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대가 있음에 (47)화 (47/63)

#47화

인적이 드문 숲에 사람이 살지 않은 지도 오래된 초가집이라 사람들과 마주칠 일이 없었다. 고향으로 돌아갈까 하니 아버지가 없고, 도성으로 돌아갈까 하니 아란이 없을까 봐 현경은 이 숲을 나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살아라, 꼭 살아라. 아버지는 모두 잊고 살아 있으라고 했지만 현경은 살아야 하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여전히 눈을 감으면 스치는 얼굴들과 귓가를 떠나지 않는 소리들은 언제쯤 잊힐는지.

시간이 좀 더 지나면 정말로 잊혀지려나. 오 년만 지나면, 십 년만 지나면. 현경은 아무 것도 하지 않을 땐 늘 방 안에 웅크려 앉아 소용없는 생각들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홀로 죽지 않을 만큼의 끼니를 때우면서 가끔 찾아오는 부실과 말동무를 하고 지낸 지도 어느덧 삼 년이 지나 있었다.

요 며칠 집안이 하루종일 부산스럽다. 도성에서 누가 온대나 뭐래나.

부실은 제 알 바 아니라는 듯 분주히 오가는 집안사람들을 멀거니 보다가, 부엌 뒤편으로 촐랑거리며 뛰어 들어갔다. 가마솥에 뽀얀 광목천을 폭폭 삶고 있는 어미 곁에 쪼그려 앉아서 흙바닥에 손장난을 하고 있는데.

“부실아, 장난 고만하고 행주 들고 별당 건너가서 방 좀 꼼꼼히 닦고 와라. 엄니는 요거 얼른 하고 저녁상 차려야 하니까.”

“예에.”

부실은 시큰둥하게 대답을 하고 손을 털었다. 어미가 쥐어준 행주를 들고서 터덜터덜 마당을 지나 별당으로 향했다.

“부시리 헤엄치냐, 짚신 해지니께 고만 질질 끌어라.”

마당을 쓸며 농담하는 큰놈아저씨에게 콧방귀를 뀌어주고 부실은 별당으로 들어갔다.

하루걸러 닦아대는 통에 반질반질한 반닫이 위를 대충 행주로 훔치던 부실은 은근슬쩍 비단 보료 위에 앉아 보았다.

“아효, 좋다.”

부실은 거의 눕다시피 다리를 쭉 펴고 앉으며 별당 안을 슥 둘러보았다. 여인의 방이라면 이 정도는 되어야지. 물론 부실이 지내는 행랑채는 이렇지 않지만 그래도 휑한 현경의 방보다야 훨씬 나았다.

“그나저나, 여기에 누가 온다는 거야.”

갓난아이였던 부실이 어미와 함께 이 집에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별당은 줄곧 비어 있었다. 그럼에도 늘 먼지가 쌓이지 않게 반들반들 닦는 것이 중요한 일과여서, 부실의 어미는 거의 매일 별당을 청소했다.

부실이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할 적엔 청소하는 어미를 따라 별당에서 놀곤 했는데, 주인부부는 그것을 나무라지 않았다. 오히려 부실의 어미가 부엌에서 일을 하고 있으면, 주인마님은 어미 옆에서 꼬물대는 부실을 데려다 별당에서 함께 놀아 주기도 했다.

하여 집안 어른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는 데다가 아직 한 사람 몫을 하기엔 나이도 어리니, 부실은 그야말로 놀 때 놀고 일할 때도 놀았다. 어미는 늘 부실더러 종년 팔자 중에선 제일이라 했는데, 요즘 부쩍 철이 든 부실은 그것이 칭찬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그 천성이 어디 갈까. 금방 일하기 귀찮아진 부실은 더 닦을 것도 없어 보이는 방 안을 돌아보다가 몰래 별당을 빠져나왔다.

“언니!”

대답이 없는 방문을 바라보며 부실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삐걱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리고 방 안엔 현경이 웅크려 끙끙 앓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도 부실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

부실은 한숨을 폭 쉬다가 얼떨결에 들고 나온 행주를 들고 냇가로 향했다. 냇물에 대충 행주를 적시고는 비틀어 물기를 쭉 짜내었다. 다시 방으로 돌아와 눈물범벅인 현경의 얼굴 위로 행주를 가져다 댄다. 손아귀 힘이 약해 물기가 덜 가신 행주로 얼굴을 척척 닦아내는 부실의 손길이 익숙했다.

“정신 차려 봐요.”

잘 살다가도 어쩌다 한 번씩 저렇게 죽을 사람처럼 눈도 뜨지 못하고 꼼짝없이 울기만 하는 현경을 보며, 부실은 어린아이답지 않게 혀를 쯧쯧 찬다.

오늘처럼 저렇게 앓으면 이후 며칠간 기력 없이 빌빌댈 게 뻔했다. 평소엔 싱글싱글 농담도 하고 괜찮다가 현경은 가끔 저렇게 제 정신이 아닌 상태로 누군가를 애타게 찾곤 했다.

여전히 꿈속을 헤매는 듯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현경의 이마에 행주를 얹어놓으며 부실은 그 작은 어깨가 들썩이도록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탈상을 하고 며칠 뒤, 집안사람들은 모두 상복을 벗었고 다시 분주한 일상으로 돌아갔다.

아란은 현경과 함께 지내던 집에 잠시 들러 허전해진 방 안을 둘러보았다. 현경의 물건은 대부분 정리한 탓에 창틈으로 들어오는 오후 햇빛만이 텅 빈 사랑방을 채우고 있었다.

턱을 괴고 구부정하게 앉아 잘 읽히지 않는 서책을 들여다보다가도 열린 문틈으로 안방을 슬쩍 내다보던 현경이었다. 그 동그란 얼굴이 금방인 듯 아란의 눈에 선했다.

“마님, 이제 출발하셔야지요.”

방문 밖으로 들리는 노복의 말에 아란은 방에서 시선을 거두고 마루 아래로 내려왔다. 아란이 가마에 오르자, 가마꾼들이 발을 맞추어 걷기 시작했다.

남편을 여읜 과부는 다른 사내의 첩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 나라의 법도였다. 태어나 아버지의 여식으로 자라 남편의 처로, 그리고 아들의 어미로. 여인 혼자서는 마음대로 살 수 없으니, 세상을 아우르는 사람 된 도리에 여인이 차지하는 것은 고작 그뿐이란 것이 우습기만 했다.

“얼마나 상심이 크시오. 허면, 어디 거처는 정해지셨는지.”

심지어 현경의 대소상을 치르는 동안에도, 조문을 빙자하여 그 시커먼 눈길로 아란을 선점하려고 찾아오는 자들도 더러 있었다.

한순간에 남편과 시아버지를 여읜 슬픔을 위로해 주던 마을 사람들도 얼마 지나지 않아 박복한 여인의 팔자란 것이 이리도 무섭다는 말을 가볍게 했다.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안타까워하는 그 눈빛들은 연민도 동정도 아닌 저주와 같았다.

정부인으로 들이자니 여러모로 걸리는 것이 많았던 아란이 과부가 되었다는 소식에, 마을 사내들은 그 나이가 많고 적음을 떠나 한 번씩은 탐을 냈던 그 속내를 은근히 드러냈다. 아닌 척 점잔을 빼는 간교한 자들 때문에 아란의 집엔 탈상을 하고 난 후로 찾아오는 사람이 오히려 더 많았을 정도였다.

난잡한 구설과 질펀한 시선들이 가득한 도성 안은 더 이상 아란의 추억이 깃든 곳이 아니었다.

소중한 딸이 슬픔에 잠겨 있는 것을 보는 것도 모자라, 저자의 물건처럼 이리저리 저울질 당하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은 제현 부부에게 가슴을 짓누르는 고통이었기에. 어머니는 아란을 자신의 친정으로 내려 보내기로 했다.

하루하루 말라가는 딸아이를 보는 것보다 아란이 조용한 곳에서 숨이라도 편히 쉴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었다.

아란은 도성을 떠나 남쪽으로 향하는 가마 안에 앉아 창을 열어 두었다.

도성에 올라오는 길 위에서 쉼 없이 두리번거리며 재잘대기 바빴던 그리운 얼굴이 또 다시 떠오른다. 이 넓은 세상을 구경하고 싶다던 꿈 많은 사람이었는데, 참으로 바삐 떠났구나. 아마 지금쯤 아란도 모르는 곳에서 두 눈 가득 세상을 담고 있을지.

아란은 지나는 길가에 듬성듬성 핀 들꽃들을 보며 현경이 남기고 간 흔적인 듯 찬찬히 눈에 담았다. 그때는 귀 기울여 듣지 않았던 저 꽃들의 이름이 뒤늦게 마음에 아렸다. 이름을 지어준 사람이 없으니, 꽃들도 이름을 불러주는 이가 없어 슬퍼했다.

“어서 오거라, 그간 고생이 많았지.”

외숙부와 외숙모는 아란을 다정하게 맞아주었다. 조용한 시골 마을엔 사람이 많지 않고 집들도 드문드문 떨어져 있어 아란은 마음이 그나마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

아란은 어머니가 젊은 시절을 보냈던 별당에서 지냈다. 아이가 없는 외숙부와 외숙모는 세월이 많이 흘러 어느새 다 커버린 조카를 여전히 아이 대하듯 애틋하고 다정하게 바라보았다.

도성과 달리 조용한 곳에서 며칠을 보내고 나니 아란은 이제 겨우 창밖의 풍경을 보며 조금씩 다른 생각도 할 수 있었다. 햇살이 따스한지, 바람은 거세게 불지는 않는지, 간밤의 비에 땅이 얼마나 젖었는지와 같은 평범한 생각들이었다.

아란이 머무는 별당은 밥상을 들이거나 방 안을 닦기 위해 어린 여종이 가끔씩 드나드는 것 말고는, 안에 사람이 있는지도 모를 만큼 고요했다. 마치 아무도 살지 않던 전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이 근처에 혹시 대나무 숲이 있니.”

“예?”

숨죽이며 조심조심 바닥을 닦고 있는데, 갑자기 뜬금없는 말을 하니 부실은 순간 어깨를 움찔했다. 놀란 그 목소리가 제법 컸는지 말을 물어온 여인도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

“대나무 숲은 없지만, 소나무가 많은 데는 있어요.”

“이곳에서 많이 멀까.”

“아주 멀지는 않은데, 길이 좀 험해서 사람들이 잘 안 다녀요.”

여인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다. 갑자기 웬 대나무? 부실은 별당을 나오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 보니 별당에 드나든 지 엿새 만에 처음으로 듣는 여인의 목소리였다.

부실의 어미는 여인을 별당마님이라 불렀다. 도성에서 온 주인어른의 조카딸이라는 것은 큰놈아저씨에게 들었다. 덧붙여 남편을 잃은 과부라는 것도.

“몸과 마음이 많이 지치신 분이니까, 잘 모셔야 한다. 알았지?”

단단히 주의를 주던 제 어미의 말을 귓등으로 듣던 부실은 막 가마에서 내리는 여인의 등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 작은 뒷모습이 누구와 많이 닮은 것 같아서 쓸쓸해 보였다.

“아까 별당마님이 이 동네에 대나무 숲이 있냐고 하시던데.”

“말을 하셨다구?”

“응, 나한테 갑자기 물어봤어요.”

매일매일 산송장처럼 생기 없이 앉아만 있던 분이었는데 오늘은 말을 걸어왔다고 하니, 부실의 어미는 그것 참 다행이라며 주인어른께 그 소식을 전했다. 말 한마디 했을 뿐인데 집안사람들이 모두 안도하다니, 부실은 별당마님이 꼭 갓난아이 같다고 생각했다.

“부실이가 옆에서 말동무도 좀 해드리고 그래라, 응?”

주인어른의 간곡한 부탁에 그 후로 부실은 별당에서 지내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부실이 큰놈아저씨 흉이라던가, 부엌에서 생선을 훔치는 고양이 같은 쓸데없는 말을 재잘대면 별당마님은 가끔 고개를 끄덕이는 게 전부였다. 그러다 중간중간 넋을 놓고 다른 생각에 빠져 있는 듯한 그 표정은 뭐랄까, 당장이라도 바람에 흩어질 것 같았다.

“오늘은 어떠하더냐, 말을 좀 하던?”

매일 별당마님의 안부를 묻는 주인어른께 부실은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냥, 금방이라도 사라지려는 사람처럼 늘 그렇다, 라고 말하기엔 말하는 자신조차 쓸쓸해져 기운이 빠지는 것 같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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