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현경이 한 손에는 횃불을 들고, 품엔 단지 하나를 끌어안은 채 걸어오고 있었다. 부실은 반가운 마음에 얼른 현경에게 달려갔고, 현경은 고양이마냥 갑자기 튀어나오는 부실을 보고 깜짝 놀라 걸음을 멈췄다.
“아, 언니 어디 갔다 이제 와요!”
“너야말로 이 밤중에 웬일이야, 위험하게 왜 왔어.”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나 쫓겨날지도 몰라.”
“무슨 일인데.”
우스갯소리가 아닌 듯 정말 눈물을 찔끔대는 부실을 보고 놀란 현경의 눈이 더 커졌다. 부실이 울먹이며 자초지종을 설명하는데.
“그래서 지금 마님이랑 방에 있다가 나온 거예요.”
현경은 순간 들고 있던 단지를 놓쳤다. 팍! 하는 소리와 함께 박살 난 단지 안에 들어 있던 술이 흙바닥에 순식간에 스며들었다. 그 짧은 순간에도 현경의 머릿속엔 오만가지 생각이 꽉 들어찼다가 하얗게 지워지기를 반복하였다.
“횃불 하나, 아니다, 두 개만 만들어 주면, 내려갈 수 있을까요?”
“어딜 내려간다는 거야, 이 밤에. 위험해서 안 돼.”
“그럼 마님을 예서 주무시게 해요? 그럼 언니가 데려다 주면. 아아, 주인어른 알면 나 죽었다.”
잔뜩 울상인 부실이 현경의 옷자락을 잡고 떼를 썼다. 하지만 이 숲에서 사는 현경조차도 날이 어두워지면 횃불을 양손에 들고서라도 겁나는 게 산속이었다. 더구나 겁 많은 아란더러 밤중에 산을 내려가게 할 수는 없었다.
“너무 위험해서 안 돼, 내일 날 밝거든 내려가자.”
입술을 깨물던 현경이 부실을 달랬다. 부실도 결국 알았다며 현경을 따라 방문 앞에 섰다.
현경은 떨리는 속을 진정시키려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러다 방문 너머로 어른거리는 그림자에 현경은 다시 숨을 죽였다. 이 문고리만 당기면 그렇게나 그리던 아란이 있을지도 모른다. 말도 안 되지만, 이 문 너머에 있는 사람이 정말 아란이라면.
“마님께 뭐라고 하지.”
부실이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에, 문에서 시선을 뗄 줄 모르던 현경이 조용히 물었다.
“마님께 혹시 내 얘기 했니?”
“내가 한 말 때문에 지금 좀 겁내하시는 거 같아요, 그니까 얼른 들어가서 인사부터 드려요.”
“그럼 너 먼저 들어가 있어라, 내 얘기는…… 하지 말고.”
“언닌 안 들어가게요?”
“방 안이 얼음장일 텐데. 불 좀 떼야겠다. 먼저 들어가 있어 걱정하실라. 행여 문 밖에 나오시게 하지 말고 알았지?”
현경은 부실을 달래어 들여보내고는 부엌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들고 있던 횃불로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장작들을 밀어 넣으며 바람을 후 불어넣었다. 집에 먹을 게 있었던가, 두리번거리는 현경의 움직임이 부산스러웠다.
문 밖에서 누군가와 얘기를 나누는 듯한 소리가 어렴풋이 들리는가 싶더니, 문이 열리고 부실이 들어왔다. 사뭇 긴장하여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아란은 방으로 들어온 이가 부실뿐이라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밤길엔 위험해서 못 내려간다고 하네요, 어쩔 수 없이 여기서 자야 할 것 같아요.”
“집주인이 오신 것 같은데.”
“지금 요 옆에서 불 때고 있어요.”
어쩐지, 아까보다 방바닥에 조금씩 훈기가 도는 것 같다. 아란은 집주인이 벽 너머에 있다는 말에 긴장하며 어깨에 걸치고 있던 장옷을 추슬렀다.
“방 안엔 아마 안 들어올지도 몰라요, 혼자 오래 살아서 그런가. 사람을 좀 무서워하는 거 같더라구요.”
“그럼 그분은 밤새 어디 계시려고.”
“그게…….”
부실이 우물쭈물하는데 문 밖에서 일부러 현경이 기척을 내는 소리가 들린다. 왠지 자기를 부르는 것 같아 부실은 냉큼 방문 밖으로 나갔다. 본인 집이면서도 숨듯이 벽에 붙어 있던 현경이 거의 속삭이듯 목소리를 낮추고 작은 소쿠리 하나를 내민다.
“집에 먹을 게 없네, 이거라도 어떻게. 허기 좀 달래시라고 해.”
“와 감자, 그냥 언니도 들어와 있으면 안 돼요?”
“아냐, 난 괜찮으니까, 안에 홑이불밖에 없는데 잘 펴드리고, 뭐 필요한 거 있으시다 하면 나 부르고. 알았지?”
“언니 진짜, 낯선 사람이랑 같이 있는 거 싫어하는구나.”
오죽 불편하면 저렇게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이지. 부실은 내심 현경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고맙다며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감자 소쿠리를 끌어안고 방 안으로 들어간다.
손만 뻗어도 그 얼굴을 확인할 수 있는데, 혹시나 아니면 어쩌나 싶어 현경은 문에 비친 그림자만 바라보며 추운 줄도 모르고 한참을 그렇게 섰다. 그러다 작은 한숨과 함께 현경은 다시 아궁이 앞에 앉아 장작 하나를 더 넣었다.
혼자 있을 땐 부엌에서 불을 뗀 적이 별로 없어서 매캐한 연기가 많이 났다. 현경은 최대한 숨죽여 기침을 하면서도 아궁이 앞을 떠나지 않았다.
방도 이제 제법 따뜻해졌고 노릇하게 잘 익은 따끈한 감자도 맛이 좋았다. 아란은 정성스런 대접에 고맙기도 하고, 괜히 폐를 끼친 것 같아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얼굴도 못 뵙고 이렇게 대접을 받아도 될지 모르겠다.”
“저도 이 집 아궁이에 불 붙은 거는 오랜만에 봐요.”
“밖이 추울 텐데.”
“마님은 그저 편히 쉬셔요, 그래야 이 집 주인도 마음이 편할 거예요.”
추위와 불안에 떨다 허기를 채우니 금방 졸음이 밀려왔다. 뜨끈한 바닥에 홑이불을 둘러 자리에 누운 아란도 노곤함이 몰려와 금방이라도 잠이 쏟아질 것 같았다.
막 잠이 들려던 차에, 문에서 작게 들리는 덜그럭 소리에 놀란 아란이 눈을 떴다. 웬 기다란 그림자 하나가 문 밖에서 어른거리고 있었다.
“별건 아니고, 밤마다 바람에 문이 자꾸 열린대서 저래요.”
바깥 문고리에 조심조심 뭔가를 걸어두는 그 움직임을 내다보며 부실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원래는 안에서 걸어야 하는 건데, 방에 들어오기 좀 그런가 봐요.”
“…….”
“마님 안심하고 주무시라는 거니까, 너무 걱정 마세요.”
부실은 중얼거리면서도 하품을 쩍 하고는, 다시 졸린 눈을 감았다.
“선한 분이시구나.”
“소심하거든요.”
아란의 말에 부실이 작게 웃었다. 얼핏 보니 문 밖에 비쳤던 그림자가 부실의 말처럼 우락부락 하지도 않고 가녀려 보였다. 부실이 말은 안 하지만, 아란이 보기엔 왠지 여인인 듯해 까슬한 홑이불에도 아란은 조금 마음을 놓았다.
문고리에 조심조심 숟가락을 걸어두고 다시 아궁이 앞에 털썩 앉은 현경은 긴장했던 가슴을 쓸어내리며 숨을 폭 내쉬었다. 얼핏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리는 게 혹시 아란이 깼나 싶어 후다닥 부엌으로 뛰어 들어온 탓이었다.
따닥 따닥 소리를 내며 온기를 내는 아궁이 근처에 앉아 있으니 그나마 가슴팍이 좀 뜨끈해져 견딜 만 했다. 밤이 깊어지니 바람소리도 잠잠해지고 이불이 바스락 거리는 소리마저 들릴 것처럼 사방이 고요해졌다.
잠자리가 많이 불편할 텐데, 부실이 말대로 진작 이불이라도 한 채 해둘 걸 그랬나 싶다. 일렁이는 아궁이 불을 내려다보던 현경은 오래전에 보았던 잠든 아란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부지깽이로 장작을 뒤적이는 얼굴에 얼핏 미소가 걸린다. 행여 너무 뜨겁진 않을까 장작을 빼놨다가 다시 넣었다가 하며 현경은 새벽이 밝아오도록 한시도 아궁이 앞을 떠나지 않았다.
현경은 발자국 소리를 죽이며 방문 앞에 섰다. 한참을 망설이다 슬쩍 몸을 숙여 문 가까이에 귀를 대어 보았다. 부실의 코고는 소리 말고 다른 하나의 숨소리가 더 들리자 현경은 눈을 꼭 감고 안도의 숨을 조용히 내쉬었다.
한숨도 자지 않고 이불 뒤척이는 소리, 얕은 기침 소리 하나에도 일어섰다 앉았다 하며 전전긍긍 밤을 지새운 현경이었다. 간밤에 걸어둔 숟가락을 조심조심 빼내며 문고리를 잡은 손에 어느새 차가운 새벽에도 땀이 흥건했다.
열어 볼까. 잠깐만 자고 있는 얼굴이라도 한 번 볼까. 아란이 바로 눈앞에 있는 걸지도 모르는데. 코앞에서 망설이는 자신이 답답하고 미칠 것 같았지만, 현경은 사실 많이 두려웠다.
콜록 콜록.
방 안에서 들리는 작은 기침 소리에 현경의 손이 문고리에 닿지 못하고 허공에 머물렀다. 어제 산에서 찬바람을 쐬어 그런가 싶어, 현경은 다시 아궁이로 달려가 바람을 불어 넣었다.
벌컥,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현경이 깜짝 놀라 부엌 안에서 몸을 움츠리고 있는데 부실이 현경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슬그머니 고개를 내미니 방문을 꼭 닫고 나오는 부실의 표정이 심각했다.
“일 났는데.”
“뭐? 왜, 무슨 일인데.”
“마님이 열이 펄펄 끓어서 못 일어나세요, 어젯밤까진 괜찮았는데.”
현경의 표정이 부실보다 더 심각해졌다.
“방 안이 혹시 추웠니.”
“것보단 방 안에만 계시던 분이 갑자기 움직였으니, 몸살이 안 나겠어요.”
부실은 별당마님이 편찮으신 것도 그렇지만 솔직한 심정으론 집에 돌아가면 혼날 걱정이 더 앞선 표정이었다. 현경은 아란이 있는 방 쪽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안절부절 못했다. 불안해하는 현경을 멍하니 보며 머리를 굴리던 부실이 뭔가 생각난 듯, 현경을 불렀다.
“언니, 부탁이 있어요.”
“응?”
“내가 일단 집에 돌아가서 마님이 늦잠 주무시는 것처럼 둘러 대놓고, 오는 길에 마을에서 의원을 데려올게요.”
“여기까진 의원이 안 올 텐데.”
“그러면, 아무튼 일단 마님이 여기 있다는 거 주인어른 아셨다간 소란이 생길 테니까. 그때까지 우리 마님 좀 살펴줘요.”
“내, 내가?”
“금방 올게요, 잠깐만 응?”
부실이 간곡히 부탁했다. 현경이 머뭇거리다가 겨우 고개를 끄덕이니, 부실이 급히 산길을 내려갔다. 현경은 몇 번의 심호흡 끝에 방 문고리를 당겨 열었다.
방문을 열자 훅 끼치는 방 안의 열기가 밤새 얼었던 현경의 몸에 닿아 왔다. 살갗이 따끔거리는 느낌에 현경은 잠시 얼굴을 쓸었다. 절절 끓는 바닥만큼이나 힘겹게 뜨거운 입김을 내고 있는 작은 몸이 눈에 들어왔고, 그 얼굴을 확인하니 현경은 왈칵 올라오는 눈물 때문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하.”
현경은 아란의 곁에 앉아 눈가를 벅벅 문질렀다. 아란이 눈앞에 있다니 현경은 가슴이 터질 것 같아 앓는 소리를 삼키고 또 삼켰다.
아란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며 조심스레 그 이마에 손을 올리니 얼음장 같던 현경의 손이 아릴 만큼 뜨거웠다. 아란은 차가운 손이 닿자 놀랐는지 미세하게 얼굴을 찡그리다 이내 표정을 풀었다. 현경은 식었던 손이 따뜻해질 때까지 그리움을 닦아내듯 뜨거운 아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어찌 이리 야위셨어요.”
목소리를 들은 것일까, 때때로 뜨거운 숨을 뱉어내며 힘겨워하던 아란이 느리게 눈을 떴다. 허공을 맴돌던 시선이 현경에게 와 닿는다. 다 뜨지 못한 눈은 금방 도로 감겼지만 슬쩍 입가에 미소가 걸린다. 이불에서 힘겹게 빠져나온 손이 바닥을 훑고 현경의 발치에 닿았다.
그 가녀린 손 안에 현경이 눈물진 얼굴을 묻었다. 아란이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란은 현경을 만나는 꿈을 꾸는 중이었다.
아란의 향기가, 이 온기가 얼마나 그리웠는지. 혼자서 그 지난 시간들을 어찌 견뎌냈는지 현경은 까마득해졌다. 아란을 두고 다 잊고 살 수 있을 거라, 잘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니 어리석었다.
결국 현경은 몸을 가누지 못해 아란의 품에 얼굴을 묻고 숨 죽여 흐느꼈다. 아란의 뜨거운 손이 현경의 머리를 가만가만 쓸어 주었다.
“머리, 풀으셨네.”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숨 같은 목소리를 내는 아란은 여전히 꿈속이었다. 현경은 밤새 몸에 스민 서늘함도 잊고, 그 곁에 누워 아란을 끌어안았다. 불덩이 같은 아란의 체온에 현경의 언 몸이 녹아 그 물이 눈물 져 흘러내렸다.
아란은 이 느낌을 알고 있었다. 아주 오래전이지만 까마득했지만 익숙한 느낌에 잠을 깼던 날들이 있었다. 눈을 뜨지도 않았는데 그리움에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꿈속에서 만나는 현경은 오직 바라만 볼 수 있었기에 그 향도 온기도 어느새 잊은 줄 알았는데, 오늘은 거짓말처럼 생생했다.
행여 이 꿈에서 깰까 두려워 아란은 꼭 감은 눈을 뜨지 못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점점 잠은 깨어가고, 어깨에 둘러진 팔의 무게와 이마에 닿는 숨결, 손끝에 닿는 누군가의 떨림이 선명해진다.
대체 누가. 사실은 그 품 안이 너무나 편안해서 아란은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아란은 흐트러지는 정신을 붙잡고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힘겹게 떴다. 아란이 뒤척이자 한참 눈을 감고 있던 현경이 아란과 눈을 맞추었다. 순간, 아란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꿈, 일 텐데.”
또 다시 숨 같은 혼잣말을 뱉던 아란이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분명 꿈일 텐데. 현실이 아닐 텐데 왜 현경의 얼굴이 이렇듯 생생하게 만져질까. 영문을 모르고 금세 아란의 눈가에 눈물이 들어찼다.
그 눈물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조여와 현경은 다시 아란을 힘주어 꼭 안았다.
“어, 어어.”
말을 잇지 못하고 울먹이는 아란의 목소리가 현경의 가슴팍에 울렸다. 아란의 등을 가만히 쓰는 현경의 손길에 작은 몸이 크게 떨렸다. 현경을 놓칠세라 옷자락을 꽉 움켜쥐던 아란은 정신을 잃을 만큼 한참 소리 내어 울었다.
“이게…….”
아란은 정신이 들면 자꾸만 현경을 확인했다. 이게 어찌된 일인지 그 짧은 한마디도 다하지 못하고 울다가 열 오른 몸에 지쳐 정신을 잃기를 여러 차례, 현경도 목이 메어 말을 하지 못하고 그저 아란을 끌어안고만 있었다. 할 말이 많았는데 하나도 생각이 나질 않았다.
이제 우는 것도 힘에 부친 아란이 힘없이 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현경의 옷자락을 놓지 않아 현경도 그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기운을 못 차리는 아란에게 물이라도 먹여야겠다 싶어 현경이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아란이 놀라 손을 뻗어왔다. 힘이 하나도 없어 옷깃을 잡으려다 몇 번 허공을 스쳤다.
“물, 물 떠 올게요”
“가지 마세요.”
“…….”
애처로운 그 말에 현경의 눈썹이 축 쳐졌다. 아란의 손을 잡고 다시 그 곁에 누웠다. 가지 마세요, 여기 있어요. 현경이 울며 빌었던 말에 뒤돌아 나간 아란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마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자신이 아란을 놓쳐 버린 게. 현경의 눈이 또 벌게진다.
그때 얼마나 속상했는데요. 현경이 아란의 품에 얼굴을 묻고 울며 투정을 부렸다. 아란은 현경의 얼굴을 보고 싶었지만 현경은 고개를 들 생각이 없는 것 같아 그대로 그 얼굴을 품었다.
안겨 있는 현경마저 땀이 날 정도로 아란의 열이 심상치 않았다. 현경은 도저히 안 되겠는지 아란을 달래어 몸을 일으켰다. 현경이 곁을 비우니 그 뒷모습을 보며 아란이 기운 없는 숨만 뱉었다.
손끝이 금세 빨게 지도록 시린 냇물에 손을 담그던 현경은 물가에 비친 제 얼굴을 보다 세수를 하고 마른 천에 물을 적셨다. 작은 물독에 물을 채우고 걸음을 서두르다 보니, 독 안에 든 물을 쏟아 현경의 옷이 다 젖었다.
아란의 이마 위에 올려진 천은 금방 따끈해졌다. 현경은 아란의 저고리를 풀러 맨살 위에 젖은 옷을 덮었다. 숨소리가 진정된 아란은 천장을 올려다보며 천천히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늦지 않으신다면서, 약속은 매번 어기시고.”
“그래서 부인이 먼저 절 찾아오셨어요?”
서로를 죽었다 생각하고 삼년상까지 치렀는데 다시 만났다.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으니 말 그대로 믿고 싶지가 않았다. 왜, 대체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그 날의 일을 들추기에 겁이 나 어느 하나 선뜻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저, 이 순간이 꿈이 아니고 비록 꿈이어도 깨지 않았으면 했다.
“부인 손은 다시 봐도 참 작네요, 제가 옛날에도 말했던가요.”
현경은 아주 소중한 것을 쥐기라도 하는 듯 아란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그러자 아란이 그 모습을 애틋하게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