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이게 얼마만이에요.”
“어제도 봤는데.”
“그건 잠시 스친 거지, 본 게 아니지요.”
하긴 어제는 담벼락에 기와를 새로 얹는다고 집안 노복들이 종일 담장에 붙어 있던 탓에 그야말로 현경을 스쳐 지나듯이 봐야 했다.
누가 자꾸 담에 손을 대는지 기와가 내려앉았다고 투덜대며 진흙을 치대는 노복들을 보며 현경은 마음이 조마조마해졌다. 그러면 아란은 그 모습을 별당에서 먼발치에서나마 지켜보며 애처로운 현경과 눈인사만 겨우 할 수 있었다.
이제 막 방에 들어와 앉았는데도 손을 잡아오는 현경의 얼굴은 벌써부터 아쉬움이 뚝뚝 흐른다.
“내 부인인데, 어찌 얼굴도 마음대로 못보고 이렇게 손도 마음 편히 못 잡아요.”
“그러게 누가 저를 생과부로 만들어서 그렇지요.”
“해 지거든 담 넘어 보쌈이라도 해와야지.”
“저 둘러업고 담 넘을 기력이나 있으실지.”
아란은 현경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예전의 소년 같던 얼굴이 간데없고 마냥 곱디고운 여인이 앉아있는 듯했다. 현경이 열일곱에 혼인을 했으니 어느덧 그 나이도 스물이면. 잠시 현경의 나이를 가늠해 보다 아란이 잔잔히 웃었다. 그런 아란을 따라 현경도 싱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무슨 생각을 하시기에 이리도 곱게 웃으세요.”
“이젠 서방님 소리를 하려니 영 어색할 것 같아서요.”
“그럼 현경아, 하고 부르면 되지요.”
“그러다 부실이가 알면 어쩌지.”
“우리 먼 데로 도망갈까요?”
현경이 키득거렸다. 개구쟁이처럼 천진하게 웃는 그 얼굴을 보고 있으면 아란도 현경과 함께 숨어 버리고 싶었다. 오직 우리 둘만 있게.
“둘이서 책도 보고 꽃도 보고 살게.”
“당신이랑 손잡고 대나무 숲에 산책도 가고.”
아란이 하는 말은 현경을 들뜨게 했다. 지금처럼 잔잔하던 그 마음을 콩콩 뛰게 만들고 웃음 짓게 했다. 아란의 손끝을 장난스레 꾹꾹 눌러대며 현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 좋다.”
빗방울이 멎자, 노복은 마루 위로 올라와 들문을 올려 걸어두었다. 비에 젖은 마당에서 올라오는 흙내음이 제법 마음을 차분하게 했다.
“말씀대로 아내가 참으로 좋아하더군요.”
“다행입니다.”
“고맙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어서 이렇게 뵙고자 했소.”
“시를 짓고 읽어 드린 분은 선비님이지 제가 아닙니다.”
“한, 십 년 만인 듯하오, 아내가 웃는 걸 본 지가. 이 정도면 인사를 드려도 되겠소.”
아란은 선비의 아내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외숙부에게서 전해 들었다. 종이품 무관출신의 외아들로 명망 높은 집안이었지만 선비는 그 인자한 얼굴 안에 늘 그늘이 있었다.
오랜 시간 학문에 뜻이 있어 혼사를 미루다, 늦은 나이에 참한 여인을 만나 혼인을 했다. 슬하에 자식들은 모두 태어난 지 다섯 해를 넘기지 못하고 명을 달리하니, 원체 몸이 약했던 아내는 병을 얻어 웃음마저 잃었다. 집안에서는 여전히 대를 이을 아이를 원한다고 했다.
“아내는 첩을 들여 후사를 보라 하지만.”
“…….”
“꼭 후사를 바라는 것이 아니오.”
선비는 때때로 작게 한숨을 쉴 때마다 턱을 쓸었다. 그 모습이 어딘가 머뭇거리는 듯 보였다.
“최근엔 아내의 병세도 나아지고 있고 또 아직 아내는 어리니.”
“병세가 많이 호전되셨다니 다행입니다.”
“솔직한 속내를 말하자면.”
“…….”
“부군을 여의고 소실로 들어간다는 것이 어찌 기꺼울 수 있겠으나, 그래도 남은 삶 동안 글동무나 하며 함께 지내면 나쁘지 않을 듯싶소.”
선비는 아란이 아닌 마당 쪽을 내다보며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아란의 마음이 작게 일렁이며 미루고 미루었던 결심이 섰다.
“여생을 함께하자는 청을 받을 수가 없겠습니다.”
“따로 마음에 품은 사람이 있소?”
“마음이 그리 넓지 않아 평생을 약조한 분만을 품을 뿐입니다.”
“평생 수절하여 돌아가신 분을 따르겠다는 말이오?”
“다시없을 인연인지라, 그 인연이 돌고 돌아 다시 만났다 하면 믿으시겠습니까.”
“이해하기 어렵군,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오지 않는 한 어찌 믿겠소.”
“제 말이 허황되다 하신들 어쩔 도리는 없지요.”
아란의 말이 재밌는지 선비가 낮게 웃었다. 그리곤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잠시 마룻바닥을 가만히 바라보다 고개를 들었다.
“믿는 것으로 하지. 허면 다시 만나게 된 그 인연과 함께할 생각이오?”
“물론입니다.”
“허나 과부가 재가하지 않으면 추포하여 관비로 삼도록 되어 있소.”
“멀리 달아나 숨어 버린다면 구태여 찾겠습니까.”
“다시없을 인연과의 여생인데 그리 불안해서야 되겠소.”
“선비께서는 좋은 방도가 있다 여기십니까.”
“좋은 방도인지는 모르나, 내가 잘 아는 방도가 하나 있소.”
마주앉은 선비는 허풍을 떨거나 거짓을 말하는 자로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어째서 자신의 말을 기꺼이 믿고 도움을 주려 하는지 그 이유가 아란은 궁금했다.
“나는 사람들의 기록을 지우는 일을 했었는데.”
“…….”
“나는 그 일이 속세와 연을 끊었거나, 행방불명이 되었거나, 죽은 사람들을 위해 세상과의 목줄을 풀어주는 일이라 생각했소.”
“목줄.”
“어떤 사람들은 세상에 드러나면 운명의 굴레에서 헤어 나올 수 없기도 하오. 그런 사람들은 사라짐으로써 살아가게 되겠지.”
“…….”
“아내가 해준 말입니다.”
“아내분께서요.”
“내 아내는 사실 무당의 딸이었소.”
선비는 빙긋 웃었다. 여태 보았던 선비의 표정 중 가장 후련해 보이는 것 같다고 아란은 생각했다.
“속세의 기록에서 사라진 사람들은 다시 태어나는 것과 같다고 하더이다.”
“…….”
선비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는 손가락을 몇 번 짚더니 조용히 말을 이었다.
“아마 두어 달 정도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무엇이 말입니까.”
“재가한 후에 속세를 떠났다 하면 관아에서 따로 쫓지는 않을 것이고, 다만 한 달의 말미를 두어 확인 정도는 할 겁니다.”
“그럼 저는 어찌하면 됩니까.”
“내 아내가 불공을 드렸던 작은 암자가 하나 있습니다. 그곳엔 비구니 스님 한 분이 계시고, 세상의 경계에 선 자들만이 스쳐 지나는 곳이지요. 그곳에 머물고 계시면 됩니다.”
“저 또한 세상의 경계에 선 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군요.”
“한 달은 관아의 눈을 피하고, 또 한 달은 그쪽의 기록을 지우는 기간이 될 것 입니다. 그 후에는 속세 밖의 사람이 되는 것이지요.”
“그 말씀인즉, 제가 죽은 사람이 되는 겁니까.”
“그것과는 좀 별개입니다. 생각하기 나름이지만, 그저 속세에서의 기록이 지워지는 것뿐이라고도 볼 수 있지요.”
“지워지는 것뿐이라…….”
“부모께 불효하는 것이 마음에 걸리는 것이라면, 평생을 쫓기거나 노비가 되는 것보단 낫다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내가 아는 가장 나은 방법입니다.”
“…….”
“고마운 마음에 보답이 될 수 있길 바라오.”
선비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란에게 가볍게 목례를 했다. 마루를 내려가던 선비는 깜빡 했는지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아란을 보았다.
“다시없을 인연 분께서는 혹 나의 존재를 아시오?”
“글쎄요.”
“모르시는 게 좋을 듯한데.”
선비는 골똘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아란은 선비의 말에 아리송한 표정이었다.
현경은 생각할수록 속에서 열불이 났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그러니까 그날 현경이 봤던 그 선비는 같이 이야기를 나눈 것도 모자라 아란을 첩으로 데려가려고 하는 놈이란 말이었다. 현경은 부실의 말을 곱씹으며 씩씩거리고 있었다.
“그러니 우리 어매 명줄 긴 지아비 만나라고 할머니가 비나이다 비나이다 했대요.”
“이 무슨 극악무도한 법이 다 있어?”
“나라의 법도가 그렇다는데 어쩌겠어요.”
집에 손님이 와계시다며, 부실은 현경에게 아란이 함께 오지 못한 이유를 설명했다. 물론 그 설명의 대부분은 선비에 대한 이야기였다.
“풍채 좋고 인물도 훤하시죠. 주인어른하고 오래 알고 지내셔서 나도 좀 아는데, 워낙 점잖고 훌륭…….”
“점잖은 다 얼어 죽었나, 멀쩡히 부인을 두고 첩이나 들이는 게.”
잔뜩 날이 선 현경의 말투에도 부실은 그저 오늘 현경의 기분이 좋지 않은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나이는 또 왜 그리 많아.”
“전에 돌아가신 남편 분이 나이가 되게 어렸다나 봐요.”
“되게 어리진 않았을 텐데.”
“참나, 언니가 우리 별당마님에 대해 나보다야 알아요? 어쨌든 또 사내의 중후함이란 게…….”
“너 그놈 얘기 계속할 거면 그만 집에 가라.”
“놈이라니! 이 언니가 큰일 날 소리하네!”
현경은 울고 싶어졌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로 눈물이 찔끔 났다. 정말 당장 가서 아란을 둘러업고 와야 하나.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제 짝을 애먼 놈한테 빼앗길 판이라니, 상상도 못해본 일이다.
지금 아란과 함께 있다고 하니, 그놈 얼굴이나 제대로 봐둬야겠다 싶어 현경이 서둘러 나갈 채비를 했다.
“아 참, 언니가 계속 성질내서 깜빡할 뻔했네. 별당마님이 이거 전해 주래요.”
“뭔데?”
“몰라요, 말로 전해 주시지. 치사하게 글로 쓰시고.”
부실은 반듯하게 접힌 서신 하나를 내밀었다. 서신의 내용이야 짧고도 간결했다.
莫悄冬風冷 겨울바람 차다고 근심하지 말고
閡鏂邀皒鳥 문고리 걸어 잠가 흰 새나 맞이하게.
걱정 말고 집에 얌전히 있으라니 현경은 아란의 서신을 받고도 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현경이 선비에 대해 알게 되면 분명 길길이 날 뛸 것을 알고, 아란이 일부러 보낸 글 같아서 오히려 더 바짝 약이 올랐다.
결국 분하지만 그날 하루를 간신히 버티고, 이틀이 더 지났다. 부실에게 잔뜩 심통을 부려놨더니 요 며칠 부실도 나타나지 않았다. 현경은 점점 피가 마르는 것 같았다.
“누더기든 거적때기든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있나.”
도저히 못 참겠다 싶어 현경은 자리에서 일어나 급히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며칠간 아란의 말대로 집 안에 얌전히 있느라 그새 바람이 더 차가워진 것도 미처 몰랐다.
비탈을 내려가다 말고 온몸의 마디마디가 얼어붙는 것 같아서 그냥 다시 돌아가야 하나 현경이 걸음을 멈추고 손 모아 입김을 불고 있는데, 저 아래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올라오는 부실이 보였다.
부실은 하얗다 못해 파래진 현경을 발견하고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쯧쯧 혀를 차며 현경을 도로 방 안으로 끌고 왔다. 그리고는 어깨에 매달고 온 보자기 꾸러미를 주섬주섬 풀어놓았다.
“그 차림으로 어딜 가려구요, 언니 그러고 마을 내려가면 처녀귀신인 줄 알고 동네 사람들 놀라 자빠질걸요?”
“이게 다 뭐야?”
“우리 별당마님은 맘씨도 고우시지, 바느질도 할 줄 모르는 언니를 어째 아시고 이렇게 옷도 보내시고.”
과연 부실이 펼쳐놓은 보자기에는 누비 도포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한눈에 보아도 아란의 솜씨가 돋보이는 옷을 내려다보며 현경은 언제 이런 걸 다 만들었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옆에서 부실은 자기가 하고 온 볼끼도 별당마님이 만들어줬다며 자랑을 했다.
“웬 사내 옷인가 했더니, 어차피 언니 장터 내려갈 땐 도포도 입으니까. 치마저고리 아니어도 괜찮죠?”
“응, 그럼.”
현경은 담자색 비단 도포를 조심히 들어 보이며 곳곳에 스민 아란의 손길을 눈으로 더듬어갔다. 현경이 넋 놓고 있자 부실이 한 번 입어 보라며 채근을 했다. 굳이 입어 보지 않아도 저에게 꼭 맞을 걸 알지만, 현경도 설레는 마음으로 저고리 위로 도포를 둘렀다.
“신기해라, 꼭 맞네.”
부실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현경은 내친김에 머리를 올려 상투를 틀고 형체만 남은 갓을 둘러썼다.
“가자.”
“어딜요?”
간식으로 챙겨온 곶감을 입에 물고 있던 부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별당마님께 감사인사 드리러 가야지.”
장터에 내려온 현경은 우선 새 갓과 가죽신부터 샀다. 아란이 해준 도포에다가 제법 멋들어지게 갖춰 입으니 현경의 얼굴이 해사하기도 했다. 이리저리 갓을 고쳐 쓰는 현경을 쭉 훑어보던 부실이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렇게 생긴 사내 있으면야 냉큼 시집 가버릴 텐데.”
“흠흠, 근사하다 그 말이지?”
현경이 일부러 잔뜩 점잔빼며 걷는 시늉을 하자, 부실이 현경의 팔에 매달려 장난을 쳤다. 서로 킬킬대며 장터를 돌아다니다가 현경은 방물장수 앞에서 걸음을 우뚝 멈춘다. 나무 판 위에 노리개나 비녀, 가락지, 빗 등을 늘어놓은 방물장수는 옆에 앉은 동네 아낙과의 수다에 여념이 없어 보였다. 부실이 얼른 가자며 옷소매를 잡아끌었지만 현경의 시선이 떠날 줄을 모르고 한 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나으리, 뭐 찾으시는 거라도 있으십니까요.”
“이거, 이걸로 주시오.”
“이거요? 이야, 귀한 걸 알아보시네. 헌데 요즘 같은 겨울에는 옥보다는 금이 더 좋은데. 어째, 보여 드릴까요?”
화려한 문양이 촘촘히 새겨진 금가락지를 꺼내어 보여주는 방물장수의 말에 현경이 잠시 솔깃하였으나, 그래도 왠지 모르게 반질반질한 민짜 옥가락지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냥 이걸로 주시오.”
방물장수는 아쉬운 듯 몇 번을 더 금가락지를 권하다가 포기하고 깨끗한 명주천 조각에 가락지를 싸주었다.
“웬 가락지? 누구 주려구요?”
“응? 그냥, 예쁘잖아.”
“하긴, 보통 옥가락지라 하기엔 참 예쁘네요, 색이 연한데도 영롱한 것이.”
“그치?”
현경이 히죽 웃으며 조심스레 가락지를 손에 쥐었다.
시장을 지나 아란이 머무는 집 대문 앞에 서니 부실이 현경을 돌아보며 말했다.
“난 저녁 준비해야 하니까 먼저 들어갈게요, 어차피 언니랑 같이 들어갈 순 없으니까.”
“그래, 별당마님 뵙고 내 알아서 갈게.”
“근데 별당마님 뵈려면……. 주인어른께는 뭐라고 하려구요?”
“그냥 동무 만나러 왔다고 하면 안 되나?”
“언니 그 차림을 하고선, 남녀가 유별한데 동무는 웬 말이래요.”
“뭐, 일단 들어가서 생각할래.”
부실이 먼저 대문 안으로 들어간 후, 현경은 손에 쥔 가락지를 바라보다가 다시 꾹 쥐고는 목을 가다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