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대가 있음에 (53)화 (53/63)

#53화

날이 저물자 하나둘 멋지게 차려입은 선비들이 집으로 모여들었다. 마을 선비들이 모여 향회모임 겸 시문을 즐기는 모임이었는데, 오늘 따라 평소엔 잘 나오지 않던 회원들도 그 얼굴을 보였다.

참여한 선비들 중에는 머리가 희끗한 사람도 있었고 제법 젊은 사람도 있었다. 이 마을에서 김생원이라 불리는 아란의 외숙부는 이 모임을 주관하는 사람이었다.

조촐한 술상에 붓을 들어 담소를 나누던 김생원은 누군가 지난 망월장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자 어깨를 으쓱해하며 기분 좋아했다.

“그렇게나 자랑이 대단하던 자네 조카를 드디어 만나는 것인가.”

“내 자네들이라 특별히, 아주 간곡히 부탁해서 얼굴만 잠깐 비추라 했지.”

아란을 궁금해 하는 선비들의 성화에 외숙부는 마지못해 하는 척 노복에게 일러 아란을 데려 오라 했다. 아란이 마루 위로 오르자 선비들이 자세를 바로하고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내 조카, 아란이라고 하네. 다들 알다시피, 나는 시에 있어 남녀노소가 없다 여기는 사람이니, 혹여 자네들이 이 자리를 불편하게 여기지 않길 바랄 뿐이네.”

“불편이라니 당치도 않지, 망월장에서 장원을 하신 분 아닌가.”

“귀한 분을 뵈었으니, 제가 쓴 글을 한 번 보이고 싶소만.”

어떤 선비들은 준비해온 시를 아란에게 보였다. 그 시들은 직접 쓴 것이 아닌 돈을 주고 산 글이 대부분이었으나, 아란은 외숙부의 체면을 생각하여 아는 체를 하지 않았다. 시골 양반네들의 뜨거운 관심 속에서도 아란은 차분함을 잃지 않았으나 어딘가 착 가라앉은 분위기를 지울 수 없었다.

그러다 모임이 파할 시간이 되자 선비들은 아쉬움을 뒤로 하고 하나둘 가마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마루 위엔 아란과 외숙부, 그리고 한 선비가 남아 있었다.

“사람이 많아 겨를이 없었을 테니, 천천히 얘기라도 나누게.”

외숙부는 자리를 잠시 비웠고 마루 위에 아란과 선비만이 남았다.

“…….”

“이제야 제대로 인사를 드리오.”

선비의 말에 아란은 고개를 들어 그 얼굴을 보았다. 담소 중에 선비들의 얼굴을 거의 쳐다보지 않았기에 아란은 목소리를 듣고 조금 전의 기억을 더듬었다.

“망월장 시는, 정말 감탄했소.”

“예.”

선비도 자신이 지은 시를 읊으며 아란에게 조언을 구하던 사람이었다. 그럴 듯하게 겉치레 말만 가득하던 다른 선비들의 시와 달리 그래도 진정이 드러나게 시를 써서 아란이 후한 평을 줬던 선비였다. 그의 아내에게 바치는 시였다.

“나는 글재주가 좀 부족해서.”

한동안 말이 없던 선비가 먼저 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선비는 아란보다 열 살이 많았고, 아란의 외숙부와는 어려서부터 함께 공부하며 형님 아우 하는 사이라 했다. 시를 읽는 것은 좋아하나 글 솜씨는 그리 좋지 못하다고도 했다.

“조금 전의 시도 훌륭하셨습니다.”

“아내가 시 읊는 소리를 좋아하오.”

선비는 쑥스러운 기색을 보였다. 그의 아내는 글을 모르지만 시 읊는 선비의 목소리를 좋아한다고 했다. 아란이 그 말에 빙긋 웃었다.

“듣기 좋은 시였으니, 댁에 가셔서 들려 드리면 좋아하실 겁니다.”

“그렇담, 다행일 텐데.”

낮게 허허 웃으며 말을 하던 선비의 낯빛이 쓸쓸했다. 그 얼굴에 아란은 이 선비에게도 뭔가 사연이 있으리라 짐작했다. 분명 아내를 떠올리면서도 선비는 참으로 외로워 보였다. 단정한 수염을 매만지다 선비가 조심스레 물었다.

“실례지만 돌아가신 부군과는 얼마나 함께 하셨소?”

“반년, 정도 되었던 것 같습니다.”

“반년이라, 한 해도 함께 보내지 못했단 말이오.”

선비가 놀라 묻자 아란이 힘없이 웃었다. 참으로 짧았구나 우리는. 현경을 어딘가 이름 모를 작은 마을에서 재회한 후, 도성에 올라와 혼인하여 살았던 시간을 다 합쳐도 일 년이 되지 않는다는 게 아란은 우습고도 슬펐다.

“허허, 고작 그 시간에 어디 정을 나누기라도 했을까, 한 해도 함께 보내지 못하고 어찌 부부라 할 수 있나.”

“함께한 시간은 짧았지만, 평생의 연을 약조했으니 어찌 부부가 아니겠습니까.”

“평생의 연이라.”

“다시없을 분이지요.”

짓궂은 농담이라고 건넨 말에 아란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슬쩍, 악의가 아니었다 하는 말에 아란이 괜찮다고만 짧게 답했다. 선비는 잠시 아란의 얼굴을 빤히 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처음엔 그저 좋은 글동무나 되면 좋겠다 했는데, 이 말이 너무 경박하게 들리지 않길 바라오.”

“…….”

“탐을 내어 보고 싶은 분이오.”

“…….”

“다음에 또 뵙겠소.”

선비는 잠시 서서 아란을 기다렸지만, 아란은 고개를 들어 선비를 봐주지 않았다. 아쉬운 눈길을 남기며 선비는 공손히 목례를 하고 마당으로 내려갔다.

홀로 마루에 남은 아란은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마당에 나와 있던 노복이 주인어른을 불러올까 여쭈었으나, 아란은 피곤하여 먼저 별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별당으로 돌아와 자리에 앉은 아란은 아른아른 흔들리는 호롱불을 보며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죽었다 생각했던 현경은 살아 있었다. 살아 있었음에도 왜 한 번도 자신을 찾아오지 않았을까. 그 긴 시간을 혼자 두고 차마 죽지 못해 살게 해놓고 어디에 숨어 있었던 걸까. 살아 있다고 기별이라도 줬으면 그토록 피가 마르는 세월을 보내지 않았을 텐데.

그렇게나 절절하게 그리움을 담아 시를 쓴 사람이 다시 만나고도 왜 몸져누운 동안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을까. 혹시나 현경이 다시 사라져 버리기라도 했을까 봐 아란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아침까지만 해도 당장 현경에게 뛰어가려 했는데 지금은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아란은 왠지 가슴이 꽉 막힌 듯 갑갑했다.

별당 안의 호롱불이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란은 흔들리는 호롱불만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이대로 동이 트면 현경을 찾아 나설 생각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잠든 밤은 깊어만 가고 있었고, 새벽은 멀게만 느껴졌다.

그렇게 고요한 침묵 속에 생각에 잠겨 있던 아란은 문득 문 밖으로 들리는 작은 발자국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자박자박 울리는 발자국 소리는 조심스러웠고 다가오는 것을 망설이듯 점점 느려지더니 이내 발걸음 소리가 멈추었다. 아란은 왠지 그 발걸음 소리만으로도 심장이 터질 듯 뛰는 것이 현경이 와 있음을 느낌으로 알았다.

“주무십니까.”

문 너머로 들려오는 나지막한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분명 방 안의 불빛을 보고 왔음에도 저리 묻는 말이, 속상한 제 마음을 알고도 엉뚱한 말로 머뭇거리는 현경의 모습 같아 아란은 입술을 깨물었다. 얕은 한숨소리마저 들릴 만큼 적막이 흐르는 깊은 새벽에 달빛을 등진 그림자가 문 앞에 섰다.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밤이 늦었습니다, 누군가 본다면 소란이 일 것입니다.”

왜 이제야 오셨습니까, 왜 더 일찍 저를 찾지 않으셨습니까. 삼킨 뒤엣말은 아란의 마음속에서만 울렸다. 당장 뛰어나가 끌어안아 주기에도 모자란 마음인데 말은 왜 이리 모질게 나가는지 모를 일이었다.

어딜 가나 기죽는 법 없이 능글맞던 예전의 현경이었더라면 저 문 하나쯤이야 거리낌 없이 열고 들어와 저를 보며 환히 웃어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저 문 하나 넘지 못하고 망설이는 그림자가 얼마나 미워 보이는지. 현경은 문에 비친 그림자로도 어깨가 푹 내려앉아 있어 너무나 속이 상했다.

“오늘 시문회가 있다 해서.”

“…….”

“어쩐지 사람들이 많이 모였기에 그, 부인을 보려고 왔는데.”

“…….”

“제 차림이 좀 남루하여 그런지 들여보내 주지 않았습니다.”

“…….”

“계속 기다리다가, 몰래 담을 넘었는데.”

모임이 파한 지는 한참인데 이제야 찾아와 한다는 말이라면, 대체 얼마나 기다렸던 걸까. 그 말을 들으니 또 마음이 짠하여 혹시나 노복들이 심하게 문전박대를 하진 않았을까, 어두운 데서 담을 넘다 다치진 않았을까. 아란이 고개를 내밀어 보일 리가 없는 현경의 그림자 아래 발치를 살폈다.

아란의 대답이 없어도 꿋꿋하게 이어가던 현경의 말을 들으며 아란은 조용히 눈시울을 붉혔다.

“담을 넘고 보니 부인께서 웃고 계셨습니다.”

“…….”

“부인께서 다른 사람과 웃고 계시는데.”

“…….”

“제가 갈 수가 없어서.”

다른 사내와 그렇게 마주보고, 웃고 그러시면.

떨리던 목소리는 울음에 가까워졌고 스르륵 기다란 그림자가 주저앉았다. 그 모습에 아란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문 앞에 다가섰다. 아란도 그 그림자 앞에 천천히 주저앉았다.

손을 뻗어 그림자를 더듬다가 슬쩍 문을 밀었다. 끼익. 애처롭게도 열리는 문 너머에는 무릎을 꿇은 채 작게 움츠린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너무나 미운 사람인데, 실컷 미워하는 것마저도 못 하게 하니 그 마음 밖으로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다.

그 말갛던 얼굴이 울긋불긋 해지도록 눈물범벅이 된 못난 얼굴을 보고 있자니, 그제야 지난 시간 동안 아란이 혼자 아파했던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아파했던 건 자신뿐만이 아니었음을, 현경도 못지않게 간신히 살아왔음을 뒤늦게 헤아렸다.

“부인께서 저 없는 데서 그리 웃으시면, 전 어찌 해야 합니까.”

잔뜩 얼굴을 구기고선 울고 있는 현경이 여전히 어린아이 같아서 아란은 저도 따라 눈물이 흘러내리는 줄도 모르고 그만 웃어 버렸다.

어쩜 이리도 변함없는 사람이 다 있을까. 그 옛날 아란이 궁에 들어가기 전 날에도 현경은 이렇게 울음을 터뜨리더니. 마음을 몰라준다며 울던 그날에도, 가지 말라던 그날에도.

“이래 가지고 저 없이 혼자 어찌 사시려고, 아직도 이리 마음이 약하십니까.”

“부인이 여기 있는데, 혼자라뇨.”

아란의 말에 현경이 소매로 눈물을 훔치고 바싹 다가와 아란의 손을 찾아 꼭 쥐었다. 삼 년이란 세월을,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긴 시간을 서로 혼자 있게 두었구나. 아란은 현경의 손이 너무 차고 거칠어서 가만히 그 손만 쓸었다.

“제가 그랬었잖아요.”

“…….”

“이 얼굴은 웃으셔야 낫다고.”

아란의 혼잣말에 현경이 코를 훌쩍이며 아란의 말을 바로 알아듣지 못하고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다. 그 바보 같은 표정에 아란이 웃는데도 눈가에 가득했던 눈물이 따라 흘렀다.

이젠 정말로 누가 볼까 싶어 아란은 현경을 방 안으로 들였다. 현경이 추워하기에 아란은 얼른 이불을 꺼내었으나, 이상하게도 현경이 뒷걸음질을 쳤다.

“담을 넘느라 옷이 더러워요.”

그제야 남루한 현경의 옷차림이 아란의 눈에 들어온다. 입으나 마나한 거적때기 같은 도포에 틀만 겨우 잡힌 갓은 대체 어디서 주웠는지 그 행색은 말이 아니었다.

지난번엔 그래도 치마저고리 몇 겹은 입고 있었던 것 같은데, 나름 시문회에 끼어 들어오려고 일부러 도포를 구해다 입은 모양이었다. 날도 추운데 홑겹이 웬 말인가 싶어 아란은 현경을 붙잡아다 그 누더기를 벗기고 이불 안으로 밀어 넣었다.

“듣자 하니, 글 팔아다 번 돈은 뭐하시고 옷감이 이렇습니까.”

아란 앞에서 쭈뼛거리며 이불을 뒤집어 쓴 채 얼굴만 내놓은 현경이 머쓱하게 웃었다.

눈이며 코는 잔뜩 벌게진 채로 눈물콧물 범벅이던 얼굴이 배시시 웃기에 아란은 한숨이 나오려다가도,

“부인도 일루 오면 더 따뜻할 거 같은데.”

금방 마음이 녹아내리는 게 세월이 흘러도 어찌나 변함이 없는지.

아란이 웃저고리를 벗어 개어놓는 동안 현경은 얌전히 누워 그 모습을 눈으로 쫓고 있었다. 아란은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했지만 새삼 현경의 시선이 쑥스러워 치마 고름을 푸는 손이 느릿해졌다.

옷감이 스치면서 사락거리는 소리만이 조용한 방 안을 채웠다. 그 분위기가 은근하여 현경은 괜히 붉어진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등잔불을 끄고 돌아선 아란은 현경이 걷어준 이불 안에 얼른 들어와 누웠다. 기분 좋은 온기가 옆에 있다는 게 까마득한 옛일처럼 느껴져 가슴이 뛰었다. 아란은 어둠을 틈타 현경의 얼굴을 좀 더 보고 싶었지만 이불을 덮어주며 품안 가득 끌어안는 통에 현경의 품에 기대어 있는 것으로 대신하기로 했다.

“제가 많이 미우세요?”

그걸 말이라고. 대답이 없어도 아란의 거센 콧바람이 목덜미를 훅훅 때리는 것 같아 현경이 작게 웃었다.

조금 전, 아란의 서늘한 목소리를 들었을 땐 얼굴도 못 보고 쫓겨날 줄 알고 얼마나 조마조마했던지. 날은 춥고 오밤중에 담을 넘는 건 또 오랜만이라 땅바닥에 한 번 구르니 서럽고 아팠다. 그렇게 겨우 담을 넘어 왔는데, 마루 위에서 아란이 낯선 사내와 둘이 앉아 있는 모습에 그야말로 억장이 다 무너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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