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대가 있음에 (43)화 (43/63)

#43화

현경의 귀양 소식이 더해져 저자에 나도는 소문들은 여전히 가라앉지 않았다.

어느 날 갑자기 자취를 감춘 홍옥은 더 이상 기방에서 찾을 수 없었다. 실은 귀양 간 것이 아니라 그 종친이 홍옥과 함께 야반도주를 한 것이 아니냐 떠드는 사람도 있었고, 홍옥은 고향에 내려갔을 것이라 말하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홍옥의 고향을 알지 못했으니, 그저 홍옥은 멀리멀리 달아난 사람이 되었다.

아란은 자연히 외출을 삼가고 방 안에만 머물러야 했다. 전에는 하루 종일 책을 읽어도 허리를 곧게 편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았는데, 며칠간 기력을 다한 이후로는 가만히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버티기가 힘겨웠다.

제현은 현경이 없는 동안 딸아이가 본가에 들어와 지내길 바랐지만 아란은 홀로 집을 지켰다. 늦지 않게 돌아올 것이라던 현경의 약속 하나만을 믿으며 마음을 추스르고 또 추슬렀다.

강무가 고향으로 내려가기 전 아란을 찾아왔다.

“벌써 내려가십니까.”

“도성에선 오래 머무르기가 불편하구나. 현경이가 돌아오면 또 보겠지.”

강무는 쓸쓸히 웃으며 아란을 보았다. 혼례날 후로 처음 보는 아란의 얼굴이 너무나 수척하여 강무는 마음이 아팠다. 강무는 노복을 시켜 기력을 보하는 약재를 사오게 했다. 손수 약을 달여 한사코 괜찮다는 아란의 앞에 들이밀었다.

“어서 들거라, 다 먹는 걸 보고 가야겠다.”

“아버님.”

“너에게 이런 고초를 겪게 하니 면목이 없다.”

“제가 선택한 분입니다, 이 정도는 견딜 수 있습니다.”

강무는 담담히 말하는 아란이 오히려 안타까웠다. 현경에 대한 걱정만 하느라 아란을 미처 살피지 못한 것이 후회되었다.

“염치없지만 우리 현경이를 조금만 더 기다려 줄 수 있겠느냐.”

“이미 제 평생의 동무인 분입니다.”

“살아 보니 꼭 진실만이 옳다 할 순 없더라. 진실이 때론 진심을 가리니. 하여 무슨 일이 있더라도 서로를 믿고 잘 살아야 한다. 그래 줄 수 있겠느냐.”

“명심하겠습니다.”

“그래.”

그래. 강무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래, 그거면 되었다.

강무가 아란의 집에서 나와 도성문을 막 지나려던 참이었다. 길을 걷는데 시장에 들어서는 골목부터 누군가 뒤를 따르는 듯한 느낌이 들어 강무는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때, 마주 걸어오는 행인 하나가 강무를 힐끔 거리며 걸음을 주춤거렸다. 강무가 이를 수상히 여겨 피하여 걷는데, 갑자기 그 사내가 일부러 몸을 부딪치려 했다. 강무는 몸을 비틀어 피하고는 사내의 뒷덜미를 잡아채 팔을 옮아 매었다.

“윽, 잠깐, 이보시오, 잠깐만.”

“웬 놈이냐.”

꼼짝없이 잡힌 사내는 잠시 저항을 하다가 힘에 부친 듯 몸을 축 늘였다. 이제 보니 뼈가 앙상하고 기력이 하나도 없는 사내였다.

“저, 저기 웬 사내가, 돈을 준다 했소.”

“누가.”

“나도 잘 모르오, 그저 시키는 대로 하라기에.”

비쩍 마른 사내가 붙잡혀 덜덜 떨며 말하는 사이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내 숲에서 갈색 도포를 입은 사내가 걸어 나왔다.

“무례를 용서하게, 강무.”

“자네는.”

“도성에 나타났다더니 사실이었군 그래, 이게 얼마만인가.”

강무를 보고 무척이나 반가워하는 사내를 보며 강무는 조금 당황스러운 표정이었다.

“좀 더 내려가면 주막이 있으니, 한잔하지.”

분명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사람이기는 하나, 역시나 어딘지 모르게 꺼림칙한 기분이 들어 강무는 경계를 풀지 못했다.

“자네를 오랜만에 보니 반가워 내 장난을 좀 쳤네.”

사내의 왼쪽 눈가에는 씨익 웃을 때 함께 일그러지는 흉터가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강무는 옛 기억이 더욱 또렷해졌다. 박윤. 세자궁을 호위하던 무사 중 하나로, 강무와도 함께 세자를 모셨던 사람이었다.

“십 수 년 만에 만난 것인데. 자네 눈이 너무 매서워, 서운하네.”

강무가 궁에서도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았기 때문에 막역한 사이까지는 아니었으나, 개중 그나마 가까이 지냈던 옛 동료였다. 기질이 호탕하여 세자와도 손발이 잘 맞아 암행을 갈 때 강무 대신 주로 호위를 했던 자였다.

“내가 도성에 있다는 것은 어찌 알았는가.”

“하하, 궁 밖을 떠난 지 오래되어 벌써 잊은 겐가.”

“…….”

“궁에는 지붕 처마에도 보는 눈이 달려 있지.”

“왜 날 보고자 했지.”

“여전하군, 강무. 이러니 정말 세자궁에서 지내던 그때 생각이 나는구만.”

“알다시피 천성이 좀 예민하니, 말을 길게 돌리지 말게.”

“아하하, 추억 팔이는 집어치우고 그럼.”

박윤은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하나, 하고 중얼거리더니 술잔을 잡은 채 뜸을 들였다.

“그날 자네가 갑자기 사라지고 줄곧 자네의 흔적을 찾았었네.”

“나를? 어째서.”

“어째서라니, 그러면 안 되는가?”

박윤이 재밌다는 듯 웃자 강무는 박윤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박윤이 꺼낸 이야기는 세월을 거슬러 강무를 그때의 그날로 돌아가게 만들었다.

박윤의 조부는 강태조를 도운 건국공신이었기에, 왕실과 긴밀한 가문이라는 것에 박윤은 큰 자부심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젊었을 때부터 왕실에 위해를 가할지 모르는 그 어떤 것에도 민감했고, 강씨 왕조에 대한 충성심이 유달리 남다른 자였다.

무과에 급제하여 세자궁의 호위로 들어온 이후, 박윤이 다른 동료보다 유독 강무에게 먼저 친근하게 말을 걸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물론 박윤은 강무에 대해 자세히 알진 못했지만, 그저 강씨 집안의 사내와 가까이 지내고 싶어 하던 사내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익명의 투서가 궁 안으로 날아 들어왔다. 궁에서는 왕조가 바뀔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나돌았고, 박윤은 이를 두고 볼 수 없었다.

박윤은 세자의 명을 기다렸다. 왕실에 대한 충성과 애착이라면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자는 오직 자신뿐이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 세자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나날이 수척해지고 괴로워하는 세자를 신하로서 지켜볼 수만은 없다고 여겼다.

“내가 갈 수 있었지만 이제현 그 자는 자네에게 일을 맡겼지. 그건 나도 이해했네, 자네는 강씨 집안의 사람이었으니까.”

소문은 금방 사라졌지만 그와 함께 강무 또한 사라졌다. 일을 처리하고 돌아와야 할 강무가 돌아오지 않으니 박윤은 내심 뭔가 일이 잘못되었음을 짐작했다.

세자가 잠행을 나갈 때 강무 대신 대동했던 자가 박윤이었으니, 그 집을 모를 리가 없었다. 박윤은 결국 두 눈으로 모든 것을 확인하고자 여인의 집으로 찾아갔다.

“가보니 집이 엉망이지 않나. 핏물이 밴 이불에 방 안엔 흙먼지가 가득하고. 나라면 완벽했을 텐데.”

박윤은 모든 흔적들을 지우고 집 앞에 있는 야산까지 샅샅이 뒤졌다. 역시나 헤집은 지 얼마 안 된 흙더미가 두드러지게 눈에 띄었다. 강무의 허술한 일처리에 박윤은 혀를 찼다.

그냥 그렇게 산을 내려왔더라면 아무 일 없었을 텐데. 알 수 없는 촉이라는 것이 결국 박윤의 발목을 잡았다. 결국 땅을 도로 파내어 여인의 시신을 눈으로 확인까지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박윤은 그 순간 깨달았다. 강무가 사라진 이유를.

“자네라면, 내가 아는 그 강무라면 차마 갓난아이를 베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생각했지.”

“…….”

아무 말이 없는 강무를 보며 머쓱하게 웃던 박윤이 순간 낯빛을 바꾼다. 방금 전과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싸늘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자네는 거짓말처럼 십칠 년 만에 도성에 다시 나타났더군, 열일곱 살짜리 아들 혼례를 위해서.”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아직도 그 날 자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모르는가? 살아 있어선 안 되는 아이야.”

“가여운 아이일세, 그 아이는 무슨 죄가 있는가.”

“가여워? 그 속에 뭐가 들었을 줄 알고.”

“…….”

“만약에 말이야, 그 아이가 자신이 누구의 핏줄인지 알고 있다면, 그리고 나서 궁에 들어가게 된다면 가장 먼저 뭘 하려 할까?”

강무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박윤이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입 안이 메마르는 것 같았다. 머리회전이 빠르고 영리하여 그만큼 왕실에 대해서만큼은 가차 없이 냉혹한 자였다.

“사내 차림을 하면서까지 도성에 온 이유는 또 뭘까.”

“그럴 리 없네, 그런 아이가 아니야.”

강무는 그럴 리 없다 생각하면서도 박윤의 말에 눈빛이 흔들렸다.

“왜 하필 이제현의 여식이었을까, 우연 치고는 너무나 이상하지 않은가.”

“여지껏 내 품에서 내가 키워온 아이야, 어찌.”

“언제나 산을 태우는 것은 사소한 불티지. 그 애가 강씨에 대한 원망이 얼마나 될 것 같나.”

강무는 순간 자신을 궁 안에 있는 내내 끈질기게 괴롭혔던 분노와 두려움이 다시금 살아나는 느낌이 들었다. 스스로가 그토록 무예를 단련하고 칼을 손에서 놓지 않았던 이유, 그 누구도 믿지 못하고 신경을 곤두세운 채 살아야만 했던 나날들을 떠올리자 강무는 걷잡을 수 없는 감정에 이입되어 밀려드는 갈등에 부딪쳤다. 태어나자마자 모두가 죽여야 한다고 했던 아이는 오죽할까.

“강무 자네의 측은지심은 이해하지. 허나, 잘 듣게. 그 아이가 당장이라도 칼날을 들이대도 이상하지 않을 사람이 대체 몇인가?”

“…….”

“자신을 버린 왕? 자신을 죽이러 온 사내? 그리 하라고 시킨 이제현? 그리고 그의 가여운 여식은 어떻고?”

박윤의 말이 이젠 어디까지 진실이고 어디까지 그의 생각인지 알 수가 없을 정도로 여과 없이 강무의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정말 현경의 속내가 저렇다 한들, 이상할 것도 없었다. 강무는 현경을 가여워 했다. 가엽지만 이제 와 문득 두렵기도 하다. 어찌 해야 하는가. 강무는 끊임없이 갈등했다.

“나는 이 나라 강씨 왕조를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사람이야.”

“…….”

“이젠 모든 것을 원래의 자리로 돌려 놔야 하지 않겠나.”

강무는 두 손으로 맨 얼굴을 쓸었다. 수많은 흉터로 거친 손은 지금 자신의 머릿속처럼 두 눈을 캄캄하게 가렸다. 지끈거리는 통증과는 달리 강무의 머릿속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아 뿌옇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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