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대가 있음에 (48)화 (48/63)

#48화

“언니! 다 썼어요?”

“아, 놀랐잖아, 기척이라도 좀 내지.”

“나 말곤 찾아오는 사람도 없는데 뭘.”

“왜, 가끔 산짐승이 들이닥쳐서 글 내놔라 하기도 해.”

며칠 사이에 기운을 차렸는지, 현경은 벌컥 열린 문에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면서도 전처럼 부실에게 농담을 했다. 헌데 평소 같으면 잔뜩 심통을 부릴 부실의 표정이 답지 않게 시무룩했다.

“오늘은 기운이 없네, 무슨 일 있어?”

“도성에서 누가 왔는데, 보고 있으면 막 기분이 이상해요.”

“누가 왔는데?”

“주인어른의 제일 큰 누이 딸이라는데, 과부래요.”

“그래.”

“울진 않는데 막……. 아무튼 좀 우울해요, 사람이.”

“많이 슬프셔서 그런가 보다.”

현경은 고개를 작게 끄덕이면서도 글을 마저 써내려갔다.

“그래도 나한테는 말도 하고 그래서, 요즘 말동무 해드리느라 좀 바빴어요.”

“웬일이야, 착한 일도 하네?”

“나 원래 착한데요?”

발끈하는 부실의 말에 현경이 웃으며 다 쓴 종이를 족자에 잘 붙이더니 쌓여 있는 두루마리 위에 올려두었다. 이 많은 글들을 금세 술술 써내려가는 게 부실은 볼 때마다 신통할 따름이다.

현경은 피곤한지 붓을 내려놓으며 지친 숨을 내쉬었다. 저린 손을 주무르다가 머리를 쓸어 넘기기도 했다.

“언니는 맨날 술만 마시는 거 같은데 어쩜 이렇게 머리에 윤기가 날까?”

엉성하게 묶은 긴 머리를 허리께까지 내리고 있는 현경을 보며 부실이 중얼거리자, 현경이 작게 웃는다.

고작 열 살 먹은 부실도 아침마다 어미가 땋아주는 것만큼 예쁘게는 아니더라도, 머리 땋을 줄은 알았다. 헌데 땋을 줄 모르는 건지, 귀찮아서 그러는 건지. 현경은 늘 기다란 헝겊 끈으로 머리를 대충 묶고만 있는 게 다였다.

저런 모습을 볼 때면 대체 뭘 하던 사람일까, 부실은 문득 궁금해지곤 했다. 하는 행동들을 보면 마치 사내처럼 투박하기도 하고, 홀아비처럼 짠하기도 하다가, 어느 땐 부실보다 어리숙한 구석이 있기도 했다.

“인물이 아까워.”

“응?”

“아니에요, 근데 왜 더 안 써요?”

“좀 쉬자, 똑같은 글 계속 쓰는 게 얼마나 힘든데.”

“나랑 마을 구경 갈래요? 글 받아가는 선비들이 언니 만나고 싶어 하던데.”

“너 사람들한테 내 얘기 하고 그러는 거야?”

“하두 묻길래 그냥, 깊은 산 속에 사는 도인이라고 했어요.”

“누가 자꾸 물으면, 수염도 막 이렇게 나고 우락부락하니 엄청 무서운 사람이라고 해.”

“치, 엄청 겁쟁이면서. 내려가는 길에 넘어질까 봐 못나가는 거죠?”

“…….”

“나는 한 번도 안 넘어지고 내려갈 수 있는데.”

부실이 새침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스댔다. 겁쟁이라. 틀린 말은 아니네 싶어 현경이 쓰게 웃었다.

“아 맞다, 언니도 그거 나가요. 뭐더라, 무슨 장인데.”

“백일장?”

“어! 그거랑 비슷해요.”

생각이 날듯 말듯 답답하여 부실은 그 밤톨 같은 주먹을 붕붕 흔들었다. 그게 꼭 재롱부리는 것처럼 귀여워서 현경은 알고도 말을 해주지 않았다.

“망월장!”

“옳거니, 헌데 망월장은 백일장 뒤에 열릴 텐데.”

“듣기론 백일장이 오늘까지고, 망월장은 며칠 뒤에 열린대요.”

“아.”

어쩐지 부탁받은 글의 시어가 전부 같아서 의아해하던 참이었다. 백일장에 내려는 시문마저 대필을 맡기다니, 이러다간 동네 양반들의 시문을 겨루는 자리에 현경의 글만 절반 이상이 나돌지도 모를 일이었다.

글을 사간 양반들은 자신들이 쓴 글인 양 내놓을 텐데 그 우스꽝스러운 광경을 보지 못하니 현경은 좋은 구경을 놓쳐 아쉽기만 했다.

“언니가 망월장에 글씨 써서 내면 아마 장원할 걸요.”

“그걸 어찌 알아?”

“주인어른 댁에서도 가끔 그런 거 하는데, 내가 보기엔 이 동네에 글재주 있는 사람이 영 없어요.”

“이야 부실이가 벌써 글눈이 트였구나. 그럼 이것도 잘 썼나 봐줄래?”

현경이 여태 잔뜩 써놓은 글을 부실에게 내보이며 말하니, 까만 것은 먹물이요 흰 것은 종이라. 뜻을 알 리 없는 부실은 금세 뾰루퉁한 얼굴로 현경을 쏘아보았다.

“내가 보면 알아요?”

“매번 글을 알려준다 해도 싫다지.”

“나 같은 노비가 글 알아서 뭐해요.”

“뭐하긴. 시도 짓고, 편지도 쓰고.”

“편지 써도 읽을 사람이 없는데 뭐 하러요.”

“…….”

“우리 어매랑 아부지도 까막눈일 텐데?”

툴툴대며 성질을 부리던 부실은 말없이 그새 또 딴 데 정신을 놓은 현경을 올려다보았다.

“아무튼 망월장 내봐요. 거기서 장원하면 혹시 아나, 글 값을 더 쳐줄지.”

“하이구, 돈 얘기 그만하고 여기 글 다 썼으니, 가져가라.”

“벌써 다 썼어요? 글 찾으러는 저녁에 온댔는데.”

현경은 부실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주섬주섬 두루마리들을 챙겨 널찍한 보자기로 감싸 묶었다. 그 꾸러미가 제법 커서 부실이가 들기엔 그 몸집의 반 만했다. 결국 끈을 덧대어 포대기 두르듯 몸에 매어주니 그게 신났는지 부실이 호들갑을 떨었다.

“나 내려가는 거 잘 봐요.”

부실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숲길을 뛰어 내려간다. 현경이 뛰지 말라 하는데도 그 말은 부실에게 들리지 않았다.

“망월장이라.”

방에 들어온 현경은 문득 감자골에서의 옛 기억들이 떠올랐다. 시골의 작은 마을 여럿이 모여 백일장이 열리면 감자골에서도 선비들이 글을 지어 마을의 명성을 알리곤 했다.

특히나 학문하는 선비들이 많아 백일장이 열릴 때면 거의 마을 잔치가 벌어지곤 했다. 벼슬자리가 주어지거나 재물을 주는 것도 아니지만 글깨나 쓴다는 선비들의 자존심을 겨루는 것이라 오히려 더 치열했다.

백일장이 끝나면 그 뒤에 열리는 망월장에 대한 이야기도 꼭 빠지지 않았다.

달빛이 청명한 밤에 열린다는 망월장은 이름을 쓰지 않고 투서하는 것이 전통이었다. 하여 망월장에 나오는 시문들은 그 흥취와 글귀의 격이 가히 백일장의 겉치레에 비할 바가 아니라는 말도 많았다.

“망월장에서 장원을 해야 으뜸가는 풍류객이라 할 수 있지!”

어린 현경을 앉혀두고 혼곤히 취해 저들끼리 망월장 시제에 대해 논하던 고향 마을 선비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술상을 탁 치며 웃다가 흥얼흥얼 시를 읊기도 하던 그리운 목소리들.

그러고 보니 돈을 받지 않은 글을 쓴 지가 벌써 까마득했다. 현경이 매번 남 보기 좋은 글만 쓰다가 빈 종이를 내려다 봐도, 마음에 일렁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탓이었다.

사람들이 글을 찾으러 올 시간이 아직 한참 남았기에, 부실은 일단 두루마리들을 끌어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행랑채에 두었다간 제 어미가 불쏘시개로 쓸까 봐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결국 부실은 별달리 왕래하는 사람이 없는 별당으로 슬그머니 향했다.

“마님.”

별당마님을 불러봤지만 뒷간에라도 가신 건지 방 안엔 아무도 없었다. 부실은 두루마리들을 문갑 위에다가 잠시 놓아두고는 별당을 나왔다. 부실은 별당 근처를 두리번거리다가 저를 찾는 어미의 목소리에 후다닥 부엌으로 향했다.

부엌에서 어미를 돕던 부실은 저녁상을 들고 별당으로 향했다. 글을 찾으러 온 선비들이 기다릴까 얼른 가져다놓고 주막에 나갈 생각에 부실은 종종걸음으로 별당의 디딤돌에 올라섰다.

“마님, 밥상 들여요.”

부실이 방 안에 들어서자 별당마님이 자리에 앉아 뭔가를 열심히 읽고 있었다. 글을 아시나 보네. 부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소반을 별당마님 앞에 놓아두었다. 그리고는 뭘 읽으시나 힐끔 보는 순간 부실은 헉 하고 숨을 집어 삼키며 벌떡 일어났다. 별당마님은 그런 부실을 보더니 금방 다시 하얀 종이들로 시선을 둔다. 묘한 표정이었다.

“어디서 난 글이니?”

“아. 그게.”

부실은 우물쭈물하며 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별당마님이 설마 어린 애가 글을 내다 팔며 용돈을 챙기고 있다는 걸 소문 낼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뭔가를 들켰다는 사실에 부실의 가슴이 철렁했다.

“…….”

대답을 기다리는 것은 아닌지, 별당마님의 시선이 두루마리에 쓰인 글을 따라 움직였다. 안방마님도 잘 모르시는 글을 저렇게 술술 읽어 내리고 있는 걸 보니 과연 도성서 온 여인이라 남다르긴 한가.

부실은 아란을 새삼스럽게 보다가도, 이내 은근히 그 평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름 중간에서 내다 파는 입장에서 그 값어치를 칭찬하는 말을 들으면 부실도 괜히 어깨가 으쓱이곤 했기 때문이다.

이윽고 열댓 장 남짓의 글을 모두 읽은 별당마님이 두루마리를 다시 곱게 쌓아 옆에 두었다. 그리곤 아무 말 없이 저녁상을 받을 준비를 했다.

저야 글을 모르니 잘은 모른다만, 글을 사가는 양반네들이 항상 최고다 하며 감탄하는 모습만 봐왔는데 웬걸, 별당마님은 별다른 감탄도 감동도 없는 표정으로 조용히 수저를 든다.

“글이 어떤 것 같아요?”

부실이 대뜸 묻는 말에 수저를 들던 별당마님은 대수롭지 않은 듯 조용히 말했다.

“어디 문단 사람들이 쓴 글인지는 모르겠지만.”

뒷말을 기다리는 부실의 눈망울이 기대에 차 반짝였다.

“하나같이 깊이가 없고 조악하네.”

“참나, 정말 그랬어? 깊이가 없고 조악하다고?”

현경은 눈썹을 꿈틀대며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부실이 찾아와 대뜸 조악하다는 게 무슨 뜻이냐고 묻기 전까지 현경은 나름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현경은 쥐고 있던 붓을 놓았다. 부실은 괜한 말을 물었구나 싶어 얼른 현경의 눈치를 살폈다.

“참, 어제 선비들이 망월장에서 혹시 언니 글도 볼 수 있냐고 묻더라구요,”

“…….”

“난 그냥 잘 모르겠다고 말하긴 했는데, 언니?”

대충 휘갈겨 쓴 글이라 깊이가 없다는 건 솔직히 알고 있었다. 그래도 자신이 쓴 글에 이리도 맹렬한 평을 받아본 적은 처음이라 현경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돈 받고 파는 글이라 일부러 필체도 바꿔가며 썼는데. 현경이 쓴 글 전부를 통틀어 조악하다 했으니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멍해졌다.

“일부러 보여준 건 아니고, 내가 잠깐 나갔다 온 사이에 별당마님이…….”

“그래, 괜찮아.”

눈에 띄게 시무룩해진 현경을 보며 부실은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현경은 전혀 괜찮지 않은 표정으로 괜찮다 말하고는 붓 대신 술병을 쥐었다. 지금은 왠지 또 술 마시냐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을 것 같아 부실은 슬그머니 발을 뺐다.

“저, 내일 다시 올게요?”

지금은 현경을 혼자 두는 게 나을 것 같아 부실은 슬금슬금 방을 나왔다. 현경이 들고 있던 술병을 상 위에 놓았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닫혔다.

얼굴도 모르는 이가 고작 한마디 내뱉은 말 가지고 웬 청승인가 싶다. 헌데 왠지 모르게 정말 말 그대로 현경은 기가 팍 꺾였다.

좁은 방 안에 자신을 가두고 혼자 지내는 동안 마음도 많이 좁아졌는지, 때론 설렘으로 혹은 그리움으로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놓던 자신의 시는 이제 누군가에게 조악하다는 말을 듣는 지경이 되었다.

한동안 남의 글만 실컷 쓰다 보니 서책 사다 읽을 생각도 못했다. 학문을 게을리 하지 말라는 아란의 엄한 목소리가 난데없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또, 또. 현경은 자기도 모르게 불쑥 고개를 드는 아란 생각에 눈을 감았다.

언제나 현경이 써내려간 시의 주인공이던 아란이 곁에 없어서일까, 현경은 한동안 추슬렀다고 생각한 마음이 다시 흔들리고 있었다. 야속하게도 꿈속에서 얼굴 한 번 비추지 않는 사람이었다.

더 이상 이런 생각하지 않기로 몇 번이나 스스로 다짐했는데. 술기운과 함께 사무치는 그리움이 덜컥 현경에게 밀려 들어왔다.

도저히 아란이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어 딱 한 번만, 도성에 가서 확인하고 와야겠다는 생각에 새벽이면 짚신을 챙겨들고 산비탈을 정신없이 뛰어 내려갔다. 그러다 산 중턱에서 덜컥 겁이 나 두려운 마음에 걸음을 멈췄다. 그렇게 멍하니 서 있다가 술이 깨면 주저앉아 울고, 그러다 또 날이 밝으면 힘없이 집에 돌아와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잠이 들었다.

왜. 아란이 왜. 자신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아란이 그렇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 생각만 하면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 운 적이 없는데도 눈물이 흘렀다. 매일 매일 울음을 삼키며 속으로 몇 번이나 스스로를 죽여야 했다.

모두 다 잊고 살라는 강무의 마지막 말은 마치 아란을 잊으라는 말처럼 들렸었다. 아버지도 보았을까, 아란의 마지막을. 그런 생각을 하다 문득 아버지를 원망하려 하는 자신의 모습이 고통스러워 또 현경은 괴로운 숨을 삼켰다.

제 한 목숨 감당하기에도 벅찬 운명을 타고 났으면서도, 곁에 두고 싶은 사람 하나를 욕심냈다. 그 사람마저 불행 속에 끌어들이고 있다는 걸 눈으로 확인하면서부터는 겁이 났다. 그런데도 놓지 못한 자신에게 벌이 내려진 걸까.

그만, 이제 생각하면 안 돼. 하지만 그럴수록 그리움이란 건 진해질 뿐이었다.

“아, 어떡해. 너무 보고 싶다.”

현경은 한숨처럼 혼잣말을 내뱉으며 눈가를 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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