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대가 있음에 (44)화 (44/63)

#44화

“마님, 마님을 뵙고 싶다는 분이 찾아왔습니다.”

“나를?”

“예, 강무 어르신을 모시는 분이라 합니다.”

“아버님을 모시는 분이라니?”

“자세한 말은 없고, 그저 어르신께서 보내셨다 하던데요.”

“일단 들어오시라 해라.”

아란은 의아하여 마루 밖으로 나와 있었다. 노복의 안내를 따라 마당을 가로질러 들어오는 낯선 사내는 아란을 뚫어져라 보더니 이내 씨익 웃었다. 주름진 눈가와 함께 일그러지는 흉터가 주는 인상이 꺼림칙하여 아란은 무심코 두 손을 모아 쥐고 있었다.

“아이고, 안녕하십니까.”

“어디서 오신 누구십니까.”

“저는 예전에 강무 형님과 함께 일했던 사람입니다. 강무 형님이 급히 고향에 내려가시다 깜빡 잊은 것이 있다 하셔서요.”

“그게 무엇입니까?”

“예서 얘기하긴 좀 그렇고, 일단 들어가서 천천히 말씀 드리지요.”

사내는 싱글싱글 웃으며 집을 한 번 슥 둘러보고는 아란이 권하지 않았는데도 대뜸 마루 위로 올라섰다.

“사랑방이 이쪽이려나.”

혼잣말로 중얼거리던 사내는 거침없이 사랑방 방문을 열고는 몸부터 들이밀었다. 아란은 갑작스러운 사내의 행동이 당황스러웠지만 일단 침착하게 사내를 따라 방 안으로 들어갔다. 사내는 현경이 앉던 자리에 서서 방 안을 이리저리 살피고 있었다.

“아버님께서 잊으신 게 있다 하셨다구요.”

“아, 강무 형님께서 그, 옷고름을 좀 가져오라 하셔서 말입니다.”

“예? 옷고름이라면 어떤…….”

“혹, 아침에 강무 형님을 뵈었을 때도 지금 이 저고리를 입고 계셨습니까?”

“예, 그렇습니다만.”

“그럼 그 옷고름이 좋겠군요.”

아란은 난데없이 지금 입고 있는 저고리의 옷고름을 내달라는 말에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 아까부터 사내에게서 느껴지는 기색이 불길하여 경계를 늦추지 않던 아란은 아직 이 낯선 사내가 자신에게 이름조차 밝히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아버님과 함께 일했던 분이라 하셨지요, 혹 성함을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사내는 아란의 말에 뜻 모를 미소를 짓더니 어깨에 메고 있던 봇짐 속에서 기다란 검집을 꺼내보였다.

“이게 무엇인지 혹시 아십니까.”

“왕실의 호위무사들이 쓰는 검 아닙니까. 이것을 왜…….”

“허, 과연 궁 출입을 하셨다더니 눈썰미가 있으시군요.”

“무슨 뜻입니까.”

“보시는 대로, 저는 왕실의 호위무사입니다.”

사내는 대뜸 검집에서 검을 쑥 뽑아들더니, 그대로 칼날을 아란의 귓가 근처에 천천히 갖다 대었다. 아란은 사내와 눈을 똑바로 마주한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뭐하시는 겁니까.”

“강씨 왕조는 검으로 세워진 나라입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박씨의 검으로 말이지요.”

“…….”

“검으로 세운 나라에선 방해가 되는 잔가지가 있다면 검으로 쳐내는 것이 옳습니다. 그렇지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늘어놓는 사내의 두 눈에 얼핏 살의가 비쳤다. 입을 꾹 다문 아란을 향해 비스듬히 기울인 칼날이 아란의 고운 살결을 금방이라도 벨 듯 가까이 닿았다.

“하여 그런 왕조를 보필하는 자라 이름을 사사로이 밝힐 순 없음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내는 아란의 목 언저리에 대었던 검을 가볍게 떼어내고는 다시 아란의 옷고름 쪽으로 겨누었다.

“제가 자를까요 아니면, 마님께서 하시겠습니까?”

“아버님이라면 아무런 설명 없이 제 옷고름을 떼어오라 말씀하시진 않았을 겁니다.”

“…….”

그 말에 아란을 서늘하게 노려보던 사내의 눈초리가 잠시 누그러졌다. 그러다 생각을 하는 것인지 사내는 금방 눈에 힘을 풀고 검을 아래로 내렸다.

“음, 안사람의 옷고름을 길목에 매어두면 귀양을 떠난 자가 금방 돌아온다는 속설이 있다 합니다.”

“그런 말이 있습니까.”

“있겠지요, 그러니 부군을 위해 옷고름을 떼어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란은 사내의 표정과 하는 말 모두가 미심쩍었지만 그래도 현경을 위해서라니 마다할 수는 없었다. 아란이 옷고름을 조금 풀어 사내 쪽으로 내밀자 예리한 검은 옷고름을 가볍게 베어냈다.

“그나저나 부군께서는, 분명 강무 형님의 아들일 텐데.”

“…….”

“멀리서 보아 그런가. 혼례 때 얼핏 보기에 호리호리한 것이 영, 사내 같지가 않아서 말입니다.”

“무슨 말을 하시는 겁니까.”

“사내가, 확실한 거지요?”

“아버님을 모신다는 분께서 언행이 다소 무례하십니다.”

단호한 아란의 말에 사내는 어깨를 으쓱이며 도로 검집에 밀어 넣었다. 날이 스치는 소리만으로도 검의 묵직함이 전해졌다.

“결례가 많았습니다. 다른 뜻이 있던 것은 아니니 마음 쓰지 마시길 바랍니다.”

“아버님께 옷고름을 전해 드리려면, 어서 나가 보셔야 하지 않습니까.”

“하하하, 그러지요. 저도 해야 할 일이 있어 갈 길이 바쁜 사람이니까요.”

사내는 껄껄 웃으며 아란을 비스듬히 내려다보았다.

“부군의 무사 귀환을 바랍니다.”

“멀리 나가진 않겠습니다.”

아란은 배웅도 나가지 않고 마루 위에 선 채로 사내가 나간 대문을 한참 바라보았다. 강무가 보낸 사람이라고는 하나 괜히 찝찝한 기분을 지울 수 없어 아란은 부엌에 있던 여종을 불렀다.

“업지야, 대문에 소금 한 주먹만 뿌려줄래.”

“예? 예 마님.”

아란의 집에서 나와 곧바로 도성 외곽 쪽으로 빠르게 걷던 박윤은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더니 눈을 찡그렸다. 그와 함께 눈가의 흉터도 바르르 떨렸다.

“하여간, 그 아비에 그 딸이라더니. 이씨 집안 것들은 사내고 계집이고…….”

박윤은 길가에 침을 한 번 퉤 뱉고는 다시 발길을 돌렸다. 도성문을 급히 빠져나와 강무와 있었던 주막으로 다시 돌아오자마자 박윤은 평상에 걸터앉아 짧은 서신을 써내렸다.

‘이것으로 나의 결의를 전하니, 그 뜻을 헤아려 강무 자네의 의지를 보이게.

일의 마무리는 열흘 후, 매락산 전나무 숲에서.’

박윤은 붓을 내려두고 왼손 새끼손가락을 힘껏 깨물었다. 손가락에서 뚝뚝 흐르는 피를 옷고름에 잔뜩 묻히고는 서신과 함께 피 묻은 옷고름을 봉투에 우겨넣었다. 그리곤 사발에 탁주를 가득 부어 뭉개진 손가락을 담근 채로 꿀떡꿀떡 술 한 잔을 비워낸다. 크으, 소리를 내며 잔을 털던 박윤은 주막을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더니 주막 입구에 쪼그려 앉아 하품을 하고 있던 말꾼 하나를 불렀다.

“어이, 은자 한 닢에 심부름 하나 하지.”

“뭐요.”

“남쪽 내려가는 길에 이 서신 하나만 흑색 도포 입은 사내에게 전해주면 돼.”

“흑색 도포 입은 사내가 한 둘인가.”

“얼마 전에 출발했으니 멀리는 못 갔을 거야, 박윤을 안다고 하는 사내한테 잘 전해주고 돌아오면 내 은자 한 닢 더 얹어주고.”

“흠, 거 말 바꾸지 마쇼.”

심드렁하던 말꾼은 은자 한 닢을 더 준다는 말에 슬그머니 바지춤을 털고 일어났다. 건네받은 서신을 들고 말을 몰아 남쪽 길로 멀어지는 말꾼을 물끄러미 보던 박윤이 등 뒤에서 국밥을 허겁지겁 들이키던 다른 사내의 등을 툭툭 쳤다.

“너도 슬슬 준비해라.”

“예.”

“옷은.”

“관아에서 한 벌 빼와서 챙겼습니다.”

“매락산 오르는 길은 알지.”

“예.”

박윤이 소매 춤에서 두루마리를 꺼내어 사내에게 건네자, 사내는 두루마리를 품 안에 챙겨 넣었다.

“실수 없이 잘 하고.”

“예.”

“내려가다 방금 전에 말꾼 그놈 보거든 알아서 처리하고.”

“예.”

과묵한 사내는 짧은 대답과 함께 고개만 한 번 끄덕였다. 사내는 소매로 입가를 슥 훔쳐내고는 일어나 주막을 나섰다. 박윤이 그 모습을 보다 다시 사발에 술을 채웠다. 아직 멎지 않은 손가락의 피가 붉게 새어나와 술에 섞여 들었지만 박윤은 아랑곳 않고 술 한 잔을 또 다시 목구멍으로 넘겼다.

몇 술 뜨지 않은 저녁상을 물리고도 아란은 방 안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결국 쓰개치마를 챙겨 들고서 마당에 나오니 여종이 쪼르르 나와 이 밤중에 어딜 가시냐 물어온다.

“본가에 잠시 다녀오마.”

“이 밤에 혼자 다녀오시게요? 그럼 저도 가서 내일 찬거리 할 장도 좀 얻어올까 봐요.”

“그래 그럼 같이 가자.”

아란은 낮에 본 그 수상한 사내 때문에 머리가 복잡하여 밤길이 무서운 줄도 몰랐으나, 여종은 순라꾼들이라도 마주칠까 싶어 이리저리 주위를 살피는 눈길이 분주하기만 했다.

본가의 대문에 들어서자마자 아란은 아버지부터 찾았다. 사랑방에서 책을 읽던 제현은 늦은 시간에 찾아온 딸을 보며 놀란 표정을 짓다가도 이내 반가워하며 아란을 사랑방으로 불렀다.

“이 밤중에 무슨 일로 왔느냐.”

“아버지, 박씨 가문이 건국공신 시호를 박탈당한 게 아마 제가 궁에 들어가기 전이었지요.”

아란이 대뜸 꺼낸 이야기에 제현이 금세 표정을 굳혔다.

“그때 금군에 있던 박씨 가문 사람들 모두가 궁에서 나왔다고 들었는데 혹 궁에 아직 남아 있는 자가 있을까요.”

“글쎄, 역모에 연루된 가문 출신의 사람은 모두 궁에서 퇴출되고 이후로도 박씨 가문에서는 무관을 뽑지 않았던 걸로 알고 있으니. 그럴 리는 없지.”

“…….”

“헌데, 그 얘기는 갑자기 왜.”

“아, 아닙니다. 그저, 누군가 강씨 왕조가 박씨의 검으로 세워졌다고 말하는 이야기를 얼핏 들어서요.”

“여태 그 옛날의 영광에 묶여 사는 미련한 자들일 테지. 허나, 그런 자들이 내뱉는 말을 귀담아 들어서도, 가까이 해서도 안 된다 아란아.”

“알고 있습니다.”

제현의 표정이 더욱 엄하게 굳었다. 십 년 전의 그 일을 아란이 갑자기 물어오니 제현도 당황하여 불편한 기색을 미처 숨기지 못했다. 왕실의 총애를 받고자 익명으로 투서한 자가 박씨 가문의 사람이라는 것을 밝혀낸 건 이씨 문중의 사람이었다.

당시엔 제현이 이미 관직을 무르고 궁에서 나온 뒤라 자세한 내막은 알지 못했으나, 전해 듣기로는 제현도 알고 있는 자의 소행이었다. 박윤. 모두 그자의 짓이었다. 공을 세우기 위해. 박씨 가문에 내려진 건국 제일 공신의 시호를 수호하는 데에 혈안이 되어 그런 짓을 벌이고도 뻔뻔하게 궁 안을 휘젓고 다니던 자였다. 그 일로 강무를 잃었으니 제현이 박윤을 곱게 생각할 이유는 없었다.

그렇게 수년을 숨겨오다 투서의 필체와 박윤의 필체가 같은 것이 밝혀지자, 박윤은 세자궁 호위무사의 본분을 잊고 헛된 낭설을 퍼뜨린 죄로 곧바로 궁에서 추방되었다. 그 후로도 탈영한 금군의 병사들과 도적들을 모아 작당을 하려던 것이 발각되어 박씨 가문의 많은 이들이 참수를 면하지 못했는데. 십 년이 흐르고도 여태 그런 말을 하고 다니는 자가 있다는 말에 제현은 혀를 찼다.

“호기심을 가질 가치도 없는 일이다. 설마 그것 때문에 이 밤중에 아비를 찾아온 것이냐.”

“아뇨 그보다는, 업지가 장을 얻으러 온다기에 잠시 부모님 얼굴도 뵐 겸 해서요.”

“그래, 흘려들은 말이라도 서둘러 잊고, 행여 지나는 말이라도 무시해야 한다. 더는 알 필요도 없는 지난 일이다.”

“예 아버지.”

역시 낮에 그 자는 그저 분풀이를 하러 온 박씨 집안의 사람 중 하나였을까. 아란은 문득 경솔한 호기심으로 괜한 말을 꺼낸 것 같아 제현에게 오늘 있었던 일도 차마 말하지 못했다.

압송도사가 어명을 전했다. 조내관은 땅이 울리도록 성은이 망극하다고 울먹였다.

그리 오래지 않아 전교가 내려왔지만 현경에게는 그마저도 영겁의 세월처럼 긴 시간이었다. 어느새 봄이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아란과 함께 봄을 맞이하는 것은 처음일 것이다. 현경은 설레는 마음으로 그동안 아란에게 썼던 서신을 챙겨 넣고 말 앞에 섰다.

“판관 나리께서는 따로 전교가 내려 온 것 같습니다.”

“저만 따로요?”

“그게, 이 자가 전해 온 것인데, 고향에 들러 아버지께 인사를 드리고 오라는 명이 함께 내려진 것 같습니다.”

압송도사는 갑작스레 못 보던 나장 하나가 급히 전해온 전교라 그런지 고개를 갸웃했다. 당장이라도 아란에게 달려갈 기세였던 현경이 잠시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 얼굴도 못보고 귀양을 왔으니 먼저 인사를 드리는 게 예의에 맞는 것 같기도 하고.

고향에 들렀다 도성에 가려면 적어도 십여 일 넘게 소요될 터였다. 현경은 챙겨 넣은 서신을 다시 꺼내어 조내관에게 건네주었다.

“먼저 도착하시면 부인께 전해 주실 수 있나요.”

“알겠습니다, 나리.”

“혹, 걱정하실지도 모르니, 잊지 말고 부탁드립니다.”

현경의 목소리엔 아쉬움이 흠뻑 묻어났다. 시무룩해진 현경을 보며 조내관은 걱정 마시라며 웃었다.

“그럼 도성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나리.”

조내관은 압송도사와 나장 둘을 따라 함께 길을 떠났다. 그들을 보며 현경은 내심 씁쓸한 마음이 들었지만 이내 힘차게 말에 올랐다.

“여기서 고향 가는 길은 금방이니 저 혼자서도 괜찮습니다.”

“아닙니다, 고향까지 특별히 잘 모시라는 명이옵니다.”

현경이 괜찮다 하는데도 나장 하나가 끝까지 남아 제 말고삐를 잡았다. 현경은 그간 함께 있었던 나장들이 아닌 낯선 이와 함께하니 조금은 어색했다. 그나마 전의 나장들은 재미난 사람들이라 그들과는 조금 말을 텄었는데 새로 온 나장은 어쩐지 말이 별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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