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아란은 도성에서 가져 온 서책을 꺼내어 읽기 시작했다. 현경의 물건을 태울 때 차마 현경의 손때가 가득한 서책만큼은 태울 수가 없어 아란이 일부러 챙겨온 것들이었다.
현경과 함께 몇 번이나 읽고 또 읽었던 책이라 그 내용을 외울 정도였지만 지루하지 않았다. 현경이 문하생으로 있었을 때 자주 들고 와 질문을 했던 책에는 군데군데 낙서가 있었다.
현경은 이해가 안 되는 글자에 붓으로 동그라미를 쳐 놓았는데, 처음엔 이 일로 언쟁을 하기도 했다. 아란은 어찌 서책에 낙서를 할 수가 있나 싶어 현경의 별난 구석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는데, 어느새 현경의 그런 모습마저 귀여워하게 되었다.
아란은 현경의 흔적을 따라 책장을 넘겼다. 이 구절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땐 현경이 어떤 말도 안 되는 농담을 했는지, 엉뚱하게 글자 해석을 해 와놓고 자기가 맞다며 우기던 그 표정마저도 결코 잊히지 않았다.
현경이 읽던 책을 집어든 아란은 책장 사이에 꽂힌 노란 은행잎을 발견하고는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동재 앞 은행나무에 노란 단풍이 참 고와요, 언제 한 번 보러 오세요.’
납작하게 말린 메꽃잎을 건네주며 웃던 현경은 누구를 위해 가을 한 잎을 책 사이에 남겨 두었을까. 아란은 마른 은행잎이 부서질까 차마 손대지 못하고, 그 계절을 들여다보았다. 그때 책을 보느라 현경의 얼굴을 눈에 담지 못한 것을 조금 후회하며.
아란은 조용히 책을 덮었다. 별당 밖에서 외숙부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책을 읽고 있었구나, 방해하려던 것은 아닌데.”
“괜찮습니다.”
외숙부는 아란이 처음 이곳에 왔을 때보다 한결 편안해 보이는 모습에 안심했다.
“아란이 요새도 글을 쓰느냐.”
“붓을 놓은 지 좀 되었습니다만, 가끔 일기는 씁니다.”
“다름이 아니라, 오늘 밤에 망월장이 열리는데 한 번 글을 내보겠느냐.”
외숙부는 아란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 고사리 같은 손으로 글씨를 써내려가는 모습을 무척이나 신기해했다. 아란이 쓰는 글이라면 언제나 으뜸이라 우기던 외숙부는 오랜만에 조카의 글을 보고 싶었는지 잔뜩 기대하는 눈치였다.
“글쎄요, 어디 내놓을 만한 글 솜씨가 아니라.”
“무슨 소리, 내 너의 글 솜씨를 늘 자랑하고 싶었는데. 좋은 기회다 싶어 이리 달려온 것이다.”
“아녀자의 글을 내놓아도 괜찮까요.”
“망월장은 이름을 써내지 않아도 되니, 한 번 해보겠느냐.”
아란은 잠시 고민했지만 외숙부의 기대를 차마 저버릴 수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구나, 아란이 너의 글이라면 이번엔 옆 마을에도 체면이 좀 서겠다.”
“과찬이세요.”
“당장이라 시간이 부족하겠지만, 저녁 때 부실이를 보낼 테니 전해주면 된다.”
외숙부는 들뜬 얼굴로 무릎을 짚고 가뿐히 일어섰다. 그리곤 방을 나서려다 말고 문득 발걸음을 멈추고는,
“참, 시제를 깜빡했구나, 이번 시제는……, 가만 있자.”
“…….”
“아, 그래. 시제는 대나무 죽竹이다.”
시제를 들은 아란이 멈칫했다. 흔하디흔한 시제일 뿐인데도 아란의 마음이 가라앉지 못하고 붕 떠올랐다.
세월이 흘러도 오래도록 잊을 수 없는 단 한 번의 기억이자 어쩌면 꿈이 아니었을까 싶은 선명한 잔상. 현경을 처음 만났던 그 날을 떠올리며 아란은 가만히 붓을 꺼내 들었다.
“하필 시제도 참…….”
금세 눈물이 그렁하도록 붉어진 눈가에도 아란의 입가엔 옅은 미소가 드리웠다. 종이를 펼쳐 손바닥으로 곱게 쓸고 벼루를 꺼냈다. 그리고는 먹을 갈며 무심코 아주 옛날의 노랫말을 들릴 듯 말듯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아란은 깊게 잠이 들었다. 한 번도 깨지 않고 꿈도 꾸지 않았다.
눈을 떴을 땐 이미 정오가 지나 있었다. 아란은 옷을 입고 별당 문을 열었다.
“일어났구나.”
중문을 지나 들어오던 외숙부가 아란을 보고 환하게 웃었다.
지난 밤 망월장에서의 장원은 단연 아란의 글이었다. 너무 여성적이라는 의견도 있었으나 그만큼 보는 이들의 마음을 움직인 글이라 이견은 많지 않았다. 돈을 주고 글을 사겠다는 자도 있었지만, 아란의 사정을 아는 외숙부는 글 속에 잔뜩 묻어난 그리움과 슬픔을 알아보았다. 다른 이들의 손에 들어가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장원이 된 글은 문집으로 엮어 남기지만, 익명의 글이 장원이 된 것은 처음이라 좀 더 의논해 보기로 했다.”
외숙부는 아란의 글을 책상 위에 조심히 올려두었다.
“헌데, 시가 너무 슬프구나, 아란아.”
외숙부는 그저 슬픔에 빠진 아란이 안쓰러워 평소 좋아하는 글을 쓰며 마음을 달래길 바라는 마음이기도 했다. 아란의 글이 모두가 인정한 장원이 되었음에도 드러난 그 마음이 너무 슬퍼 마음껏 기뻐할 수도 없었다. 종이 위에 쓰인 것은 아주 일부일 텐데.
안쓰러운 표정을 짓는 외숙부를 보며 아란이 쓸쓸히 웃었다.
“그저 시일 뿐입니다, 심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 아, 지난밤 망월장에 나온 시를 하나 베껴 써왔는데, 한 번 볼 테냐.”
외숙부는 소매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들었다. 망월장에 나왔던 또 다른 익명의 글 중 하나였다.
“시제가 맞지 않으면 화로에 태운단다. 헌데, 아무리 봐도 글이 아까워서 내가 살짝 옮겨 써왔다.”
아란은 종이를 집어 들었다. 급히 흘려 쓴 외숙부의 필체에도 아란은 천천히 글을 읽었다. 시문이라기 보다, 마치 누군가에게 미처 보내지 못한 한 통의 서신 같은 글이었다.
‘풀잎 따서 작은 그리움 하나 띄우면
언제 그대 있는 냇가에 이르겠습니까.
냇가에 닿을 때면 겹겹이 쌓인 마음이
그대 발치에도 닿지 못하고 흩뿌릴진대
오늘 더 육중해진 마음을 애써
바람에 실어 보내려 덜어봐도
조금을 모르는 욕심에 남는 건 송구함뿐이라
바람 없이도 애석하게 흘러가는 건 그뿐이라.’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이렇듯 자신과 닮은 이가 또 있나. 누가 쓴 것일까, 아란은 한동안 글에서 눈을 떼지 못하였다. 이 글을 쓴 사람은 대체 누구를 떠나보냈기에 그리움의 정도를 송구하다고까지 했을까.
“아마 누군가 시제를 착각한 모양이다.”
“누가 쓴 것인지 궁금하네요.”
“그렇지? 본 적이 없는 필체던데.”
“아쉽네요.”
“망월장에서 장원을 하였으니 상을 줄까 하는데, 혹 갖고 싶은 것이 있느냐.”
“부족한 글이라 부끄럽습니다만, 괜찮으시다면 이 글을 제가 가져도 될까요.”
“마음에 드는 모양이구나, 가져도 좋다. 사실 너에게 주려고 써 온 것이다.”
외숙부가 나간 후에도 아란은 글을 읽고 또 읽었다. 필체라도 알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글의 주인이 누구일까 아란은 궁금해졌다. 아란은 글에 푹 빠져 있느라 부실이 방 안에 들어와 있는 줄도 몰랐다.
점심을 거른 아란을 위해 참을 가져온 부실은 아란이 들고 있는 종이를 보았다. 글자는 모르지만 종이와 먹, 그 흑백의 조화가 왠지 눈에 익었다. 부실은 슬쩍 아란의 옆으로 얼굴을 들이밀고 자세히 보았다. 첫 번째 글자와 마지막 글자의 모양이 익숙하니, 분명 현경의 글이 맞았다.
“어라, 이게 왜 여기 있지?”
“이 글을 아니?”
“어제 제가 마님이 쓰신 글 내러가면서 같이 낸 거예요.”
“네가 쓴 글이라고?”
“에이, 그럴 리가요. 저 아는 언, 아니 저기, 아는 도인이 쓰신 건데. 제가 대신 내드렸거든요.”
“그 도인이란 분은, 이 마을에 사시니?”
부실은 갑자기 관심을 보이는 아란의 모습에 어리둥절했다. 괜히 말했나.
“이 글을 쓴 사람을 알고 있다는 말이지?”
“네. 알긴 아는데.”
“그렇구나.”
“이 글도 혹시 조악한가요?”
“아니다, 조악하다니. 마음에 와 닿았는걸.”
“그럼 잘 썼다는 거죠? 아 역시, 그때 조악하다고 해서 얼마나.”
“응?”
“아, 아니에요! 사실 그 도인이 엄청 험상궂게 생겼는데요, 수염이 막 이렇고.”
당황한 부실이 괜히 묻지도 않은 말에 손짓까지 크게 해보이며 허둥지둥하였다.
“그렇구나. 혹시 아는 분이라면 글 잘 보았다고 전해줄 수 있겠니?”
“아 네, 전해드릴게요!”
“그래.”
휴. 부실은 아란 몰래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다 금방 현경에게 이야기를 전해주면 좋아할 거란 생각에 신이 났다. 빨리 전해줘야겠다는 생각에 별당을 나서려는데 부실의 눈에 어제 아란이 쓴 글이 들어왔다.
별당마님의 글이 장원이 되었으니, 현경에게 자랑하고 싶어진 부실이었다. 자기가 말동무도 해주며 모시는 사람이 이렇게나 대단한 분이라고.
“저, 마님.”
“할 말이 있니?”
“이거 잠깐만 빌려도 될까요?”
부실이 책상 위에 놓인 아란의 글을 가리키며 말했다.
“언니, 언니! 술 깼어요?”
“부실이 너 마침 잘 왔다, 너 어제 여기 있던 종이 못 봤니.”
“아 그거, 우리 별당마님이 글 잘 봤대요. 마음에 와 닿았대.”
“뭐? 그게 무슨 소리야?”
“그거 망월장 낼 거 아니었어요?”
“망월장? 나 시제도 모르는데.”
현경이 난감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언니 술 먹고 뻗어 있길래, 망월장 끝나기 전에 내가 얼른 내고 왔죠.”
“아. 뭐라고 썼는지 기억도 안 나는데, 그걸 냈다고?”
“네, 언니 글 그래도 인기 많았어요, 떨어지긴 했지만.”
“내가 뭐라고 써놨더라.”
“나한테 물으면 내가 아나요. 뭐.”
현경은 술김에 쓴 글이라 혹시 허튼 소리라도 써놓았을까 봐 걱정이 되었다.
“언니 글은 우리 별당마님이 갖고 계세요.”
“어째서?”
“음, 그건 저도 궁금한데.”
“너는 왜 말도 없이 그러니.”
“언니는 너무 굼뜨니까, 나니까 내준 거죠.”
“어휴, 말은…….”
“참, 망월장 장원이 누구게요?”
슬쩍 현경이 관심을 보이자, 부실은 키득키득 웃으며 현경의 눈앞에 종이를 팔랑팔랑 흔들어 보였다.
“어른을 놀리니.”
“싫음 말구요.”
부실이 종이를 도로 저고리 품에 넣는 시늉을 한다.
“망월장 장원 글은 또 어찌 너한테 있어?”
“우리 별당마님이 쓴 글이 장원이거든요.”
“별당마님이? 에이.”
“망월장은 이름을 안 써도 된대요, 그러니 여인이고 사내고 상관이 있나.”
“됐어, 안 볼란다. 내 글더러 조악하니 어쩌니 한 사람 글 보기 싫다.”
현경이 아직 덜 깬 술에 정신을 차리려 터덜터덜 냇가로 걸어갔다. 날이 슬슬 추워지려는지 냇물도 벌써 얼음장 같다. 얼굴에 물을 끼얹고 손을 모아 물을 받고선 한 모금 가득 물었다 뱉어냈다.
“그래도 별당마님이 잘 봤다고 꼭 전해 달랬어요, 누구냐 묻길래 둘러대느라 혼났네.”
“혹여나 내 얘기 하지 말고.”
“걱정 마요, 수염이 아주 그냥 막, 이렇다고 했어.”
“잘했어.”
물을 끼얹느라 젖어 버린 저고리에 바람이 불어오니 오소소 몸이 떨렸다. 이제 부실이 가져다준 옷도 다 해져서 거지꼴이 따로 없다. 겨울이 오기 전에 누비 옷감 하나쯤은 마련해 볼까 싶어 현경은 마을에 내려갈 채비를 했다.
“어? 어디 가요?”
“시장에, 같이 갈래?”
“웬일이래. 이제 산비탈 내려갈 수 있어요?”
현경은 축축해진 저고리를 갈아입고 나왔다. 자꾸만 흘러내리는 머리끈을 매만지며 걸어 나오니, 부실이 버티고 서서 현경을 위아래로 훑어본다.
“그러고 마을 가려구요?”
“왜, 이상해?”
“이상한 건 아니고 너무…….”
“거지인 줄 알려나.”
“아무래도 좀?”
아무리 결 좋은 머리라 해도 엉망으로 묶어 놓으니 풀어헤친 귀신머리나 매한가지였다. 부실이 머리를 땋아 줄까 하니, 현경은 괜찮다며 머리를 틀어 올리기 시작했다. 빗 없이도 척척 머리를 올려 상투를 트니,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 듯했다.
머리를 묶었던 헝겊으로 이마 두건을 매고, 잘 입지 않던 바지저고리까지 챙겨 입으니 어깨에 걸친 보자기와 썩 잘 어울렸다.
“잘생긴 도령 같네.”
“칭찬이지? 인절미 하나 사줄까.”
“인절미 말고 깨엿 먹을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