현경을 보고도 놀라는 기색 없이 보료 위에 다소곳이 앉아 현경을 기다리고 있었다.

며칠 못 본 사이에 더욱 고와진 자태엔 완연한 여인의 아름다움이 흘렀다. 연모하는 사내라도 있는 것 마냥 얼굴이 핀 것이 살결도 더 고와진 듯하고 표정도 밝았다.

“오셨어요.”

“그새 얼굴이 더 피셨어요, 숨겨둔 서방이라도 있으신가.”

현경이 입을 비죽 내밀고 툴툴대니, 아란이 그저 얼굴을 붉히며 웃는다.

“헌데 아무나 이리 쉽게 방 안에 들이고 그러시면 어쩝니까.”

“당신 오셨다는데 아무나라뇨.”

시큰둥한 표정이던 현경이 당신, 하는 소리에 입꼬리를 씰룩거린다. 토라진 티를 내려 하는데 역시 아란 앞에선 영 쉽지가 않다.

“마을 어귀서부터 그 발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뫼시라 하였지요.”

“또 놀리지 마시고, 정말로 어찌 아셨습니까.”

괜히 콧바람만 흥흥대는 현경이 귀여워 아란은 겨우 웃음을 참았다. 어찌 알긴, 노복이 말을 전해오기를,

“얼굴이 희끄무레하고 말하는 본새가 당돌하기 그지없는 자가 별당에 시객을 뵈러 왔다 합니다, 몽둥이질을 해 쫓아낼까요, 어찌 할까요?”

그 말이 어찌나 우습던지. 귀하신 분이니 정중히 모시라고 말을 하고도 아란은 방 안에서 한참을 웃었다. 현경에겐 그저 발소리만 듣고도 다 아는 수가 있다 말하니 계속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아란의 말대로 며칠 동안이나 얌전히 기다려 준 것도 기특한데, 이처럼 보내준 옷도 해사하게 차려입고 오니, 잔뜩 뿔이 난 얼굴로 심통을 부리는데도 아란의 얼굴에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뭐 혹시라도 이제 와 새서방 찾을 생각하시는 건 아니지요?”

“새서방이요?”

“그자는 나이도 많고.”

“…….”

“세상에, 부인도 있지 않습니까.”

“아.”

“저만큼 부인을 제일로 아껴 주지도 않을 거고.”

그래서 심통이 났구나. 부실이 하도 현경의 집을 드나드니 곧 알게 될 것이라 생각은 했지만, 역시 직접 말해주는 편이 나았으려나.

선비와는 다행히도 말이 잘되었으니 걱정을 덜었다 생각하여 대수롭지 않을 거라 넘기려 했던 것이 실수였다. 아란은 어쩌면 현경이 놀랐겠구나 하는 생각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현경은 아직도 인상을 구기며 중얼거리고 있다.

“아무튼, 그 자는 안 됩니다. 안 되지요, 그 누구라도.”

말하고 나니 더 분한지 현경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그 와중에 현경이 투정을 부리고 속엣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술술 늘어놓는 모습을 보니 아란의 마음이 왜 이리도 짠해 오는지. 별안간 옛기억이 떠오를 때가 있어 아란이 가슴을 쓸며 눈을 감았다 뜬다.

“미리 말씀 드리지 않아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었으니 제 잘못입니다.”

“…….”

“제가 이제 와서 다른 사내의 첩으로 갈 연유가 있겠습니까.”

“없지요, 제가 있는데요.”

“허나, 나라에 법도라는 것이 있으니 이를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법도…….”

“해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아란이 고개를 들어 현경과 눈을 마주했다. 현경은 아란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몰라 괜히 손바닥에 땀이 찼다. 눈망울엔 긴장한 빛이 역력했다. 아란은 그런 현경이 얼굴을 좀 더 오래 보고 싶어 한참동안 일부러 뜸을 들였다.

“암자에 들어가 잠시 머물고자 합니다.”

“암자요? 절에 들어가신다는 말씀입니까.”

“떨어져 있더라도 아주 잠깐일 겁니다.”

“부인!”

“기약이 있는 기다림이라면 즐겁지 않겠습니까.”

“…….”

“속세와 사슬을 끊고 훨훨 날아 갈 테니, 맞이하여 주시겠습니까.”

아란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현경은 조금 멍한 표정이었다. 또 다시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막막했지만,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을 내린 아란이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럼, 부모님께는…….”

현경이 조심스럽게 꺼낸 말에 아란은 잠시 창밖을 보았다. 이미 여러 번의 불효를 했으나, 부모 자식의 연조차 끊어내는 큰 불효를 또 다시 앞두고 있으니 아란의 마음도 무거웠다. 그러다 아란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누군가의 첩으로 살아가더라도 친정부모를 만날 기회는 없을 터였다. 아란이 외숙부 댁에 내려올 때 이미 두 분은 마음을 비우며 오직 딸의 행복만을 바라고 저를 보냈으리라. 행여나 뒤도 돌아보지 말고 떠나라며 대문 밖으로 나와 보지도 않던 어머니는 아란의 가마가 골목을 채 돌기도 전에 그 얼굴 대신 흐느끼는 소리로 딸아이를 배웅하였다.

“다른 방도가 여의치 않으니, 그리 결심하셨겠지요.”

현경이 해줄 수 있는 말이라곤 그것이 전부였다.

현경은 잠시 고민하며 뜸을 들이다 아까부터 손에 꼭 쥐고 있던 것을 아란에게 꺼내 보였다. 연한 푸른빛이 도는 옥가락지 한 쌍이 현경의 손바닥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이게 무엇입니까?”

“지난날 버릇없다 하셨기에 다시 한 번 멋지게 하려 했는데.”

옥가락지만 내려다보던 현경이 아란과 눈을 맞추었다.

“지금 드려야 할 것 같네요.”

현경의 곧고 가지런한 손이 제 손을 살며시 잡아왔다. 가만히 엄지로 아란의 손등을 쓸다가 또 다시 눈을 맞춰오며 빙긋 웃는 모습에 아란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임자가 있다는 뜻이니 절대 빼시면 안 됩니다.”

현경이 가락지 한 쌍을 아란의 손에 끼워 주는데, 아란은 그중 하나를 빼내어 현경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다른 하나는 돌아오는 날 받겠습니다.”

“원래 두 개가 한 쌍인 것인데.”

“떨어져 있는 동안, 임자가 있다는 뜻이니 절대 빼시면 안 됩니다.”

현경의 말을 흉내 내며, 아란은 그 새뜻한 손에 옥가락지를 끼워 주었다. 각자의 손가락에 끼워진 옥가락지는 만질 수 있는 둘만의 약조가 되어 있었다.

“또 우시려구요?”

“아뇨, 제가 언제요, 안 웁니다.”

현경이 붉어진 눈시울로 코를 훌쩍였다. 아란도 따라 코끝이 찡했다.

“이번엔 정말 금방입니다.”

“…….”

“끼니 거르지 마세요, 몸 상합니다.”

“날 어두울 땐 산길이 위험하니 조심하세요.”

잊은 말은 없는지, 한마디라도 더해 주고 싶은 마음에 말을 골랐지만 정작 이 마음을 다 표현할 만한 말이 없었다. 아쉬운 작별인사를 마치고 별당을 나오면서 현경은 손 안에 아란의 온기를 놓치고 싶지 않아 주먹을 꽉 쥐었다.

아란은 외숙부가 돌아오시기 전에 떠날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이곳에 내려와 지내는 동안 방 안에는 자신의 흔적이 많이 남지 않았다. 너무나 단출한 봇짐 하나를 깨끗한 천에 잘 감싸고 떠나기 전에 아란은 외숙부와 외숙모께 감사와 안녕을 바라는 글을 남겼다.

“별당마님, 저 부실입니다.”

서신을 보료 위에 놓아두고 방을 나서려는데 밖에서 부실의 목소리가 들렸다. 짐을 병풍 뒤에 살짝 숨겨두고 아무 일 없는 듯 방 안에 부실을 들이니, 방 안을 힐끔거리며 들어오는 게 현경이 왔다갔음을 아는 모양이었다.

“그냥 마님 뭐하고 계시나 궁금해서요.”

“응?”

“언니가 울면서 나가길래.”

울지 않으신다더니. 아란이 짠한 마음에 손에 끼운 옥가락지만 매만졌다. 아란은 표정을 가다듬으며 앞에 앉은 부실을 가만 바라보았다.

“부실아, 혹시 갖고 싶은 게 있니.”

“예? 갖고 싶은 거요?”

“응, 이 방에서 마음에 드는 게 있거든 말해 보렴.”

“여기에 제가 가질 만한 게 있나요 뭐. 근데 왜 그러셔요? 꼭 어디 떠나시는 분처럼.”

“내가 매번 부리기만 했지, 해준 게 없는 것 같아서 그러지.”

“별 말씀을 다 하셔요, 어매는 제가 마님께 너무 까분다 하는데.”

“귀여운 말벗이 생겨 즐거웠단다.”

“아유, 간지럽게.”

부실은 장난스레 팔을 쓸어내리면서도 내심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아란의 표정이며 말투가 꼭 마지막 작별인사 같아서. 선비의 소실로 들어가는 날이 벌써 잡혔나 보다 짐작한 부실은 조금 섭섭해지려 했다.

첩살이가 어찌 즐겁기만 하겠느냐마는 별당마님이 많이 웃었으면 하고 부실은 제법 어른스러운 생각을 했다.

“마님, 그럼 물건 말고, 저 글자나 가르쳐 주세요!”

“글자?”

“쓰는 건 어렵구, 그냥 제 이름이라도 읽을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요.”

아란이 흔쾌히 그러마 하고 웃었다. 아란이 한 글자씩 부실의 이름을 천천히 써주자, 신기한지 두 볼이 발그레한 채로 옆에 앉아 있는 모습이 귀여웠다.

“아부지가 물고기 이름으로 지어 놔서 내가 맨날 촐랑거리는 거라고 어매가 그랬어요.”

“그럼, 재물 부에 열매 실 자 쓰면 되겠다, 재물도 많고 튼실하라고.”

“그런 글자가 있어요?”

“부실이 좋은 이름이었네.”

신난 부실이 그 옆에 제 어머니와 아버지 이름도 써달라고 했다. 마치 소중한 보물이라도 되는 양 가족의 이름이 적힌 종이를 꼭 접어 품에 넣는 부실은 들떠 보였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던 아란도 품에 간직할 그리운 이름들을 한 자씩 써보았다.

아버지, 어머니의 이름을 쓰는 것만으로 아란은 마음이 울컥하였다. 보내지 못할 편지를 대신하여 붓끝으로나마 마음을 달래었다. 아란이 찬찬히 써내리는 글자들을 물끄러미 보던 부실이 하나씩 짚어가며 무슨 글자인지 물었다.

“요 글자는 어떻게 읽어요?”

“이, 제 자 현 자. 우리 아버지셔.”

“아, 이 글자는요?”

“음, 이건 너도 알아둬야겠다. 김, 중 자 호 자.”

“김중호. 아, 주인어른 함자를 이리 쓰시는 구나.”

부실이 고개를 끄덕이며 눈망울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마지막에 쓰인 글자를 짚으며 물었다.

“그럼 이 글자는 어떻게 읽어요?”

“강, 현경.”

“강현경, 이분은 누구예요?”

“…….”

부실이 고개를 드니 아란은 부실과 눈을 마주치며 그저 애틋한 미소만 지을 뿐 대답이 없다.

“들어본 적 없니?”

“네, 처음 듣는데, 아 혹시 돌아가셨다던.”

부실은 혹여 제가 실수라도 한 것일까 입을 틀어막고 아란의 눈치를 살폈다.

“벌써 시간이, 어매가 찾겠어요.”

괜히 허둥지둥 종이를 챙기던 부실이 저녁상을 들여올 시간이라며 방문을 나서는데,

“부실아.”

등 뒤로 들려오는 아란의 다정한 목소리에 부실은 문득 발걸음을 멈추었다.

“지금처럼 씩씩하게 자라야 한다.”

아란의 목소리가 평소와 달라 부실은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을 보며 앉아 있는 아란의 그 모습이 마치 이곳에 온 첫 날 보았던 얼굴과 겹쳤다. 금방이라도 멀리 사라져 버릴 것 같은 얼굴. 부실이 고개를 끄덕이니 아란이 환하게 웃는다. 부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발걸음을 떼고 별당을 나섰다.

그리고 얼마 후 부실이 저녁상을 들고 별당에 돌아왔을 땐, 아란이 앉아 있던 보료 위에 작은 서신 한 통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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