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대가 있음에 (54)화 (54/63)

#54화

“무슨 생각하세요?”

“…….”

아란이 묻는 말에 현경은 한숨을 폭 쉬다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입을 꾹 다물었다.

“또, 또.”

현경의 어깨를 밀어내고 아란이 품을 빠져나가자 현경이 당황해 했다. 현경과 눈을 맞추던 아란이 제법 엄하게 말했다.

“말씀을 안 하시면 저는 모릅니다, 지금 이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아란이 현경의 가슴께를 꾹 찌르며 불만을 표했다. 현경이 몸을 움츠리며 애처롭게 아란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입을 다물고 계시면 또 저를 두고 사라지실까 봐, 겁이 납니다.”

심각한 아란의 표정에 현경은 슬그머니 아란에게 다시 팔을 뻗었다. 그 와중에 또 대답이 없는 현경이 얄미워 아란은 그 속을 알 수 없는 가슴팍에 이마를 대고 허리를 끌어안았다.

현경의 심장이 빨리 뛰는 게 이마 위로 느껴져 아란이 웃으며 살살 등을 토닥이니, 그 손길에 현경이 괜히 코를 훌쩍였다.

“우시는 거 아니지요?”

품 안에 있는 아란이 보는 것도 아닌데 현경이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부인께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들어 주실래요.”

더없이 정중한 현경의 목소리에 아란이 현경의 품을 더 파고들었다. 그리고 준비되었으니 시작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니 그 모습을 사랑스럽게 내려다보며 현경이 목을 가다듬었다.

아란에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막막한 마음에, 지난 며칠 동안 정리했던 말이었는데도 말문이 막혔다. 원래는 제대로 아란과 마주 앉아 말하려 했는데, 조금 전 방 앞에서 울음이 터져 버리는 바람에 기껏 정리했던 말들이 소용없게 되어 버렸다.

“음.”

현경은 눈을 감고 가만히 아란을 꼭 안고서, 담담하고 편안한 목소리로 그간 묻어둔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왕가의 성을 타고났으나 모두가 죽여야 한다고 했던 아이. 세상의 눈을 피해 그 아이를 친딸처럼 키웠던 사내. 멋모르고 세상에 고개를 내밀었던 아이가 감춰야 했던 것들. 그리고 끝까지 자신을 지키고 떠난 사내의 마지막을 마주한 뒤, 혼자 남은 아이가 보내온 시간들까지.

“모든 게 다 제 탓 같아요. 나만 없었으면 나만 아니었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왜 진작 말하지 않았냐고 타박하기엔 아란이 감당할 만한 일도 아니었다. 차마 그 마음을 헤아리기에도 버거운 운명을 스스로 짊어진 현경은 오죽 했을까. 따뜻하다고만 생각했던 현경의 품을 끌어안으니 유난히 작고, 또 가늘고.

“그런데도 늘 공허해지기 싫어서 계속 욕심을 부렸나 봐요. 제가 살아 있다고 자꾸 확인하려고.”

“…….”

“욕심이 과한 줄 알면서도, 도저히 못 놓겠어요.”

“더 가까이 다가서지 못하고 기다리기만 한 저를 용서하세요.”

아란의 마지막 말에 현경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그간 가슴 속에서 응어리져 숨을 억누르던 뭔가가 뜨겁게 녹아내리는 것 같아 현경은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

아란이 손을 뻗어 현경의 볼을 감쌌다. 아란의 손바닥 가득 얼굴을 부비던 현경이 문득 아란을 빤히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아란아.”

그 말에 아란은 눈이 접히도록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이제야 겨우 붉은 기가 좀 가신 현경의 코끝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리며 장난을 쳤다.

“너는 맨 처음 사귄 내 동무이자.”

“…….”

“또 평생의 동무이자.”

“…….”

“내 평생의 사랑인데.”

현경이 중얼중얼 말을 하는 동안 아란의 시선이 현경의 눈에서 코로, 코에서 입술로 천천히 닿았다.

“현경아.”

“응.”

“누가 청혼을 이리도 버릇없이 하니.”

“이미 혼인했는데 뭘, 이제 와 무르려구.”

제법 뻔뻔스레 대꾸하며 개구진 얼굴을 내미는 현경을 보고 아란이 조용히 미소를 짓는다. 다가오던 얼굴은 멈추지 않고 그대로 아란의 입술에 닿았다. 도장을 찍듯 입술을 꾹 맞대고 떨어지려 하니, 아란이 볼을 감싼 현경의 손을 가만 쥐었다.

“현경아.”

“응.”

“내가 너를 얼마나 미워했는지 모르지.”

“…….”

“너를 얼마나 그리워했는지도.”

“…….”

“내가 너를 얼마나 불렀는지, 모르지.”

현경의 손을 잡고 있으면 아란은 나뭇잎을 쥐고 있는 듯 새뜻하다 생각했었다. 잎사귀처럼 살랑거리며 제 손 위에 올려진 그 손이 신기해서 자꾸만 손바닥을 내려다보게 만들곤 했다.

“이제 부르면 언제든 올 거지.”

“어디 안 가고 옆에 있어야지.”

아란은 내내 눈길을 떼지 못했던 현경의 입술을 손끝으로 다시 불러보았다. 다시 찾아와 살며시 닿아오는 현경의 입술에 아란은 눈을 감았다. 입맞춤이 깊어질수록 입가에 걸리던 미소는 애달픈 간절함이 되어 다급히 서로를 찾았다.

차가운 새벽이 끝날 때까지 서로의 손길이 지나는 곳마다 뜨거움이 남았다.

이른 아침부터 복작거리는 부엌에 눈앞이 뿌옇도록 하얀 김이 모락모락 올랐다. 마당을 지나 아란이 슬쩍 부엌 쪽을 서성였다.

“마님? 이른 아침부터 부엌에 웬일이세요.”

부엌에서 일하던 부실 어멈이 아란을 보고 인사를 해왔다.

“아침상 준비에 혹시나 거들 것 없나 해서.”

아란이 수줍게 소매를 걷어붙이자 옆에 있던 부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괜찮다 사양하는 여종들 사이로 아란의 시선이 나물은 어떻게 볶는지, 국에 무엇을 넣는지 그 손들을 바쁘게 쫓았다.

부실 어멈은 아란을 보며 부엌에 들어올 일이 없는 양반가 마님이 웬일인가 했으나, 이내 새색시마냥 부엌을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는 그 모습에 이제 좀 기운이 나시나 싶어 내심 다행이라 여겼다.

주인어른 부부의 상이 먼저 나간 후, 별당에 들일 상을 차리는데 아란이 손수 하겠다 나섰다.

“마님, 그간 찬이 적으셨나 봐요.”

평소보다 밥도 푹푹 뜨고 찬이며 국도 듬뿍 담는 것을 보고 여종이 놀라 여쭈니, 아란은 그저 은근슬쩍 웃어넘겼다. 별당까지 아침상도 저가 들겠다는 걸 그것만은 도저히 안 될 것 같아 부실이 빼앗다시피 하여 아란 뒤를 따랐다.

“그나저나 이걸 혼자 다 잡수세요? 너무 많은 거 같은데.”

“입맛이 돌아서. 이제 나 주고 너도 얼른 가서 아침 들어라.”

“방 안까지 들일게요.”

“아니 괜찮아, 이따 상 물릴 때도 내가 가져다 둘 테니, 혹여나 들어오진 말구.”

부실은 오늘따라 평소와 달리 어딘가 허둥지둥하는 아란이 수상했지만, 순순히 아란에게 아침상을 넘겨주었다. 뭐, 나야 좋지. 부실은 어매와 함께 아침 먹을 생각에 신이 나 얼른 부엌 쪽으로 뛰어 들어갔다.

“휴.”

아침상을 들고 방 안으로 들어온 아란은 조심스레 문을 닫으며 그제야 한숨을 돌렸다. 방 안쪽에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현경이 누워 있었다. 조심스레 소반을 놓아두고 아란은 현경 옆에 가만히 앉았다.

깨워야 하나 좀 더 재울까 고민하는데, 현경이 잠에서 깨려는지 몸을 뒤척이기 시작한다. 이불 위를 더듬던 손에 바닥을 짚고 있던 아란의 손이 잡히자 현경은 눈도 뜨지 않고서 씨익 웃는다. 아란이 가만히 현경의 하얀 이마를 쓸어내리며 따라 웃었다.

“일어나서 아침 드셔야지요.”

현경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아침상을 두고 마주 앉은 이 모습이 새삼 애틋하여 뭉클한 마음이 들다가도, 꾹 눌러 담은 고봉밥과 사발만한 국대접을 보고는 금방 웃음이 났다. 수저가 한 쌍뿐이라 현경이 먼저 밥과 찬을 올려 아란에게 내민다.

“아, 하세요.”

“괜찮습니다, 전 나중에 먹어도 되니 먼저 드세요.”

“얼른요.”

수저를 든 손을 꿈쩍도 않고 있는 현경을 보며 예전에도 안 하던 행동을 하려니 아란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 결국 현경을 당해낼 수는 없어서 한술 받아먹으니, 현경은 신이 나서는 입을 막고 웃었다.

국 한술을 후루룩 뜨는데 현경이 사레가 들렸는지 기침을 해댔다. 아란은 깜짝 놀라 얼른 냉수를 건네주었다. 아침에 부실 어멈이 끓인 맑은 무국이 조금 심심한 것 같아 아란이 몰래 국 대접에다가 소금을 한 움큼 퍼 넣었는데 너무 많이 넣었나 싶다. 미처 간을 보지 않고 온 것이 생각 나 아란이 뜨끔해 하는 사이, 눈물까지 찔끔 보이며 현경이 숨을 몰아쉬었다.

“국이…….”

“소금을 조금 넣어봤는데요.”

민망한지 딴청을 피우는 아란을 보고 현경이 웃으며 마저 밥술을 떴다.

“밥이랑 같이 먹으니 좋아요.”

“저도 배우면 곧잘 합니다.”

아란이 뾰로통한 표정으로 현경이 마시다 남은 물을 국대접에 모두 부었다.

별당에서 함께 하룻밤을 보낸 후로, 마음 같아서는 이제 한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은데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서로를 그리는 애틋함이 날로 더해 갔다.

앞으로 어떻게 지내야 할지. 그저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살아 돌아왔더라는 말만으로 간단히 해결될 일은 아니었다. 현경의 이야기를 들은 후로는 더더욱, 아란은 도성에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았다. 도성에 계신 부모님께 불효인 줄은 알면서도, 도성으로 다시 돌아간다 해도 결코 전과 같을 수 없다고 생각한 건 두 사람 모두 마찬가지였다.

“언니, 별당마님 오셨어요.”

현경이 후다닥 방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실은 저 언덕 아래부터 올라오는 발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지만 티를 내진 않았다. 방문을 열자 부실이 보이고 그 뒤로 쓰개치마를 어깨에 걸친 아란이 서있었다. 그러다 결국 입이 귀에 걸릴 듯 저도 모르게 환해진 표정까지는 숨기지 못했다.

아란은 현경보다 바깥출입이 자유롭지 못하여 현경을 만나러 가기가 쉽지 않았다. 부실과 함께 산책을 핑계로 산을 오르는 것도 어쩌다 한 번이지. 매일같이 산을 오른다면 누구라도 이상하게 생각할 일이었다.

그러니 그나마 오가는 것이 자유로운 현경은 어떤 날은 사내차림으로, 또 어떤 날은 치마저고리 차림으로 마을을 오가며 아란의 별당이 보이는 곳을 얼쩡거렸다.

현경이 별당 쪽 담벼락에 붙어 목을 쭉 빼고 기웃거리면 나와서 기다리던 아란과 겨우 얼마간 눈이라도 마주치며 몇 마디하고, 그마저도 기회가 안 맞으면 서로 애만 태우다 하루가 다 지났다.

“별당마님이 약과 만드셨는데, 언니 좀 나눠주고 싶다 하셔서요.”

“아이, 뭘 이런 걸.”

부실은 지난번 산속을 헤맸던 날 이 후로 급격히 가까워진 두 사람이 신기하기만 했다. 게다가 요즘 들어 부엌살림을 배우는 데에 재미를 붙인 별당마님은 간식거리라도 만들면 넌지시 산책을 나가자 했다.

조금 전에도, 별당 안에서 행주질을 하고 있는 부실에게 대뜸 오늘도 산에 가는지 물어오던 별당마님의 목소리는 사뭇 들떠 있었다. 함께 가자고 하는 별당마님의 표정을 보며 왜 제 손등이 그리도 간질간질하던지.

어쨌든 아란이 가져온 약과를 야금야금 집어먹던 현경은 슬쩍 눈치를 보다가 부실의 팔을 툭툭 쳤다.

“이 맛있는 걸 얻어먹고 대접해 드릴 게 없네.”

“약과 맛 나는데, 뭐가 더 필요해요?”

“부실아, 너 내려가서 곶감이라도 좀 사올래?”

“얼씨구? 나도 손님인데.”

“여기, 남은 건 너 하고.”

“아이, 뭐 이런 걸 또. 얼른 갔다 올게요!”

“아니야, 천천히 와도 돼.”

부려먹지 말라며 칼눈을 뜨고 노려볼 땐 언제고, 부실에게 심부름 삯으로 한 냥을 더 쥐어주니 살살 눈웃음까지 지으며 문밖으로 쪼로록 나간다. 어째 버릇을 잘못 들인 것 같아 현경은 씁쓸한 표정을 짓다가 앞에 앉은 아란을 보고 금세 표정을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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