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대가 있음에 (52)화 (52/63)

#52화

“언니.”

문밖 너머로 부실의 목소리가 들렸다. 벌써 시간이 이리 흘렀나. 돌아보니 문틈으로 붉은 노을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방문으로 열고 들어온 부실의 손에는 손바닥만한 약재가 한 첩 들려 있었다.

“마님은 깨어나셨어요?”

“응.”

“언니 얼굴이 왜 그래요? 눈도 빨갛고. 언니도 아파요?”

“아냐, 지금 가야 하니?”

“아 맞다, 해 지니까 어서 돌아가야 해요.”

아란과 현경은 서로를 가만 바라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수많은 말이 오가는 눈빛이었다. 현경이 아란의 손을 조심히 쥐면 아란이 엄지로 그 손등을 쓸었다.

“그럼 일단 내려가셔야…….”

“네, 이거 혹시나 해서 챙겨 왔는데…, 이 집에 약탕기가 있을 리가 없겠죠?”

집에 돌아가서 달여야겠다하고 부실은 방문을 열었다.

“찬바람 들어오니 살살 열어라, 뭘 그렇게 서둘러.”

“해 금방 지잖아요, 얼른 가야 해요.”

현경이 서운한 소리를 하니 부실이 오히려 더 재촉했다.

“아, 마님 신을 안 챙겨왔네.”

부실이 뒤늦게 제 이마를 콩콩 때리며 중얼거렸다. 어제 잃어버린 꽃신 한 짝은 결국 찾지 못했다. 맨발로 내려가기엔 산비탈에 돌이 많았다.

“언니 짚신이라도 잠깐 빌려 줄 수 있어요?”

“응.”

현경이 착잡한 표정으로 선돌 위에 다 해진 짚신을 내려다보고 머뭇거렸다. 방문턱을 내려오는 아란이 어지러운 듯 조금 비틀거렸다. 결국 보다 못한 현경이 다가가 등을 보였다.

“업히세요.”

그런 현경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아란의 눈가가 다시 붉어지는 듯했다.

현경은 아란을 업고 조심조심 산을 내려갔다.

행여 아란이 어지러울까 내딛는 발에 힘을 주어 현경은 아주 천천히 걸었다. 저 만치 앞서가던 부실이 느릿느릿 걷는 현경더러 조금만 서두르라고 재촉했지만, 현경은 그 말을 못 들은 체하며 모든 신경을 오직 아란에게만 쏟았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아쉽다 느껴져 현경의 발걸음이 자꾸만 느려진다. 현경의 등에 업힌 아란도 아무 말 없이 끌어안은 어깨 너머로 현경의 발걸음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어찌 해야 하나. 어찌 되려나. 묻고 싶은 건 많았지만 조금 전 이 작은 등을 내보이던 현경의 뒷모습이 안쓰러워 아란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저, 이 순간이 꿈이 아니라는 것만이 새삼스레 자꾸만 벅차올랐다.

“그러고 보니 우리 부인, 업어준 적은 처음이네.”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현경의 목소리에 아란은 또 다시 터지려는 울음을 참으려 현경의 어깨를 바싹 끌어안아 얼굴을 묻어야 했다.

아란을 생각할 때면, 중얼거리던 혼잣말도 시가 되던 때가 있었다.

아란을 떠올리며 써내려간 글로 어두운 새벽은 금세 아침이 되었고, 이름을 부르면 돌아보는 그 얼굴에 위안을 받았다.

반년도 안 되는 시간을 함께했고, 삼 년이란 세월을 기약 없이 이별하여 지내왔다. 스스로의 남은 삶에 아란이 없다는 생각을 할 때면 현경은 참을 수 없는 무기력함에 빠져 들었고, 숨을 쉬며 살아가는 이 시간들에 의미를 찾지 못했다. 아마 평생에 걸쳐 그 반년의 기억 속에서 괴로워했겠지.

그렇게 영영 놓친 줄 알았던 인연의 끈을 겨우 다시 잡았다. 그 생명줄 같은 끈을 소중히 부여잡고서 현경은 세상 더없는 천치마냥 아직도 떨고 있다. 다시 이 사람을 욕심내도 될까. 이 불행한 내가.

아란을 업고서 어느 집 대문 앞까지 걸으니, 다시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서러워졌다. 등에서 내려와 한참 자신을 바라보던 그 눈이, 부실의 재촉에 뒤돌아 대문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이 아른거려 그 앞을 떠날 수가 없었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다가 현경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떼었지만 걷다 멈추고 걷다 멈추며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 걸음이 느려 터져서야 원, 나오던 똥도 도로 막히겠구먼.”

평상마냥 자리한 큰 바윗돌 위에 걸터앉아 담배를 태우던 노인이 현경을 보며 낄낄 웃었다. 얼굴이 검고 머리는 새하얀 노인은 물고 있던 장죽을 빼들고서 현경을 쭉 훑어보았다. 검은 동자가 있어야 할 눈은 진주알처럼 하얬다. 현경은 괜히 주눅이 드는 기분이었다.

“못 보던 처자인데, 별일일세. 이 촌구석에.”

“…….”

“이리 가까이 좀 와봐라, 얼굴 좀 들여다보자.”

현경이 쭈뼛쭈뼛 노인 앞으로 몇 걸음 다가갔다. 가까이 가진 못하고 멀찍이 떨어져 서있는 현경을 보며 노인은 정말로 현경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정확히 현경 쪽을 바라보았다. 이내 노인은 그 주름진 얼굴을 구기고서는 담배 한 모금을 깊게 들이마셨다.

“쯧쯧, 이 미련한 게 풀 생각은 않고 고걸 잘라야 하나 고민하고 있구만.”

“…….”

“고약하게 꼬인 것일수록 천천히 풀어야지. 멀리 도망가려 하면 그게 숨만 더 조이지 뭘.”

노인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실수로 놓쳤는데 다시 돌아온 것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때는 잔말 말고 깨어진 곳 없나 살피고 다시 소중히 품어야지.”

“판수 어르신.”

현경이 가만 고개만 숙이고 있는데, 수염이 덥수룩한 사내 하나가 노인과 현경이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사내는 집에 손이 오셨으니 어서 돌아가자며 익숙하게 노인을 부축했다. 인사도 없이 어기적어기적 멀어져 가는 노인의 뒷모습을 보는 현경의 표정이 멍했다.

“저 멍한 표정이 참으로 우습지?”

“앞도 못 보는 분이, 어르신 또 지나가는 사람 붙잡고 인연이 꼬였네 어쨌네, 그 소리 하셨죠?”

“뭣이? 고얀 놈이 또 나더러 노망났다 하냐, 이놈!”

“아뜨뜨, 재 튀어요, 어르신!”

“눈 뜨면 다 보이는 줄 알지 이놈이.”

그러다 금방 노인은 다시 길게 담배 연기를 뿜어내며 껄껄 웃었다.

아란은 별당에 돌아오자마자 또 열이 올라 자리에 몸져누웠다. 기력이 약한 상태로 고뿔이 든 것이니 기력을 보하고 쉬는 것 말고는 약이 없다 하는 의원의 말에 부실은 주인어른의 눈치를 보며 열심히 약을 달였다.

“부실아.”

“예, 물 드릴까요?”

“아니다, 저, 요새는 숲에 가지 않니?”

“에이, 마님께서 편찮으신데 제가 어딜 가요.”

“그럼, 누가 날 찾아오진 않았니?”

“마님을요? 없었는데. 누구 기다리는 분 있으세요?”

“…….”

이틀이 지나고 사나흘이 지나고. 아란은 꼼짝할 수 없는 무거운 몸을 겨우 일으키면 부실을 불러다 찾아온 이가 없었는지를 물었다. 그때마다 부실은 영문을 모르는 눈치였다.

“그 산 속에 사는…….”

“그때 머물렀던 그 집 언니요?”

“그래.”

아란은 가끔 불안한 듯 그날의 일을 부실에게 자꾸만 확인했다. 꿈이었나 싶어 두려운 마음이 일 때도 있었다. 당장 가서 다시 현경의 얼굴을 봐야 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눈을 감았다 뜨면 혹시나 또 꿈일까 봐. 잔인하게 선명한 꿈일까 봐.

아란은 전과 달리 갑자기 살고자 하는 생각이 강해졌는지 넘어가지 않는 밥을 억지로 넘기고, 부실이 건네는 약사발도 꾹 참고 들이켰다. 그 덕에 아란의 병세는 점차 차도가 있어 머지않아 기운을 차렸다.

아란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마자 현경을 만나야겠다는 생각에 외출할 채비를 했다. 약사발을 치우던 부실이 그 모습을 보고 놀라서 도로 다가왔다.

“어디 가시게요 마님, 자리에서 일어나신 지 얼마나 되셨다구.”

“소나무 숲에.”

“어휴 그 험한 데를 또요? 안돼요, 이따 손님도 오시는데.”

“부실아, 나 금방 다녀 올 테니, 잠깐만.”

“주인어른 아시면 저 죽어요.”

“나도 지금 안 가면 죽을 것 같다.”

“예? 그게 무슨. 아휴, 일단 좀 앉으시고, 제발요.”

한 번 앓아눕더니 차분하시던 분이 웬 고집이 이렇게 생기신건지, 부실은 고집스레 발걸음을 떼려는 아란의 허리에 매달려 겨우 앉혔다. 아직 어린아이의 힘에도 당하지 못하는 아란이 안쓰러웠지만 그보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저 얼굴은 또 무엇인지. 간밤에 꿈자리가 안 좋으셨나, 사람이 기력이 쇠하면 막 귀신에게 홀리고 그런다던데.

“별당마님, 주인어른께서 오셨습니다.”

문밖에서 큰놈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리자 부실은 주춤거리며 아란의 팔을 놓았다.

방 안에 들어온 외숙부는 기력을 찾은 듯한 아란의 모습에 안도했다.

“몸은 좀 괜찮으냐.”

“심려 끼쳐 송구합니다.”

“산책도 좋지만 금방 앓아누우니 조심해야지.”

“전 괜찮습니다.”

“아니다, 안 그래도 엊그제 자형께서 서신을 보내오셨더구나, 누이께서도 하나뿐인 딸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시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얘기가 나오자 아란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결국 어떻게 해서든 그분들께 마음의 짐이 되는구나 싶은 마음에서였다.

“이리 기운을 차려 정말 다행이고 해서, 내 부탁 하나 해도 되겠느냐.”

“부탁이요.”

“혹, 괜찮다면 저녁에 시간을 좀 내어줄 수 있겠느냐. 실은 오늘 집에서 시문회가 있는데 다들 널 만나고 싶어 해서.”

“저를요?”

“그래, 뭐 다른 것은 아니고, 너에게 글을 보이고 싶다고들 통 부탁을 해와서 말이다.”

아란의 의중을 살피는 외숙부의 표정이 사뭇 조심스러웠다. 아란은 단지 망월장 때문만은 아니라는 걸 금방 알았다. 아마 며칠 전 앓아누운 탓에 미루어졌다던 그 약속인 듯했다. 아란의 옆에 잠자코 앉아 있던 부실은 주인어른의 눈짓에 조용히 방을 나섰다.

“아, 저는 이만, 부엌에 가보겠습니다.”

눈치 빠른 부실은 별당 밖으로 나온 후에도 그 문틈에 붙어 이야기를 엿들으려 했다. 그러나 금방 어미한테 들켜 손이 모자란 부엌으로 잡혀 들어갔다.

“다들 내 오랜 벗들인데, 그중에 참 성품이 온화하고 점잖은 자가 하나 있어서.”

“…….”

“나보다 나이도 한참 어린데, 어느 땐 형님 같기도 하고 허허.”

외숙부는 묻지도 않은 말에 오늘 올 선비들 중 한 사내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 사내의 풍채와 집안이 얼마나 좋은지 하며, 외숙부보다 어리긴 하나 학식이 높고 성정이 점잖다고.

첩으로 들어갈 자리를 알아봐온 외숙부의 얼굴을 가만히 보았다. 아란의 시선을 슬쩍 피하는 눈빛이 밝지만은 않아 보였다.

“시간을 내어 흠 잡히지 않도록 준비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

“못난 조카 때문에 욕보셨지요.”

“당치 않다, 그런 말 말아라.”

웃고 있던 외숙부도 다시 착잡한 얼굴이었다. 그리 귀여워하던 조카의 첩 자리를 알아보는 외숙부의 마음도 편치만은 않았을 것이다. 개중에 고르고 골랐을 그 사내는 외숙부의 말처럼 점잖고도 괜찮은 선비일 것이다.

“어찌 해야 하나, 어찌 되려나.”

그 순간, 아란은 그간 잊고 있던 자신의 처지를 새삼스레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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